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 - 시인 이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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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청포도 - 시인 이육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이육사의 문학세계
1. 연보
2. 가계도
3. 출생과 고향
4. 이름
5. 받은 교육

Ⅱ. 육사의 문학
1. 작품연보
2. 시사적 의의
3. 발간시집

Ⅲ. 독립운동
1. 첫 옥살이
2. 대구 격문사건
3. 무장투쟁
4. 서대문 감옥
5. 마지막 길

Ⅳ. 교과서 속의 육사

본문내용

식을 가졌다. 나머지 6명은 뒤에 별도로 입교하여 1기생은 모두 26명이었다. 이 학교의 교관은 20여명이었고, 그중 중국인이 3명이었다.그가 의열단에서 설립한 군사간부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의열단에는 결코 가입하지는 않았다고 밝혔다.
▶군사학 교육 - 탄약,폭탄, 뇌관......
이수기간은 1932년 10월 20일부터 1933년 4월 20일까지 6개월이었고, 입교생들은 재학중에 학원(學員)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들은 중국국민군 보통병사의 상위로서 견습사관의 대우를 받고 졸업 2∼3개월 후에는 소위로 임관되게 되어 있었다. 그들은 아침 6시에 기상하여 저녁 9시에 취침하기까지 교양과목과 군사학을 교육받았다. 교양과목으로는 정치학(교관:韓某), 경제학(교관: 왕현지), 사회학과 조직방법(교관:김정우), 철학(김원봉)을 배웠고 그외 군사학, 통신법, 선전법, 연락법 등을 비롯하여 탄약, 폭탄, 도화선, 뇌관 등 제조법, 그리고 투척법, 피신법, 변장법, 서류은닉법, 삐라살포법, 암살법, 무기운반법, 철로폭파법, 열차운전법 등을 교습받았다.
▶1기생으로 졸업 - 공연대본[지하실]
조선혁명정치군사간부학교 1기생들의 졸업식은 1933년 4월 23일 학교 강당에서 거행되었다. 졸업식에는 교장 김원봉과, 남경중국일보 사장인 캉저(康澤)과 비밀공작법을 가르친 시에중용(協中庸) 등이 참석했다. 식이 끝난 후에는 연극이 공연되었는데, 이 공연에서 육사는 <지하실>이라는 대본을 썼고 직접 출연하기도 했다. 졸업후 육사는 국내의 노동자 농민에게 혁명의식을 고취하는 것과 2기생 모집을 위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극비밀리에 가입, 민족독립의식
그는 귀국 후 언론활동을 통해서 민족의 독립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의열단은 제1기생들의 재학 중에 교관이나 입학 때의 소개자를 통해 그들의 혁명의식을 확인한 후 극비밀리에 입단을 권유하고 이에 응한 사람에게는 가입맹서를 하게 했다. 제1기 졸업생들의 중요한 사명이 의열단 지부를 조직하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면 혁명간부학교 졸업생들은 모두 의열단에 가입했다고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러나 제1기생들이 학교를 졸업한 약 2개월 후인 1933년 6월 말, 의열단 전체회의가 남경의 혁명간부학교에서 개최되었고, 여기에 참가한 제1기 졸업생 단원 18명의 명단이 있으나 그 속에 이활의 이름은 없다.
4.서대문감옥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
중국에서 군사간부로 육성된 목적에 충실하기 위하여 국내 공작원으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행동으로 옮기기 전 1934년 3월 22일 경찰에 체포된다. 일본 경찰은 육사가 만주로 사라진 1932년 4월 이후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일본경찰의 기록에 \"1932년 4월에 다시 만주로 갔으나 그 뒤에 소재불명이어서 요주의 인물로 수배중에 있었음\"이라고 적혀있다. 6월 23일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 1934년 7월 안동경찰서 보고내용
\"배일사상, 민족자결 , 항상 조선의 독립을 몽상하고 암암리에 주의의 선전을 할 염려가 있었음 . 또 그 무렵은 민족공산주의로 전화하고 있는 것으로 본인의 성질로 보아서 개전의 정을 인정하기 어려움\"당시 육사가 체포된 곳은 광화문 앞 본정에 자리한 경기도경찰부 경성본청이었다. 이 때 작성된 신원카드가 남아있어, 이를 통해 그의 면모를 살필 수 있다. 신분은 상민으로 기록되어있다. 그의 키는 5척4촌5분인데 1척을 30.3cm 로 계산하면 165cm 이므로 당시의 보통 키에 해당한다.
5.마지막길
▶무기반입을 위한 계획
그가 베이징에서 귀국할 때 무기를 반입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계획을 세운데에는 1940년대에 들어 국내에서는 독립군적인 조직들이 나타나고 있었던 점과 걸음을 같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빠 갔다 오마”
1943년 7월에 그는 모친과 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다. 고향마을인 원촌과 안동풍산에서 일박하고 상경한 뒤, 늦가을에 동대문 형사대와 헌병대에 검거된다. 부인 안일양은 7월에 동대문 경찰서에서 마지막으로 육사를 보았다고 전한다. 20여일동안 구금생활을 치르다가 \"딸 옥비에게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딸의 볼을 얼굴에 대고, 손을 꼭 쥐고는 \'아빠 갔다 오마\'라고 말했다\"고 한다.
▶ “시신을 인수해 가라”
20여일 후 베이징으로 끌려갔다. 육사의 마지막 길이었다. 육사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육사와 같은 마을 출신이자 독립운동 활동을 하던 친척 이병희(여)가 육사의 마지막을 정확하게 증언해 주었다. 육사가 사망했으니 시신을 인수해가라는 연락을 듣고 이병희는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으로 가서 관을 인수하고, 급히 빌린 돈으로 화장을 치렀다. 그 유골이 든 상자를 이귀례라는 친구집에 두었다. 순국 후 9일 지나 1944년 1월 25일에 원창에게 넘겨졌다. 유해는 국내로 옮겨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그의 고향마을 뒷산으로 이장되었다.
Ⅳ. 교과서속의 육사
고등학교 1학년 국어 - \'광야\'
중3학년 1학기 국어의 제 4단원 \'읽기와 토의\' 단원 (1)\'지사의 길, 시인의 길\'초등학교 6학년1학기 사회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지킨 사람들\"신경림 시인의 기고문 - \'월간 우리교육\' 1996년 6월호에서 발췌
8. 시의 심상(중학교 3학년 1학기 국어 8단원)
(3) 청 포 도 : 이 육 사 (1904 - 1944) 본명 : 원록. 원삼. 활
시인. 독립운동가. 17회 투옥 (북경 감옥에서 옥사)

본론
요지
시상전개
1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고향에 대한 그리움
현실

2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먼 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청포도의 형상화
3
하늘 밑 푸른 바다가가슴을 열고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조국 광복의 여건
상상

4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청포를 입고 찾아 온다고 했으니
조국 광복의 신념
5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조국 광복의 기쁨

6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조국 광복을 기다림(대비)
현실

참고 http://www.264.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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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3.30
  • 저작시기20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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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94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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