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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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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공업의 발달
1. 해방 전의 공업
1) 초기의 공업 건설(1910~1930)
2) 대륙 병참 기지화와 중화학 공업의 건설(1931~1945)
2. 해방 후의 공업
1) 시장경제 체제하의 공업(1945~1952)
2) 6․25이후의 재건설기(1953~1961)
3) 중화학 공업의 기초(1962~1973)
4) 중화학 공업의 발달(1974~1981)

Ⅲ. 공업과 자동차공업

Ⅳ. 공업과 정밀화학공업

Ⅴ. 공업과 제철공업
1. 과거의 제철 공장-대장간
2. 오늘날의 제철 공업

Ⅵ. 공업과 중화학공업

Ⅶ. 공업과 면방직공업

참고문헌

본문내용

은 악화됨으로써 두 부문 간의 효율성 격차가 거의 소멸하거나 곧 소멸할 것이라는 기대가 형성됨에 따라 한국의 재벌들은 1976-78년 사이 기업인수 및 설립에 의한 중화학공업 부문으로의 진입과 투자확대를 경쟁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하였다.
중화학공업화 이후 한국에서 財閥의 성장을 구체적으로 보면, 1973-78년 사이 한국의 GDP는 평균 9.9% 성장했으나 같은 기간 동안 한국의 5대 재벌은 30.1%, 10대 재벌은 28.0%, 20대 재벌은 25.9%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이것은 국민경제의 성장률보다 재벌의 성장률이 훨씬 더 높을 뿐만 아니라, 상위 재벌일수록 더욱 빠른 축적을 이룩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1973년 5대 재벌이 생산한 부가가치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5%, 제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8%였으나 1978년에는 그 비율이 각각 8.1%와 18.4%로 상승했으며, 46대 재벌로 확대할 경우 이 비율은 17.1%와 43.0%에 이른다.(사공일, 1993, p.312.) 같은 해 10대 재벌의 매출액이 GN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무려 30.1%였으며, 1984년 이 비율은 67.4%에 이른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 성장이 지속되면 될수록 재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은 더욱 심화되어 갔다고 요약할 수 있다.
Ⅶ. 공업과 면방직공업
조선총독부는 1915년에 重要物産同業組合令을 제정했고 공포했다. 그 목적은 품질개량, 불량품 근절, 생산량 증가였는데 동업조합은 조합원이 조합원의 의무를 이행하고 있는지 단속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동업조합을 설립할 수 있는 업종을 지정했다. 처음에는 미곡, 대두, 소, 돼지, 면, 면화, 누에고치, 과일, 직물, 종이, 술 및 그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부문이었고 이후로 점차 증가했다. 동업조합은 생산물과 지역을 단위로 해서 설립되었으며 지방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동업조합이 포괄하는 지역내에서 그 생산물을 생산하는 자는 반드시 가입해야 했다(小旱川九郞 1944: 176).
제1차 세계대전기부터 공업이 성장했다. 그런 중에 중소기업의 자금이 부족하고 생산기술이 낮은 것이 공업의 발전을 저해한다고 자주 거론되었다. 중소기업의 기술을 높이고, 중소기업이 필요로 하는 자금을 공급하고, 부당한 경쟁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조합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京城日報』1933년 11월 7일, 8일).
조선총독부도 공업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조합설치에 관한 법령이 실효를 가질 것이라고 낙관할 수 없었다. 중소기업 내에서도 규모와 기술의 격차가 컸던 것이 하나의 이유였다(『釜山日報』1938년 10월22일).
1937년 겨울에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군수품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위해서는 공업생산자를 조직하고 국가정책에 순응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1938년 8월에 朝鮮工業組合令을 제정/공포했다(朝鮮工業組合中央會 1942: 55).
공업조합은 중소기업만의 단체가 아니었다. 어떤 산업의 모든 공업생산자가 모두 가입해야 했다(朝鮮總督府殖産局商工課編 1939). 공업조합의 사업은 조합원의 생산물을 검사하는 일, 사업과 관련한 조합원의 행위를 단속하는 일, 조합원의 사업의 확대 또는 축소를 통제하는 일, 공동의 설비를 마련하고 공동으로 가공하고 공동으로 판매 및 구매하는 일이었다. 공동설비, 공동가공, 공동판매, 공동구매가 동업조합과의 차이였는데 구체적으로 보면 조합이 원재료를 배급하고 생산물을 할당한 것이 큰 차이였다(朝鮮工業組合中央會 1944: 55).
조선 방적공업조합의 사례를 소개해 보자. 그것의 사업은 수출 면직물을 검사하는 일, 배급받은 원재료를 조합원에게 할당하는 일, 군부와 조선총독부의 명령에 의한 생산량을 조합원에게 할당하는 일, 조합원의 과잉생산량을 구매하여 총독부의 허가하에 판매하는 일, 낙면 (落綿) 을 수집해서 조선 낙면상인조합 조합원에 판매하는 일, 조합원의 위탁을 받아 재료를 구입하는 일, 관선통제위원을 추천하는 일이었다(朝鮮工業組合中央會 1944: 15-16).
한국이 해방되고 일본인이 모두 귀국한 뒤 조선 방적공업조합에는 한 명의 한국인만이 남았다 1944년에 김연수가 조선 방적공업조합의 이사장이었지만 해방된 이후에 김연수가 그 조합을 관리한 것은 아닌 듯하다. 1945년 11월경에 그 사람이 방적공업조합의 남은 재산을 승계하여 방직공업의 연합체를 결성하려 했고 그 결성에 가담한 사람들이 그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경성방직의 의사를 타진했다. 경성방직은 방적공업조합을 부활시키려는 사람들이 면방직 공업을 발달시키기보다는 연합체를 만들고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이익을 얻으려 한다고 판단했고 그 제안을 거절했다. 1947년에 조선방직협회가 결성되었는데 그것은 조선 방적공업조합을 계승하지 않았다(대한방직협회 1957: 12).
조선방직협회를 만든 이유는 원조된 미국면화를 얻기 위해서였다. 미군정의 방직공장 운영위원회가 그 위원회에 소속된 면방직 공장에만 미국에서 원조된 면화를 공급하고 있었고 방직공장 운영위원회에는 해방 이전에 일본인이 소유하고 있었던 면방직 기업의 일부가 소속해 있었다. 방직공장 운영위원회는 한국인 기업 및 한국인이 관리인으로 있는 면방직 귀속 사업체가 면화를 공급 받기 위해서는 그 운영부에 들어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면화를 공급 받기 위해서는 한국인 기업과 한국인이 관리인으로 있는 면방직 귀속 사업체가 그 운영부에 들어가야 했지만 그 운영위원회가 기업 경영을 간섭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경성방직과 귀속 면방직기업의 한국인 관리자들은 협회를 만든 다음에 그 운영부에 들어가면 교섭력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참고문헌
○ 국무총리기획조정실(1973), 중화학공업의 오늘과 내일
○ 김양화(2001), 경제제도와 기업 : 1960년대 한국 면방기업들의 사례, 사대논문집 40호, 부산대학교
○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1988), 포항제철의 기업문화연구
○ 한국은행(1987), 우리나라 공업구조의 변동, 조사통계월보
○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1993), 1993 자동차공업 편람
○ 한국산업은행 / 산은조사월보(1976), 정밀화학공업의 최근동향과 개발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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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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