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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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통문화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띠고 있다. 따라서 자세한 고증 뒤에 원구단의 제천의례를 성대하고 규모있게 회복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그뒤 사림파의 정계진출과 함께 제천의례는 급격히 쇠퇴하여 실질적으로 소멸했다.
국가의례로서 제천의례가 다시 실시된 것은 1897년(고종 34)으로 자주적인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광무개혁을 실시하면서 대한제국이 수립되었다. 그후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고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는 상징적 의례로서 제천의례를 실시했다. 이때 제천의식을 행하기 위해 원구단을 서울 소공동 남별궁터에 쌓았는데, 1913년 총독부가 황궁우(皇穹宇)만 남겨두고 원구단을 헐어낸 뒤 철도 호텔(지금의 조선 호텔)을 지음으로써 제천의례가 중단되었다. 국가의례로서의 제천의식은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변화했으나, 민간에서는 계속 그 뿌리를 간직해왔다. 그러므로 조선 후기 일제에 의해 나라를 빼앗기자 이를 되찾기 위한 종교적 염원으로서 환인·환웅·단군 등의 3신을 모시고 제천의식을 행하는 대종교(大倧敎)가 조직되었다. 또한 우리 민족의 원초적인 신앙인 무속(巫俗)에서도 천신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무당들이 섬기는 신들을 보면, 천신·천왕신(天王神)·천신대감신(天神大監神)·제석신(帝釋神) 등은 천신계통의 신으로서 무신(巫神) 가운데 최고신이었다. 현재에는 10월 3일을 개천절이라 하여 국경일로 정하고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과 강원도 태백산의 천제단 등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 국가의 태평과 국민의 안정, 민족의 무궁함을 기원하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
참고문헌 (제천의식)
한국사강좌 1 - 고대편 : 이기백·이기동 공저, 일조각, 1983
한국고대의 제천의례 〈국사관논총〉 13 : 최광식, 국사편찬위원회, 1990
제천의예의 역사적 고찰 〈대동문화연구〉 25 : 금장태, 성균관대학교, 1990
한국고대의 종교전문가 〈광장〉 10 : 서영대, 1988
다산 예학에서의 제천의례 문제 - 춘추고징을 중심으로 〈한국학〉 35 : 금장태, 중앙대학교 영신아카데미 한국학연구소, 1986
제천의식과 무:그 역사적 변천과 사회구조적 의미 〈제1회한국학국제학술회의 논문집〉 : 장윤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0
위지동이전에 나타난 제천양식과 가무 〈대동문화연구〉 13 : 양재연,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9
주문공가례 (朱文公家禮)
 
중국 송나라 때 성리학자 주희(朱熹:1130~1200)가 일상생활의 예절에 관해 모아 기록한 책.
4권. 〈사고제요 四庫提要〉에는 〈가례〉라는 제목으로 5권과 부록 1권이 실려 있다. 이책은 주희의 장례식 때 참석한 조객에 의해 제시되었고, 내용이 주희의 말년에 제시했던 예설과 다른 점이 많았기 때문에 위작이라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주문공문집〉에 〈가례서〉가 있고, 〈가례부록〉에 이 책을 다시 얻게 된 경위를 밝히고 있음을 근거로 주희가 지은 책으로 보고 있다. 〈문집〉이나 〈어류 語類〉에 나타나는 내용으로 보아, 주희는 아버지의 상(喪)을 당한 후인 17, 18세부터 예에 관한 여러 자료들을 수집·정리하여 40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한 후 일부를 찬술했는데, 이는 개인적으로 초년의 부친상과 중년의 모친상을 겪으면서 인정(人情)에 맞고 실제로 행하기 쉬운 예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그후에도 계속 수정하다가 만년에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10권으로 된 〈찬도집주문공가례 纂圖集注文公家禮〉, 7권으로 된 〈문공가례 文公家禮〉, 8권 또는 4권으로 된 〈주문공가례의절 朱文公家禮儀節〉, 〈가례〉 4·5·7권본 등의 판본이 전한다.
이와 같이 판본에 따라 차이점이 있으나 편차에는 큰 차이가 없다. 〈성리대전서 性理大全書〉에 실린 〈가례〉를 기준으로 편차목록을 살펴보면, 권1 가례도설 (家禮圖說), 권2 가례서 (家禮序)·통례 (通禮)·관례 (冠禮)·혼례 (昏禮), 권3 상례 (喪禮), 권4 상례· 제례 (祭禮)로 되어 있다. 권1의 〈가례도설〉은 주로 가묘(家廟)·사당(祠堂)·관리(冠履) 등에 관한 도설이 실려 있다. 권2 가운데 〈통례〉는 사당·심의제도(深衣制度)·사마씨거가잡의(司馬氏居家雜儀)로서 사마광(司馬光)이 〈서의 書儀〉에서 다루었던 것과는 다르며, 〈관례〉는 관(冠)·계()의 2조목으로, 〈혼례〉는 의혼(議昏)·납채(納采)·납폐(納幣)·친영(親迎)·부견구고(婦見舅姑)·묘견(廟見)·서견부지부모(壻見婦之父母)로 이루어져 있는데, 제목에서 보듯이 혼례의 시간적인 경과에 따라 거기에 맞는 예법을 서술한 것이다. 권3·4의 〈상례〉는 초종(初終) 부터 성분(成墳)까지의 예로서 우제(虞祭) 및 거상잡의(居喪雜儀) 등에 필요한 모든 예법을 설명했다. 권4의 〈제례〉는 사시제(四時祭)·초조(初祖)·선조(先祖)·예()·기일(忌日)·묘제(墓祭)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사마광의 〈서의〉에 비해 전통적인 의례의 비중이 적고 속례(俗禮)와 주희의 독자적인 형식을 덧붙였으나, 편차나 협주에 인용되는 '사마온공왈'(司馬溫公曰)에서 보듯이 사마광의 설을 이어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도 고려 말기 성리학의 수입과 함께 전래되어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17세기 이후 예학의 흥기와 함께 사대부들의 의례로 정착되었으며, 여러 유학자들에 의해 주석서가 저술되기도 했다. 인종 때 김인후(金麟厚)의 〈가례고오 家禮攷誤〉, 명종 때 이언적(李彦迪)의 〈봉선잡의 奉先雜儀〉, 이황(李滉)의 〈퇴계상제례문답 退溪喪祭禮問答〉 등이 있으며, 이후에도 조선 말기까지 많은 예학서들이 발간되었다.
참고문헌(주문공가례)
한국중세예사상연구 : 이범직, 일조각, 1991
조선중기의 예설과 예서 : 고영진,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15, 6세기 주자가례의 시행과 그 의의 〈한국사론〉 21 : 고영진, 국사편찬위원회, 1989
성리학시대의 예사상 〈한국사상대계 4〉 : 윤사순,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4
조선초기 주자가례의 이해과정 〈한국사론〉 8 : 지두환, 국사편찬위원회, 1982
주자가례의 형성과정 〈인문과학〉 45 : 황원구, 연세대학교, 1981
이조예학의 형성과정 〈동방학지〉 6 : 황원구,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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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10.0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07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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