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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파블로 피카소]파블로 피카소의 생애, 파블로 피카소의 창조성,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파블로 피카소의 인간 파괴를 고발한 예술가의 양심, 파블로 피카소와 입체주의, 파블로 피카소와 초현실주의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파블로 피카소의 생애

Ⅲ. 파블로 피카소의 창조성

Ⅳ.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1. 청색시대(Blue Period. 1901~1904)
1) 인생 - 1903년
2) 다림질을 하는 여인 – 1904
2. 장미빛시대(Rose Period)(1905~1906)
3. 입체주의 미술(1907~1914)

Ⅴ. 파블로 피카소의 인간 파괴를 고발한 예술가의 양심

Ⅵ. 파블로 피카소와 입체주의

Ⅶ. 파블로 피카소와 초현실주의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주는 많은 형상들 ― 창문가의 여인들, 사다리 위의 그리스도 같은 인물, 꽃과 촛불을 든 소녀, 젖가슴을 드러낸 채로 죽어 있는 여인을 싣고 가면서 울부짓는 말, 마구잡이로 길을 더듬어 나가고 있는 미노타우로스 ― 이 나타나 있다. 피카소의 도상법에서 미노타우로스가 차지하는 위치는 분명치 않다. 그것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힘의 상징 혹은 스페인의 상징일 수도 있고 로는 그것이 피카소 자신의 역할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게르니카>에선 말할 것도 없고 이처럼 재현적인 작품에서조차 특수한 문학적 상징성을 찾아볼 수가 없다. 피카소는 공포나 연민의 감정을 보편화된 감각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이지 그러한 정서들을 문학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공화파의 진영에 서서 활동했다. 1937년 1월 그는 <프랑코의 환상과 기만>이라는 시에 나오는 수많은 일화로 구성된 에칭을 제작했다. 프랑코는 대형 회중시계의 머리를 가진 괴물로, 그리고 황소는 재기하는 스페인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다. 1937년 5월과 6월에 피카소는 파리 만국박람회 스페인 관에 전시하기 위해 대작 <게르니카>를 그렸다. 그것은 공포와 파괴를 담은 장면으로 검은색, 흰색, 회색으로 된 거대한 그림이다. 이러한 장면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친 경험 전부를 동원하였다. 비록 그가 1920년대 자신의 초현실주의적 왜곡으로부터 끌어낸 울부짖는 말이나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물 같은 소재들을 사용하긴 했지만, 구조는 큐비즘적인 격자패턴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작품은 이미 제작된 그 어떤 작품보다도 강력하게 표현주의를 큐비즘 에 적용시킨 것이다. 아마 <게르니카>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수백 점의 스케치와 드로잉들이 그려졌을 것이다. 이 작품이 피카소 자신에게 준 영향은 그 후 몇 십 년 동안 수많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잠시 동안 의 평온한 시기에서조차도 피카소의 많은 작품에는 깊은 혼란이 드러나 있다. 비록 그는 독일의 프랑스 점령 기간 동안 별로 시달림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그림과 조각들은 자신의 비통함을 드러내고 있다. 해골이라는 테마가 빈번하게 등장하고 색채는 어둡고 불협화음적이며 왜곡은 극단적이고 강박적이 된다. 단지 자신의 가족을 그린 그림들에서만 그의 유머와 감상이 이따금씩 되살아나고 있을 뿐이다. 파리의 해방은 그에게 구김살 없는 쾌활한 그림들을 그리게 했다. 예를 들어 《생의 환희》는 마티스가 1905년부터 1906년까지 그린 작품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또한 피카소는 평면적인 색면과 곡선적인 윤곽의 작품을 구상하기도 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산들바람에 풍성한 머리와 풍만한 젖가슴을 흔들거리면서 경쾌하게 발끝으로 춤을 추는 님프 주위에서 심각한 표정의 켄타우루스들이 피리를 불고 있으며 장난스러운 염소들이 뛰놀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피카소가 그처럼 열성을 쏟았던 목가적 그림의 전통에 대한 탁월한 풍자이다. 종전 이후의 작품들을 통해 피카소는 회화, 조각, 세라믹, 판화 등에서 자신의 놀라운 에너지가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다. 옛 거장들의 작품을 개작한 작품들은 그 자신에 대한 반성의 분위기와 그와의 관계를 잘 나타내 준다. 피카소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푸생, 루카스 크라나크, 벨라스케스, 들라크르와 ― 모두 색채, 구성, 착상 등에서 뛰어난 작가들 ― 의 작품들을 자유롭게 변형시킨 작품들을 많이 제작했다. 이 경탄할 만한 스페인 거장은 마지막으로 에너지를 극적으로 분출하여 거리낌 없이 에로틱한 표현주의로 치달았다. 그 표현주의는 결코 힘의 약화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1980년대의 신표현주의를 예고하듯 정신과 형식 모두가 앞으로 도약하는 것이었다.
Ⅷ. 결론
20세기 미술의 최고의 혁명이자 피카소를 세계적인 화가의 위치에 올려놓게 되는 ‘큐비즘’의 출발점은 1907년 완성한 ‘아비뇽의 처녀들’이었다. ‘아비뇽의 처녀들’이 처음 공개된 날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이 후 피카소는 극심한 빈곤에서 벗어나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28세에는 사물의 외면적인 모방을 하던 종래의 화법을 온전히 파괴하고 기하학적 도형으로 해체하는 분석적 큐비즘을, 31세에는 소박한 주제와 일상적인 재료들로 제작된 콜라주를 선보였다. 피카소는 사회적 사건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스페인 내전 중에 1937년 게르니카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회화는 장식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전쟁의 도구이다.”라고 외치며 파시즘에 의연히 맞선 혁명의 상징인 ‘게르니카’를 그렸다. 이후 피카소는 공산당에 입당하여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는데, 1949년 공산당이 의뢰한 평화운동 포스터에서 그가 그린 한 마리 비둘기는 전 세계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1950년과 1962년 두 차례에 걸쳐 레닌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대가들의 작품을 재해석하는 작업을 꾸준히 펼쳤다. 이는 고전적 규율과 겨루는 동시에 그것을 더 잘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려는 노화가의 끊임없는 전통과의 대화였다. 이상 피카소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큰 부침이 없이 지속적인 상향선을 그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삶에서 가장 우울한 시기였던 청색 시대에서도 피카소는 작품 활동을 계속하였고 오히려 이 시기에 그린 그림이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하였다. 또한 많은 여인들과의 만남을 그림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켜 나갔고 활발한 사회적 활동 역시 그의 작품 세계를 확정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결국 피카소의 삶에서 모든 경험과 만남은 자신의 소질과 능력을 발휘하여 자신의 작품세계 속에서 통합되며 인적자원개발의 궤적으로 보면 이상적인 상태인 직선과 근접하여 지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김춘일(1984), 미술교육론, 홍성사
박영배, 피카소의 작품을 통해 본 그의 창작심리
서문당(1982), 브라크
존버거 저(1984), 피카소의 성공과 실패, 미진사
청천 문화예술문고, 피카소의 예술세계
S. 알렉산드리안, 이대일 역(1992), 초현실주의 미술, 열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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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02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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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054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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