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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곽희 산수화][오도현 산수화][소정 변관식 산수화][송나라 산수화]곽희의 산수화, 오도현의 산수화, 소정 변관식의 산수화, 송나라의 산수화 분석(곽희 산수화, 오도현 산수화, 소정 변관식 산수화, 송나라 산수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곽희의 산수화

Ⅱ. 오도현의 산수화

Ⅲ. 소정 변관식의 산수화

Ⅳ. 송나라의 산수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게 된 이후로, 사대부들은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와 같은 탐닉에 계속하여 젖어들게 되었고 동시에 또한 갈수록 새로운 미의 세계 속에서 도취하여 들어가고 있었다. 이는 바로 자연풍경, 산수화조의 세계이다. 자연대상, 특히 산수풍경은 이제 더 이상 문벌귀족의 아니게 된 수많은 세속 지주 사대부들이 거주, 휴식, 유람, 감상하는 환경이 되었고 그들의 현실생활과 친화, 의존하는 사회성을 띤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현실생활은 이미 더 이상 문벌사족의 압박 하에서 분발하고 진취적일 것을 요구하는 초당, 성당 시대의 생활이 아니었고 또한 사령운이 벌산개로 하던 식의 육조시대귀족들의 약탈적인 개발과도 달랐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기득권으로 만족하고 있었고 그것은 오래도록 유지하고 고착화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고 나아가 모든 봉건농촌을 이상화하고 목가화한 생활, 심경, 정서, 관념을 오래도록 유지하고 고착화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문벌세족은 그 세습적인 계급, 지위를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세속지주는 관작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자연, 농촌, 하층민에 대한 이 두 계급의 관계, 태도는 결코 일치하는 것이 아니었다. 양자의 이른바 隱逸에 대한 의미 역시 같을 수가 없었다. 육조 문벌시대의 <은일>은 본질적으로는 일종의 정치적 성격을 띤 도피였고, 송, 원시대의 <은일>은 일조의 사회적 성격을 띤 도피였다. 이 두 가지 <은일>의 내용과 의미는 광대, 협소의 차이가 있으며(육조시대가 협소하고, 송원시대가 광대함) 따라서 그들의 <은일>생활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산수화의 예술취향과 심미관 역시 심오, 천박의 차이가 있다.(육조시대가 천박하고, 송, 원시대가 심오함) 소수문벌 귀족들과는 달리 과거시험 출신의 수많은 사대부들은 언제나 재야로부터 조정으로 나아갔고 농민이었다가 관리로 되었고 지방에서 경성으로 올라갔고 시골로부터 도시로 나아갔다. 그래서 구산, 계학, 야점, 촌거는 오히려 그들의 부귀, 영화, 누대, 정각에 대한 일종의 심리적 욕구를 보충하고 교체하는 것으로 되어갔고 일종의 정서적 측면에서의 회상이나 추구의 대상이 되어갔으며 나아가 이 계급에 대하여 모종의 보편적 의미를 지니게 되어간다.
기술적인 요인을 배제한다면 이는 바로 왜 산수화가 장원경제가 발달하였던 육조시대에 성숙하지 못하고 오히려 도시생활이 상당히 발달된 송대에 와서 성숙하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가 된다. 이것은 바로 유럽풍경화가 중세기에 성숙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본주의 단계에서 성숙하게 되었던 점과 비슷하다. 중국산수화는 문벌귀족들의 예술이 아니라 세속지주들의 예술이었다. 이 계급은 문벌지주와 하층인민처럼 그렇게 등급이 삼엄하게 구분되거나 단절이 엄격하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宋, 元의 산수화가 표현하였던 제재, 주제, 사상, 감정은 육조 시대에서 당대에 이르기까지의 인물화에 비하여 훨씬 더 깊이 있는 평민성과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자 세속지주계급이 수탈자가 되어 자연과 맺은 것은 결국 일종의 자적, 휴식, 소극적 정관의 관계였을 뿐이었다. 그들은 기껏해야 겨우 농촌 생활의 점유자와 감상자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와 같은 사회계급의 특질 역시 매우 뚜렷한 중국 산수화 가운데 투영되어있다. 인간과 자연의 이와 같은 기쁨, 친화, 목가적인 평온과 정적은 중국 산수화의 본질적인 흐름을 이루게 되었다. 설사 장작을 짊어지고 가는 나무꾼이나 강호에 배를 띄우고 물고기를 잡는 어부로 점철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결코 노동에 대한 찬가는 아니었다. 그것은 역시 인간세계의 여러 가지 수탈과 그에 따른 고통을 이면에 간직하고 있는 마음 내키지 않는 느릿느릿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봉건농촌의 모습을 이상화한 그림인 것이다.
나루터는 오직 쓸쓸한 분위기만 자아내고 있다.
이곳을 찾는 사람을 기어코 서글프게 만들고야 만다.
들녘의 다리는 고요하고 적막한데,
아득히 대나무 우거진 언덕과 인가가 보인다.
古寺에는 쓸쓸한 기운이 감돌고 있고,
소나무 숲 사이로 불탑이 비치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정경은 쓸쓸하고 적막하기는 하지만 퇴폐적인 것은 아니며, 평온하고 고요하기는 하지만 죽음의 기운이 감도는 정적은 아니다. 사공이 없는 것이 아니다. 행인이 없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비로소 <산중에 은거하는 삶의 경지는 풍요로움으로 가득찬 것>이며 비로소 세속지주 사대부의 생활, 이상, 심미관에 부합하는 것이다. 이렇게 발달한 산수화의 사상적 조건을 형성하였던 것은 선종이었다. 현실생활과 서로 부응하는 철학사조가 이와 같은 심미취향을 형성하게 한 주관적 요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종은 중당, 만당시대로부터 북송 시대에 이르는 동안 갈수록 유행하게 되었고 종파 또한 많아졌고 쟁점이 정교해지게 되었으며 다름 불교종파들과의 경쟁에서 압승을 거두게 되었다. 선종의 교의는 중국전통사상의 하나인 노장철학의 자연에 대한 태도와 비슷한 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일종의 준범신론적인 친근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고, 자신과 자연이 일체가 되도록 합칠 것을 요구하였고 자연으로부터 영감이나 깨달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인간사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심령의 해방을 획득할 것을 희망하였다. 영원히 존재하는 자연, 산수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마는 인간세계의 부귀영화보다 뛰어나고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인위적인 조작보다 뛰어나고 구원, 천석이 원락생가보다 유구하다. 선종에서 시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었음은 그 당시 이미 유행을 이루고 있었을 정도였다. 선을 통하여 그림을 설명하는 것은 결코 명대 말엽의 유명한 화가 동기창의 <화선실>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이미 일찍부터 내면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고 중국 산수화를 발전, 성숙하게 한 사상적 조건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참고문헌
박선규 저(1998) - 산수화와 그 정신, 신원, 서울
박선규(1998) - 산수화와 그 정신, 신원
유홍준(1989) - 산수화 4대가전, 소정 변관식론, 호암미술관
양태석 저(2001) - 한국산수화 이론과 실제, 백산출판사
이성도외 - 미술교육과 문화
홍용선 저(1978) - 소정 변관식, 열음미술신서,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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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9.30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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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05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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