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식민지시대]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와 일제정치, 일제정책,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와 일제통치, 일제시기(일제시대),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와 일제말기, 일제교회(일제기독교)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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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제, 식민지시대]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와 일제정치, 일제정책,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와 일제통치, 일제시기(일제시대),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와 일제말기, 일제교회(일제기독교)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와 일제정치

Ⅱ.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와 일제정책

Ⅲ.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와 일제통치

Ⅳ.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와 일제시기(일제시대)

Ⅴ.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와 일제말기

Ⅵ. 일제(식민지시대, 일제강점기)와 일제교회(일제기독교)

참고문헌

본문내용

경만 널리 보급된다면 직접 복음을 전해주는 전도사가 없을지라도 하나님이 성경을 읽는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올 수 있게 한다고 보았으며, 모든 문서 및 출판 활동에서 한자의 구속에서 벗어나 순 국문을 사용할 것을 원칙으로 삼음으로써 좁게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국문을 보급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넓게는 ‘한국 문자의 부흥’에 공헌하게 되었다. 기독교는 철저하게 국문 중심의 문자정책에 앞장섰으며, 모든 책자와 신문잡지 등을 국문으로 발행할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선교라는 목표를 국문 보급 및 이를 위주로 한 교육이라는 방법을 통하여 달성함으로써 대중계몽과 더불어 민족의식과 독립정신, 그리고 민족주체성을 고조시키는 데 현격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성경 번역이 가져다 준 공헌은 기독교의 창조신을 ‘하나님’으로 결정한 것과 한국어 문장의 순화와 전통문화를 계승발전시킨 데 있다. 한글의 재발견은 전통적 가치의 계승이라는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대중을 의식화주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국에는 배우기와 쓰기에 매우 쉽고 편한 훌륭한 한글이 있었기 때문에 기독교의 전파에 큰 편리를 주었다. 한국인에게는 원래 유일신인 하나님을 경외존중하는 사상이 있었으므로 당연히 기독교의 신을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어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 큰 편익을 주었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노력에 의하여, 무엇보다도, 한국 국민은 우리나라의 말과 글의 중요성을 깨달아 국어와 국문의 가치를 발견하는 계기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통하여 외국인에게 국문을 널리 알림으로써,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인정받는 동시에 한국 국민으로 하여금 독창적인 문자를 가진 위대한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또한 국어와 국문에 관심을 가진 한국인 가운데에서 이것을 연구하게 함으로써 그 가치를 실제로 증명할 수 있는 자극을 주었으며, 이러한 연구들은 궁극적으로 한국 국민에게 민족의식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인 기독교인의 국어국문 연구는 기독교라는 하나의 종교와 민족주의를 관련시키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것이었다. 특히, 주시경(1876-1914)은 문명 부강한 나라는 모두 자기 나라의 문자를 쓴다는 사실을 알고 국어국문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896년 서재필을 만나 독립신문 국문판의 국문 담당 조필(助筆) 일을 전담하면서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를 조직하고 국어 표기의 원칙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상동청년학원을 비롯한 여러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면서 국어국문에 대한 연구를 진작시켜, 국어문전음학(國語文典音學, 1908) 국문초학(國文初學, 1909) 국문연구(1909) 국어문법(1910) 말의 소리(1914) 등의 저서를 남기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학부에서 설립한 ‘국문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위촉되어 국문연구의정안(議定案)을 작성하여 보고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며, 그에게 국어를 배우고 나간 졸업생들은 민족정신에 입각하여 ‘국문연구회’(1908. 8)를 조직함으로써 국어국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모체를 형성하게 하였다. 또한 신문이나 잡지에 논설을 게재하여 국어국문을 숭상하고 존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당시 한국은 언어와 문자를 바르게 정리하여 체계화하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도외시하면서 다른 나라의 언어와 문자만 숭상함으로써 국성(國性)이 날로 쇠하여 국력의 회복이 도저히 불가능한 상태에 있었다. 이러한 때 주시경은 위와 같은 활동을 통하여 인종에 따라 각기 다른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이것을 바탕으로 국가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우주 자연의 당연한 이치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국토가 나라 독립의 기초이며, 그 종족은 독립의 체(體)이고 언어는 독립의 성(性)이기 때문에 국가의 성쇠 여부는 언어에 달려 있어서 천하 강국이 자국의 언어를 존중하고 그 언어를 가지고 문자를 만들어 쓴다고 보았다. 그리고 국가 세력이 흥하면 그 나라의 언어가 다른 나라에까지 전파되어 세계적인 언어가 될 수 있다고 함으로써, 한국어를 공부하는 젊은이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갖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기독교인이었던 그는 말년에 주위 사람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민족종교인 대종교로 개종하였다.
기독교를 배경으로 국어국문과 관련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한 또 한사람으로 최광옥(1880-1912)을 들 수 있다. 그는 1906년 11월 항해도 안악지방에서 ‘면학회’(勉學會)와 ‘해서교육총회’ 등의 교육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과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에 참여하여 1905년 을사보호조약 반대 투쟁에 나서기도 하였다. 또한 1907년 조직된 민족운동단체인 ‘신민회’에 참여하여 민족운동을 하였으며, 대성학교 교장을 역임하면서 105인 사건 등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1908년 대한문전(大韓文典)을 간행하였는데, 이 문법책을 통하여 그는 언어와 문자란 국민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만일 언어가 일정하지 않으면 그 폐단이 심하여 국민을 하나로 결합시키지 못하는 동시에 국민의 자유까지 상실하게 된다면서, 그 대표적인 예로 중국과 러시아를 들었다. 따라서 국어는 국민의 단결과 국가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므로,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민에게 가르치고 또한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 책은 당시 아직 문법이란 이름조차 잘 모르던 때에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한국인의 어문 연구에 지침 노릇을 할 수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초등학교에서 교과서로 채용하여 활용하였다 한다.
참고문헌
김운태, 일제시대 정치행정연구, 서울대학교, 1973
고봉준 외 1명, 일제말기 근대비판 담론의 시간성 연구, 국제어문학회, 2010
박용규, 일제의 지배정책에 대한 신문들의 논조 변화, 한국언론정보학회, 2005
신현광, 일제시대의 한국교회 성장에 대한 연구, 한국복음주의실천신학회, 2007
임상혁, 사법부에서 일제시기 관행의 잔재와 극복, 한국법제연구원, 2010
주봉노, 일제통치하의 사회교화정책, 장안대학,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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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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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6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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