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거문화와 주거의 기능 및 시대별 주거사(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삼국시대의 주거, 고려시대의 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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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주거문화와 주거의 기능 및 시대별 주거사(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 삼국시대의 주거, 고려시대의 주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주거문화

2. 주거의 기능

3. 시대별 주거사
 3.1 구석기 시대
  ▪ 인류의 출현과 진화
  ▪ 우리나라의 구석기 유적
  ▪ 공주 석장리 구석기 주거유적
  ▪ 인공주거 건설의 배경과 의미
 3.2 신석기 시대
  ▪ 신석기 문화의 시작
  ▪ 원추형 막집의 출현
  ▪ 움집의 발달
 3.3 청동기 시대
  ▪ 마을의 형성
  ▪ 반움집으로의 변화
 3.4 철기 시대
  ▪ 지상주거의 출현
  ▪ 온돌의 발전과정
  ▪ 고상주거와 마루의 발달
 3.5 삼국시대의 주거
  ▪ 삼국의 주거별 특징
  ▪ 건축기술의 발달
  ▪ 주거계층의 분화
 3.6 고려시대의 주거
  ▪ 누정건축의 발달
  ▪ 고려시대 주거의 형태와 구조
  ▪ 온돌과 마루의 결합

참고문헌

본문내용

초석, 중앙 출입문, 살창, 곡선기와지붕으로 이루어진 주택이었으며 구조는 목조가구, 공포, 부연, 단청, 장식기와로 꾸며져 있었다. 주택장식은 금, 은, 동 등의 금속재료를 사용했다.
다음 [그림 23]의 가사규제에서 보이는 양동은 회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림 23] 불국사의 회랑
3.6 고려시대의 주거
누정건축의 발달
고려시대에는 일반 백성들의 집은 움집의 형태였고 귀족계급만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빙돌'이라는 온돌이 있었으나 귀족계급이나 왕궁에는 온돌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반 백성들은 대부분 흙침상을 만들고 땅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누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의 장갱과 같은 난방 방식을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욱실'이라는 온돌방과 '양청'이라는 마루가 건축되었음이 기록으로 전해진다. 안계복, 《누각 및 정자양식을 통한 한국 전통정원의 특성에 관한 연구》, 서울대 농학박사학위논문, 1999
특히, 별서건축이 유행했는데, 별장건축의 발달로 별서, 별업이 유행했다. 별서는 주택과 독립하여 농장 등에 조성된 조경을 말하며, 별업은 묘역에 이루어진 조경을 말한다. 전원생활, 은둔생활 또는 농장의 경영으로 별서건축이 유행하게 됐으며 도가적 자연관으로 인해 자연 그대로의 모습에 가치를 두었다. 정연상《고려말 상류층 목조건물의 구조기법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 석사논문, 2003
또한, 누정건축이 발달하였는데, 이는 루정건설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개인정자건설의 폭증때문이다. 공주동정기의 모습에서 경사지 이용방법의 발달을 알 수 있고, 사륜정기를 보면 이동식 정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그림 24]는 바퀴가 달린 이동형 정자의 기발한 착상을 보여준다. 박언곤, 사륜정기 고찰에 의한 정자건축의 연구
[그림 24] 사륜정의 추정모습
고려시대 주거의 형태와 구조
아산 맹씨행단은 고려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창방없는 초익공과 쇠서의 모양은 수덕사 대웅전과 유사하다. 구조는 [그림 25]와 같이 소슬합장과 동자주를 따르고 있으며, 창호는 분합형식이 아닌 3짝 독립창호이며, 중간설주를 사용했다. 양쪽 들어열기 창과 정자살 방식이다.
[그림 25] 소슬합장과 동자주
고려시대 주거의 내부공간은 서긍(徐兢:1091-1153)의 <선화봉사 고려도경(宣和奉使 高麗圖經)>에 “침상앞에는 낮은 평상을 놓았는데 삼면에 난간이 둘러있고 각기 비단 보료를 깔았다. 또 큰 자리를 마련하였는데 편안하기 이를 데가 없어 전혀 이풍(夷風)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왕이나 귀족계급의 예이고 이로써 중국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 뿐이다.일반 상사람들은 대부분 흙침상[土榻]으로, 땅을 파 아궁이를 만들고 그 위에 눕는다. 그것은 겨울이 워낙 추우나 솜 등속이 적기 때문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와탑과 침상은 상류계층은 중국식 침상을 사용했는데 이는 와탑과 유사하다. 하류계층은 흙침상을 사용했고 이는 온돌로 추정된다. 온돌은 전면온돌이 발달했으며, 아궁이와 분리되어 있다. 이는 후에 상류계층으로 확산되며 지역적으로도 확산됐다.
온돌과 마루의 결합
온돌의 계층적 확산과 지역적 전파로 발해 상경용천부에서는 궁전 침실, ㄱ자형 두줄고래가 발견되었으며 익산미륵사지에서는 ㄱ자, ㄷ자형 쌍줄고래, 감은사 서회랑터에서는 4줄 고래, 완도 법화사터는 4줄고래, 전면온돌 유구는 신의주 상당리 주거지와 평북 동창군 학성리 병영 주거지엣 발견되었다. 침실과 아궁이의 분리는 문경 새재 원터 유적에서 나타났다.
온돌과 마루가 결합된 것에 대한 문헌기록으로는 욱실과 냉방, 온실과 냉재, 욱실과 냉헌 등의 용어가 표현되어 있다. 또, 공주동정기에는 겨울에는 따뜻한 방에서 생활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마루에서 생활한다는 기록이 있다. 중앙대청형 평면에 대해서는 동경잡기 객관조, 양촌집 등에서 기술하고 있고, 맹씨행단의 평면은 동경잡기 객관의 평면구성과 유사하다. 다음 [그림 26]은 맹씨행단의 외관으로 중앙의 마루부분과 양쪽 온돌방 부분이 각기 다른 입면과 지붕의 모습을 갖는다.
[그림 26] 맹씨행단의 외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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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5.27
  • 저작시기2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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