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17C(17세기)의 북벌론
1. 북벌론의 대두
2. 북벌계획의 시말
3. 군사훈련·군비확충
4. 북벌론의 사상적 배경
Ⅱ. 17C(17세기)의 정국
Ⅲ. 17C(17세기)의 청교도혁명
1. 원인
2. 과정
3. 결과
Ⅳ. 17C(17세기)의 데카르트
1. 데카르트의 생애
2. 데카르트의 철학
3. 감정미학에서의 데카르트
Ⅴ. 17C(17세기)의 기후
Ⅵ. 17C(17세기)의 프랑스문학
Ⅶ. 17C(17세기)의 호패제
참고문헌
1. 북벌론의 대두
2. 북벌계획의 시말
3. 군사훈련·군비확충
4. 북벌론의 사상적 배경
Ⅱ. 17C(17세기)의 정국
Ⅲ. 17C(17세기)의 청교도혁명
1. 원인
2. 과정
3. 결과
Ⅳ. 17C(17세기)의 데카르트
1. 데카르트의 생애
2. 데카르트의 철학
3. 감정미학에서의 데카르트
Ⅴ. 17C(17세기)의 기후
Ⅵ. 17C(17세기)의 프랑스문학
Ⅶ. 17C(17세기)의 호패제
참고문헌
본문내용
Ⅵ. 17C(17세기)의 프랑스문학
이 시기는 고전주의 개화기이다.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16세기가 끝나자 규율만이 평화질서휴식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게 되었고, 문학에서도 이성적인 절도와 균형의 형식적 조화를 꾀하였다. 실제로 고전주의 문학이 확립된 시기는 17세기 중반 루이 14세의 집정시대이며, 따라서 전반 60년은 고전주의 형성기로, 후반은 18세기로의 전환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르네상스 이후 관용으로 통하지 않는 수많은 낱말과 표현의 혼란이 생긴 프랑스어를 순화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에서는 F.말레르브, 산문에서는 H.발자크 등에서 나타났으며 이러한 언어개혁은 고전파 걸작들의 탄생 계기가 되었다. 또한 1634년 A.J.리슐리외가 창설한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는 프랑스어 사서의 편찬을 통해 어휘와 문장구성법을 정화하였으며, 살롱중심의 사교계에서는 프랑스어를 명료하고 우아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M.랑부예부인이 살롱을 열면서 그곳은 조전주의의 온상이 되어 프레시오제테(세련된 재치)가 유행하였으며, 방대한 연애모험소설이나 발자크의 소설, V.부아튀르의 서한문학 등 사교 중심의 살롱문학이 탄생하였다. 한편 이 같은 귀족문학의 반동으로서 사실주의 문학의 길을 제시한 에스파냐 피키레스크소설의 영향을 받은 뷔를레스크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고전주의 형성기를 마무리 지은 것은 R.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P.코르네유의 비극이었다. <방법서설(1637)>의 저자 데카르트는 이성을 진리의 최고 심판자로 간주하였으며 이것은 프랑스 고전주의의 근본원리가 되었다. 1600~30년 가장 인기 있던 장르는 연극이었으며 고전비극은 코르네유에 의하여 확립되고 J.라신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한장소에서ㅡ 하루 동안에, 당 하나의 사건이 완결되도록>이라고 하는 3일치 법칙의 적용으로 실감나는 무대를 구성했던 코르네유는 운명과 싸워 이기는 의지의 비극을 창조하였고, <르 시드(1636)>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코르네유의 의지의 영웅 대신, 운명에 짓눌리고 정열에 사로잡히는 인간을 그려내어 고전비극의 전형을 확립시킨 라신은 <앙드로마크(1667)><페드르(1677)>등 9편의 걸작 비극을 남겼다. 프랑스 희극의 개념은 몰리에르에 의하여 정착되었고, 그는 <타르튀프(1664~69)>등 성격묘사에 뛰어난 여러 희극 작품들을 썼다. 반면 B.파스칼은 이성에 대한 불신과 강한 상상력을 옹호하여 고전주의 작가들과 구별되는데, 사후 <팡세(1970)>로 출간된 <그리스도교 변증론>은 인간 본질과 신앙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고찰로 사람들의 정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87~97년 <신구논쟁>이 일어나 문단을 고대파와 근대파로 양분시켰다.
Ⅶ. 17C(17세기)의 호패제
호패제는 조선 초기 이미 太宗朝에 3년간, 世祖朝에는 10여 년간 실시된 바 있다. 강력한 집권력을 바탕으로 실시하여 시행초기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점차 백성들의 避役과 도망, 호패의 僞造, 私賤으로의 投託 등 허다한 문제점을 야기한 채 호패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폐지되곤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 호패제는 실시되지 못하였다.
호패제 시행의 필요성은 壬亂 직후부터 다시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임란으로 인한 폐해로 국가경제는 파탄지경이 되고 양안과 호적마저 대부분 소실되었다. 또한 전란과 부역에 시달린 백성들은 遊離逃散하여 안정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를 방치할 경우 下三道는 人烟이 끊길 지경이었고, 이로 인하여 관리들의 제반 업무가 속수무책이 될 정도였다. 비변사에서는
王政 在於先知民數 目今役煩民散 勢將空虛
라 하여 백성들의 逃散으로 장차 나라가 텅 비게 되었다고 우려하며 시급한 민인파악을 건의하였다. 호패제 시행 논의는 宣祖代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와 함께 私賤革罷論과, 호적 정비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등 민인파악을 위한 여러 논의가 있어 왔다.
그러나 호패제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光海君이 즉위하면서 제기되었다. 女眞族의 來侵 우려가 고조되고, 이에 따른 軍丁數의 확보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軍丁數는 ‘八道 軍兵의 숫자가 모두 평시 한 道의 숫자만 못하다’고 개탄할 정도였다. 더욱이 광해군 즉위 초 민폐의 제거를 위하여 도망자와 죽은 자에게 행한 蕩滌 조치는 더욱 軍丁의 감축을 조장하였다. 또한 訓練都監의 군사마저 北方에 대한 경비로 파견하여 군사가 줄어드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오랑캐의 침략을 막을 계책이 없고 收布와 宿衛가 모두 어려운 지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倭亂이후 백성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옮겨 다니고 있어 백성의 정착과 향촌의 복구도 시급하였다. 이에 광해군 1년(1609) 4월 兵曹判書 李廷龜는
將修軍籍 必先行號牌法 然後 可以修軍籍矣
라며 軍籍의 정리를 위하여 반드시 호패법부터 실시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禮曺判書 朴弘 역시 ‘如欲籍兵 必作號牌’라며 호패작성이 군병 등록의 선결 조건임을 강조하였다.
조정에서 호패법 실시의 결정은 일단 별다른 異論이 없는 듯 보였다. 광해군은 同王 1년(1609) 10월 비변사에 호패제 시행을 위한 事目을 준비하도록 하였고, 이듬해 3월에는 재차 사목을 상세히 마련하여 시행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비변사는 京中은 광해군 2년(1610) 9월 그믐까지, 外方은 겨울 이전까지 號牌都目을 작성해 올리도록 한 후, 광해군 3년(1611) 정월부터 호패 패용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호패제 시행과 감독을 주관할 기관으로 號牌廳까지 설치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없었던 호패청의 신설은 그만큼 철저하고 효율적으로 시행하려는 의지로 보여 진다.
참고문헌
김문기(2007), 17세기 강남의 소빙기 기후, 명청사학회
김익진(2007), 17세기 프랑스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웃음의 양상과 그 의미, 한국프랑스학회
서동완(1988), 영국 청교도 혁명과 종교정책, 한신대학교
안승훈(2011), 데카르트에게서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 전남대학교
정만조(2011), 조선후기 정국동향과 갈암 이현일의 정치적 위상,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허태용(2010), 17·18세기 북벌론의 추이와 북학론의 대두,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이 시기는 고전주의 개화기이다. 개인주의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16세기가 끝나자 규율만이 평화질서휴식을 가져다 줄 것으로 믿게 되었고, 문학에서도 이성적인 절도와 균형의 형식적 조화를 꾀하였다. 실제로 고전주의 문학이 확립된 시기는 17세기 중반 루이 14세의 집정시대이며, 따라서 전반 60년은 고전주의 형성기로, 후반은 18세기로의 전환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르네상스 이후 관용으로 통하지 않는 수많은 낱말과 표현의 혼란이 생긴 프랑스어를 순화하기 위한 움직임이 시에서는 F.말레르브, 산문에서는 H.발자크 등에서 나타났으며 이러한 언어개혁은 고전파 걸작들의 탄생 계기가 되었다. 또한 1634년 A.J.리슐리외가 창설한 아카데미 프랑세즈에서는 프랑스어 사서의 편찬을 통해 어휘와 문장구성법을 정화하였으며, 살롱중심의 사교계에서는 프랑스어를 명료하고 우아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였다. M.랑부예부인이 살롱을 열면서 그곳은 조전주의의 온상이 되어 프레시오제테(세련된 재치)가 유행하였으며, 방대한 연애모험소설이나 발자크의 소설, V.부아튀르의 서한문학 등 사교 중심의 살롱문학이 탄생하였다. 한편 이 같은 귀족문학의 반동으로서 사실주의 문학의 길을 제시한 에스파냐 피키레스크소설의 영향을 받은 뷔를레스크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고전주의 형성기를 마무리 지은 것은 R.데카르트의 합리주의와 P.코르네유의 비극이었다. <방법서설(1637)>의 저자 데카르트는 이성을 진리의 최고 심판자로 간주하였으며 이것은 프랑스 고전주의의 근본원리가 되었다. 1600~30년 가장 인기 있던 장르는 연극이었으며 고전비극은 코르네유에 의하여 확립되고 J.라신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한장소에서ㅡ 하루 동안에, 당 하나의 사건이 완결되도록>이라고 하는 3일치 법칙의 적용으로 실감나는 무대를 구성했던 코르네유는 운명과 싸워 이기는 의지의 비극을 창조하였고, <르 시드(1636)>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코르네유의 의지의 영웅 대신, 운명에 짓눌리고 정열에 사로잡히는 인간을 그려내어 고전비극의 전형을 확립시킨 라신은 <앙드로마크(1667)><페드르(1677)>등 9편의 걸작 비극을 남겼다. 프랑스 희극의 개념은 몰리에르에 의하여 정착되었고, 그는 <타르튀프(1664~69)>등 성격묘사에 뛰어난 여러 희극 작품들을 썼다. 반면 B.파스칼은 이성에 대한 불신과 강한 상상력을 옹호하여 고전주의 작가들과 구별되는데, 사후 <팡세(1970)>로 출간된 <그리스도교 변증론>은 인간 본질과 신앙에 대한 심오한 철학적 고찰로 사람들의 정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87~97년 <신구논쟁>이 일어나 문단을 고대파와 근대파로 양분시켰다.
Ⅶ. 17C(17세기)의 호패제
호패제는 조선 초기 이미 太宗朝에 3년간, 世祖朝에는 10여 년간 실시된 바 있다. 강력한 집권력을 바탕으로 실시하여 시행초기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점차 백성들의 避役과 도망, 호패의 僞造, 私賤으로의 投託 등 허다한 문제점을 야기한 채 호패제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폐지되곤 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 호패제는 실시되지 못하였다.
호패제 시행의 필요성은 壬亂 직후부터 다시 활발하게 제기되었다. 임란으로 인한 폐해로 국가경제는 파탄지경이 되고 양안과 호적마저 대부분 소실되었다. 또한 전란과 부역에 시달린 백성들은 遊離逃散하여 안정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를 방치할 경우 下三道는 人烟이 끊길 지경이었고, 이로 인하여 관리들의 제반 업무가 속수무책이 될 정도였다. 비변사에서는
王政 在於先知民數 目今役煩民散 勢將空虛
라 하여 백성들의 逃散으로 장차 나라가 텅 비게 되었다고 우려하며 시급한 민인파악을 건의하였다. 호패제 시행 논의는 宣祖代에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와 함께 私賤革罷論과, 호적 정비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등 민인파악을 위한 여러 논의가 있어 왔다.
그러나 호패제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光海君이 즉위하면서 제기되었다. 女眞族의 來侵 우려가 고조되고, 이에 따른 軍丁數의 확보가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軍丁數는 ‘八道 軍兵의 숫자가 모두 평시 한 道의 숫자만 못하다’고 개탄할 정도였다. 더욱이 광해군 즉위 초 민폐의 제거를 위하여 도망자와 죽은 자에게 행한 蕩滌 조치는 더욱 軍丁의 감축을 조장하였다. 또한 訓練都監의 군사마저 北方에 대한 경비로 파견하여 군사가 줄어드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오랑캐의 침략을 막을 계책이 없고 收布와 宿衛가 모두 어려운 지경’이었다. 뿐만 아니라 倭亂이후 백성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옮겨 다니고 있어 백성의 정착과 향촌의 복구도 시급하였다. 이에 광해군 1년(1609) 4월 兵曹判書 李廷龜는
將修軍籍 必先行號牌法 然後 可以修軍籍矣
라며 軍籍의 정리를 위하여 반드시 호패법부터 실시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禮曺判書 朴弘 역시 ‘如欲籍兵 必作號牌’라며 호패작성이 군병 등록의 선결 조건임을 강조하였다.
조정에서 호패법 실시의 결정은 일단 별다른 異論이 없는 듯 보였다. 광해군은 同王 1년(1609) 10월 비변사에 호패제 시행을 위한 事目을 준비하도록 하였고, 이듬해 3월에는 재차 사목을 상세히 마련하여 시행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비변사는 京中은 광해군 2년(1610) 9월 그믐까지, 外方은 겨울 이전까지 號牌都目을 작성해 올리도록 한 후, 광해군 3년(1611) 정월부터 호패 패용을 시작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호패제 시행과 감독을 주관할 기관으로 號牌廳까지 설치하였다. 조선 전기에도 없었던 호패청의 신설은 그만큼 철저하고 효율적으로 시행하려는 의지로 보여 진다.
참고문헌
김문기(2007), 17세기 강남의 소빙기 기후, 명청사학회
김익진(2007), 17세기 프랑스 문학작품에 나타나는 웃음의 양상과 그 의미, 한국프랑스학회
서동완(1988), 영국 청교도 혁명과 종교정책, 한신대학교
안승훈(2011), 데카르트에게서 관념의 표상적 실재성, 전남대학교
정만조(2011), 조선후기 정국동향과 갈암 이현일의 정치적 위상, 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허태용(2010), 17·18세기 북벌론의 추이와 북학론의 대두,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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