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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졌음이 확인된다. 1539년 판은 1541년에, 1543년 판은 1545년, 1550년 판은 1551년에 그리고 1559년 판은 1650년에 프랑스어로 각각 번역되었다. 다만 문장의 수려함과 정교한 문맥에 있어서는 프랑스어 판이 다소 라틴어 판에 비해서 떨어진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단지 칼빈의 네 번째 수정판인 1550년 판을 프랑스어로 낼 때만, 육신의 부활에 관한 세 장을 추가하였다.
5) 1559년 최종판
최종판이자 다섯 번째 개정본을 위해서 칼빈은 1559년 8월 1일 서문을 작성했고, 그해에 책이 나왔다. 그가 독자들에게 밝힌 바와 같이 1558년부터 1559년으로 넘어오는 겨울에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의 열병을 견디면서도 이 책의 개정작업에 힘을 기울여 경건한 사람들의 요청에 보답하였다.
최종판의 구성은 그 이전과는 차이가 날 만큼 매우 달라졌다. 처음으로 4권 체제로 구분되었고 총 80장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든 장마다 분명한 주제를 명시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에서도 마치 새로운 책처럼 느껴질 만큼 충분하게 내용을 보강하였다. 다른 여러 학자들과의 교리 논쟁에서 나온 내용들이 첨가되었다. 특히 루터와 요아킴 베스트팔과의 성만찬 논쟁, 안드레아 오시안더와의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사역, 칭의론 그리고 렐리오 소시니(Lelio Sozzini)와 그리스도의 공로 및 죽은 자의 육체적 부활 등에 대한 논쟁이 첨가되었다.
4. 칼빈의 죽음(1564년)
칼빈은 마지막까지 ‘거룩한 열정’으로 칼빈은 제네바에서 살고 있는 시민들만이 아니라, 우럽 전역에 널리 알려져서 가장 존경받는 학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고, 점점 권위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지만, 그의 직책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쌩 삐에러 교회의 ‘한 사람의 목사이자 신학 교수’였다.
그는 아파서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2주마다 한 주간 동안은 매일 설교하고 한 주간에 세 번의 신학을 강의하였다. 몸이 불편하여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을 때에는 의자에 앉아서 설교하고 가르쳤다. 정해진 날 당회 모임에 참석하고, 충고할 일들에 대해서 주장을 펴고, 매주 금요일에 모이는 평신도 성경 강좌에서 강의했다. 병자를 방문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평상시의 목회 활동을 하면서 특별하게 요청받은 것과 이루다 셀 수 없는 일들을 감당하였다.
계속되는 지병의 악화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자, 자신의 날이 멀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담담히 떠날 준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1564년 2월 2일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그로부터 나흘 후에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3월 27일에는 시청에 나가서 소의회원들과 만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교회에 나간 것은 4월 20일 부활주일이었다. 베자로부터 성찬을 받고 즐거운 표정으로 찬송을 하였다. 그 후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때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4월 28일, 제네바의 목사들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자신의 투쟁 목표와 과오들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칼빈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지나치게 예민하고 날카로운 자의식이 문제였다. 특별히 성급하고 격렬한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을 절제하지 못했을 때, 상대방에게 예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항상 신경이 예민하고 건강이 쇠약했으므로 이런 감정의 토로는 자신에게도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고 말한다. 종종 칼빈의 비판은 신랄하고 격렬하여 사랑이 없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가혹할 만큼 철저한 그의 논쟁은 상대방에게는 모욕적으로 들렸다. 칼빈은 독단에 빠져 있기도 했고, 이를 절제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자기가 결정적이라고 확신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잔인할 정도로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5월 19일은 제네바 목사들이 함께 모여서 상호간에 문제점을 지적하고 교정을 나누는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모두 칼빈의 집에 모여서 간단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 이것이 칼빈의 마지막 공적인 활동이었다.
1564년 5월 27일 저녁 8시와 9시 사이에 그는 평화롭게 잠들었다. 칼빈이 노년기에 거의 아들처럼 생각했던 베자는 “그날 해질 무렵, 하나님의 교회를 지도하기 위해서 세상에 있었던 가장 밝은 빛이 하늘로 돌아갔다”고 기록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서 다음 날 오후 2시, 거창한 장례식도 없이, 비석을 세우거나 화려한 치장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시민들 전부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 참 고 문 헌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김재성 재음,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1)
『신앙위인전기 시리즈 12 - 존 칼빈』오병학 저, (서울: 규장문화사, 1993)
『칼빈의 생애와 신학사상』전경연 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
『16세기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유산』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편,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존 칼빈전』구로사끼고 기찌 저, 계훈창 옮김, (서울: 칠백사, 1976)
『칼빈관련자료집 5 “칼빈의 생애와 사업”』안용준 저, (신학지남, 1962)
『칼빈관련자료집 5 “인간 장 칼뱅”』이수영 저, (교육교회, 1984)
『칼빈관련자료집 9 “칼빈과 제네바의 종교개혁”』김기홍 저, (빛과 소금, 1991)
『칼빈관련자료집 9 “칼빈과 종교개혁”』정성구 저, (목회와 신학, 1991,10)
『칼빈관련자료집 9 “칼빈의 제네바 교회 개혁 활동”』이은선 저 (한국개혁신학논문집, 1997)
『칼빈이야기』엘지 엠 존슨 저, 박일민 역 (성광문화사)
『죤 칼빈의 생애와 업적』T.H.L. 파커 저, 김지찬 역 (생명의 말씀사)
『간략히 살펴본 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디모디 토우 저, 임성호 역 (도서출판 하나)
『칼빈의 생애와 사상』정성수 저 (세종문화사)
『칼빈의 선교사상』최정만 저 (기독교문서선교회)
『칼빈,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장 카디에 저, 이오갑 역 (대한기독교서회)
『하나님의 사람 칼빈』엠마누엘 스티켈베르거 저, 이양호, 박종숙, 이은재 공역(도서출판 나단)
『개혁신학의 광맥』김재성 저(도서출판 이레서원)
5) 1559년 최종판
최종판이자 다섯 번째 개정본을 위해서 칼빈은 1559년 8월 1일 서문을 작성했고, 그해에 책이 나왔다. 그가 독자들에게 밝힌 바와 같이 1558년부터 1559년으로 넘어오는 겨울에 거의 죽음에 이를 정도의 열병을 견디면서도 이 책의 개정작업에 힘을 기울여 경건한 사람들의 요청에 보답하였다.
최종판의 구성은 그 이전과는 차이가 날 만큼 매우 달라졌다. 처음으로 4권 체제로 구분되었고 총 80장에 이르게 되었는데, 모든 장마다 분명한 주제를 명시하였다. 그리고 그 내용에서도 마치 새로운 책처럼 느껴질 만큼 충분하게 내용을 보강하였다. 다른 여러 학자들과의 교리 논쟁에서 나온 내용들이 첨가되었다. 특히 루터와 요아킴 베스트팔과의 성만찬 논쟁, 안드레아 오시안더와의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의 사역, 칭의론 그리고 렐리오 소시니(Lelio Sozzini)와 그리스도의 공로 및 죽은 자의 육체적 부활 등에 대한 논쟁이 첨가되었다.
4. 칼빈의 죽음(1564년)
칼빈은 마지막까지 ‘거룩한 열정’으로 칼빈은 제네바에서 살고 있는 시민들만이 아니라, 우럽 전역에 널리 알려져서 가장 존경받는 학자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고, 점점 권위 있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지만, 그의 직책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는 쌩 삐에러 교회의 ‘한 사람의 목사이자 신학 교수’였다.
그는 아파서 움직일 수 없을 때까지, 2주마다 한 주간 동안은 매일 설교하고 한 주간에 세 번의 신학을 강의하였다. 몸이 불편하여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을 때에는 의자에 앉아서 설교하고 가르쳤다. 정해진 날 당회 모임에 참석하고, 충고할 일들에 대해서 주장을 펴고, 매주 금요일에 모이는 평신도 성경 강좌에서 강의했다. 병자를 방문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고, 평상시의 목회 활동을 하면서 특별하게 요청받은 것과 이루다 셀 수 없는 일들을 감당하였다.
계속되는 지병의 악화로 인해서 고통을 당하자, 자신의 날이 멀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 후로는 담담히 떠날 준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1564년 2월 2일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마지막 강의를 하고, 그로부터 나흘 후에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3월 27일에는 시청에 나가서 소의회원들과 만났다. 그가 마지막으로 교회에 나간 것은 4월 20일 부활주일이었다. 베자로부터 성찬을 받고 즐거운 표정으로 찬송을 하였다. 그 후로 여러 계층의 사람들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때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과하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4월 28일, 제네바의 목사들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자신의 투쟁 목표와 과오들을 자세히 설명하였다.
자신의 결점에 대해서 칼빈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지나치게 예민하고 날카로운 자의식이 문제였다. 특별히 성급하고 격렬한 기질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을 절제하지 못했을 때, 상대방에게 예리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항상 신경이 예민하고 건강이 쇠약했으므로 이런 감정의 토로는 자신에게도 심각한 손상을 입혔다고 말한다. 종종 칼빈의 비판은 신랄하고 격렬하여 사랑이 없다고 느끼게 만들었다. 가혹할 만큼 철저한 그의 논쟁은 상대방에게는 모욕적으로 들렸다. 칼빈은 독단에 빠져 있기도 했고, 이를 절제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자기가 결정적이라고 확신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잔인할 정도로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5월 19일은 제네바 목사들이 함께 모여서 상호간에 문제점을 지적하고 교정을 나누는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모두 칼빈의 집에 모여서 간단하게 의견을 교환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었다. 이것이 칼빈의 마지막 공적인 활동이었다.
1564년 5월 27일 저녁 8시와 9시 사이에 그는 평화롭게 잠들었다. 칼빈이 노년기에 거의 아들처럼 생각했던 베자는 “그날 해질 무렵, 하나님의 교회를 지도하기 위해서 세상에 있었던 가장 밝은 빛이 하늘로 돌아갔다”고 기록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서 다음 날 오후 2시, 거창한 장례식도 없이, 비석을 세우거나 화려한 치장이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시민들 전부가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 참 고 문 헌
『칼빈의 삶과 종교개혁 - 나의 심장을 드리나이다』김재성 재음, (도서출판 이레서원, 2001)
『신앙위인전기 시리즈 12 - 존 칼빈』오병학 저, (서울: 규장문화사, 1993)
『칼빈의 생애와 신학사상』전경연 저,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82)
『16세기 종교개혁과 개혁교회의 유산』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교육부 편,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2003)
『존 칼빈전』구로사끼고 기찌 저, 계훈창 옮김, (서울: 칠백사, 1976)
『칼빈관련자료집 5 “칼빈의 생애와 사업”』안용준 저, (신학지남, 1962)
『칼빈관련자료집 5 “인간 장 칼뱅”』이수영 저, (교육교회, 1984)
『칼빈관련자료집 9 “칼빈과 제네바의 종교개혁”』김기홍 저, (빛과 소금, 1991)
『칼빈관련자료집 9 “칼빈과 종교개혁”』정성구 저, (목회와 신학, 1991,10)
『칼빈관련자료집 9 “칼빈의 제네바 교회 개혁 활동”』이은선 저 (한국개혁신학논문집, 1997)
『칼빈이야기』엘지 엠 존슨 저, 박일민 역 (성광문화사)
『죤 칼빈의 생애와 업적』T.H.L. 파커 저, 김지찬 역 (생명의 말씀사)
『간략히 살펴본 존 칼빈의 생애와 업적』디모디 토우 저, 임성호 역 (도서출판 하나)
『칼빈의 생애와 사상』정성수 저 (세종문화사)
『칼빈의 선교사상』최정만 저 (기독교문서선교회)
『칼빈, 하나님이 길들인 사람』장 카디에 저, 이오갑 역 (대한기독교서회)
『하나님의 사람 칼빈』엠마누엘 스티켈베르거 저, 이양호, 박종숙, 이은재 공역(도서출판 나단)
『개혁신학의 광맥』김재성 저(도서출판 이레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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