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본 자료는 1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해당 자료는 1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1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아카풀코에서 본 아시아-


일본 여인의 이미지가 물씬한 마리아 상을 본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하얀 아이보리로 조각한 마리아 상은 일본 여인의 얼굴을 닮기도 하고, 부처의 후덕한 얼굴 모습을 닮기도 했다. 적어도 우리 눈에 익숙한 유럽 여인풍의 마리아 상은 아니었다.


멕시코시티의 동북쪽으로 한 시간 정도 가면 찾을 수 있는 테포스틀란의 국립 부왕령 박물관에서였다. 식민시대 300년 동안의 역사유물을 잘 보여주는 예수회 수도원 건물에서 우연히 아시아와 조우하면서 나는 흥분했다. 예수상도 예사롭지 않았다. 유럽인 얼굴보다는 흑발과 검은 수염의 아시아인 모습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아하! 당시 마닐라가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 부왕령의 관할하에 있었으니, 아마 일본 교구도 여기에서 통제했겠지. 멕시코 최초의 성인도 일본에서 순교했다고 했지. 하얀 상아로 만들어진 마리아 상이나 예수상은 아마도 가톨릭 금압령의 발단이 되었던 시마바라 반란(1637)이 일어나기 전에 나가사키에서 마닐라로, 마닐라에서 아카풀코로, 아카풀코에서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던 것이었으리라.




하긴 멕시코시티의 메트로폴리탄 성당에도 아시아 관련 기록과 제품들이 많다고 했다. 성가대 그릴은 마카오산으로 1730년에 구비한 것이라고 했고, 성가곡집을 받치는 받침대는 마닐라의 대주교가 이곳 성당에 기증한 가구제품이라고 했다.


예수회 수도원의 채플 한 곳에 들어가니 이번에는 채색 타일이 바닥에 깔려 있고,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유리판을 덮어 놓았다. 이 비싼 타일을 이 수도원 채플에 깔아놓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주체 못할 예수회의 재부를 과시하기 위해서였을까? 아랍과 중국 자기의 영향이 느껴지는 이 채색 타일은 당시 하늘을 찔렀던 예수회의 위상과 재부를 가늠케 해준다.

본문내용

에서 내려져 일부는 페루의 리마 부왕령으로 실려 갔을 터이다. 나머지는 길고 긴 여로의 노새 무리에 실려 멕시코시티로 갔고, 그 가운데 일부는 베라크루스를 통해 스페인 본국을 향하는 길고 긴 항해를 했을 것이리라(길고 긴 항해는 스페인이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루트를 장악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함대를 뚫지 못해서 그랬다).
페루와 멕시코에서 생산된 은괴가 수입품들의 대전으로 치러졌을 것이고, 그 은괴는 마닐라와의 복건성 출신 무역상들의 손을 거쳐서 명대의 중국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항상 부족했던 제국의 재정은 은괴의 유입으로 숨통이 트였을 것이고, 결국 명대의 상거래 결제 제도까지 바꾸지 않았던가?
일조편법으로 통일된 명대의 세금 징수는 물론 시중의 거래조차 모두 은 중심으로 굳어졌다. 물론 일본에서도 유럽에서도 명나라를 향해서 대량의 은괴가 흘러갔다. 오호라, 16-17세기에 이미 아시아에도 세계체제라고 불릴 수 있는 무역 시스템이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었구나. 정교한 분업체계가 존재했고 세계화폐인 은이 아시아로 물밀 듯이 쏟아졌는데, 왜 해밀턴은 아니 우리들은 중국의 상업혁명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아카풀코는 마닐라와, 마닐라는 경덕진과 양자강 하구의 도시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다. 인도양과 동남아의 각 지역의 진귀한 물건들도 마닐라로 흘러들었고, 일부는 태평양을 건넜다.
명대에 축성된 만리장성은 결국 아메리카, 일본, 유럽 등지에서 빨아들인 은괴들이 숨을 거둔 무덤이었으리라. 아메리카 은괴는 대서양 너머로 흘러들어갔지만, 일부는 태평양 너머로도 흘러들어 아시아도 경제적 지형을 크게 바꾸었다.
  • 가격1,000
  • 페이지수5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968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