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초기 선교와 미국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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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서 론


본 론
1. 선교사 입국 이전의 미국교회와의 관계

2. 선교사들의 입국과 초기 선교활동
1) 언더우드의 신학과 사상
2)아펜젤러의 신학과 사상
3) 의료와 교육선교
4) 성경 번역과 문서선교

3. 1907년 대부흥 운동과 3. 1 운동
1) 한국에 대한 미국정부의 태도
2) 1907년 대부흥 운동과 선교사들의 역할
3) 3. 1운동과 선교사들의 태도
4) 선교사 배척운동


결 론

본문내용

. 1 독립 운동에 선교사들이 취한 태도에 대해서 김인수 교수는 "선교사들의 성향에 따라 여러 가지로 표출되었는데, 이 일을 적극 지지한 사람으로부터 극력 반대하는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선교현지에서 언제나 정치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중립을 지킨다는 원칙은 변함이 없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은 중립적 위치에 있었다"고 말한다.
) 김인수, op. cit., pp.411-412.
하지만 평화적인 시위를 일본이 폭력적으로 진압하고 교회의 피해가 크자 선교사들도 더 이상 중립적인 위치에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펫(S. H. Moffett)은 당시 입장에 대해 말하기를 "만행에 대해서는 중립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을 고종 기념집회라는 명목으로 열렸던 독립운동에서 학교에 청중들이 태극기를 게양하자 일본 군인들이 군중을 해산시키면서 태극기를 내리려하자 "이것은 외국인 재산이니 손 댈수 없습니다." 그리고 흥분한 한국인들을 향해서 "내가 이 태극기를 잘 보관했다가 , 한국이 자유롭게 다시 게양할 수 있는 날 돌려주겠다"
) 이 태극기는 마펫의 약속대로 그의 아들에 의해 1974년 숭실대학교에 기증 되었다.
고 약속한 점에서 당시의 선교사들의 심적 상황을 엿볼수가 있겠다.
) Martha Huntley, op. cit., p.373.
3. 1 운동 당시 선교사들은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적극적인 참여, 무관심, 중립, 반대등의 현상을 보였다.
4) 선교사 배척운동
) 한국 기독교의 역사Ⅱ, op. cit., pp.169-176.
105인 사건이나 3. 1운동을 통해 나타난 선교사들의 모습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에 대해 심정적인 동조는 하고 있으면서도 미국정부의 한국과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 교회의 정치참여를 금지하는 정교분리 신학배경으로 인해 적극적인 지원과 참여를 하지 못했다. 특히 3. 1운동 이후 선교부 지도급 인사들이 보여주었던 총독부와의 우호적인 협력 및 동역관계는 의식있는 한국인들의 우려와 비난을 받기에 충분했다. 선교사중 상당수는 3·1운동 이후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다소 완화된 듯한 대한 정책을 추구한 사이토 총독에게 기대를 걸며, 선교활동을 보장받는 대가로 한국 기독교인들의 정치참여와 민족운동을 교리적으로 불순한 행위로 규정하며 교회의 비정치화를 더욱 강하게 추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의식있는 한국인과 선교사 사이에 갈등이 초래되었으며, 1920년대 내한한 제2세대 일부 선교사들의 백인우월주의적 형태가 표면화 되면서 민족감정문제를 일으켰고 상호불신의 장벽을 쌓게 되었다.
선교사들의 인종차별주의적 편견과 오만에서 빚어진 불행한 사건 중의 대표적인 것으로 '허시모사건'(許時模事件)으로 알려진 미국인 안식교 선교사 헤이스머(C. A. Haysmer)의 만행이었다. 1925년에 의료 선교사로 내한한 헤이스머는 자기 집 과수원의 사과를 따먹은 한국인 아이의 이마에 염산으로 '됴뎌'이라고 써서 돌려보낸 사건이다. 이 사건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반선교사 규탄여론이 형성되었다. 특히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앞장서 '반(反)선교사', '반(反)기독교' 운동을 활발히 전개했고 일본계 '상애회'란 단체도 선교사 배척운동을 지원하고 나섰다.
1920년대 중반부터 외국인 선교사들의 비행과 추문에 관련된 사건들이 계속 이어져 기독교 학교와 교회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선교사 배척 분위기가 고양되었다.
일본은 1930년대 후반에 동양적 기독교 수립이라는 명목으로 서양 기독교 및 선교사 배척운동을 추진하였고 , 결국 1940년대 한국 기독교를 일본 기독교에 병합시켰다. 이같은 면에서 선교사 배척운동이 한국 기독교를 친일적 성향으로 기울게 했다는 부정적인 비판도 있지만, 1920-30년대 한국교회의 선교사 비판내지 배척운동은 한국 기독교인들의 '자립'과 '자치'를 위한 또 하나의 독립운동으로 평가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결 론
한말 쇄국정책과 개화 그리고 한미수호통상조약, 일본의 주권찬탈 등의 사회, 정치적 혼란기에 이 땅에 입국한 선교사들은 교육과 의료사업으로 시작하여 성경번역, 문서사역, 대부흥 운동, 괄목할 만한 교회의 성장 등을 주도했으며, 목격했다.
이 땅에 기독교 선교사가 들어온지 120여년이 흐른 지금에도 여전히 그들의 영향력은 한국교회에서 미미하나마 계속되어지고 있으며 그들의 수고와 노고의 손길등을 곳곳에서 엿볼수 있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미국과의 정치적 연관성이 깊었고, 미국내의 제2차 대각성 운동으로 인한 학생 자원 선교사들로 인해 한국에는 많은 미국 선교사들이 왔으며, 미국 선교사들의 주도하에 선교가 이루어졌다.
한국 내의 초기 선교사들이 여러 악조건 하에서도 겸손히 선교를 감당한데 비해, 1920년 이후에 입국한 선교 2세대에서는 지나친 민족주의, 인종차별, 문화우월주의에 사로잡혀 한국인과 많은 갈등을 유발시켰음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관계로 선교사들이 파송되어 선교지 교회가 형성되면 선교지 교회가 자립할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하는 것이과, 선교지에서 선교사들의 철수도 고려해보는 것이 좋음을 알수 있다.
이와같이 선교사들의 많은 헌신적인 사역에 감사하면서도 그들의 지나간 실수와 과오를 되돌아 보는 것은, 이제 세계 도처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나라로서 그들의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이제 한국교회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고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증거하다간 선교사들의 은혜를 결코 잊어서는 안되며 복음의 빚진자로,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파송함으로 받은 사랑을 전해주어야 할 것이다.
참 고 문 헌
강재언, 『한국의 개화사상』, 정창렬 역, 서울:비봉출판사, 1989.
기독교 사상 편집부, 『한국역사와 기독교』, 서울:기독교서회, 1993.
김인수, 『한국 기독교회의 역사』, 서울:장신대 출판부, 1997.
우완용, 『비운과 섭리의 민족 교회사』, 서울:목양서원, 1992.
한국 기독교 사회 문제 연구원, 『민족주의와 기독교』,서울:민중사, 1981.
한국 기독교사 연구회,『한국 기독교의 역사 Ⅰ』, 서울:기독교문사, 1992.
Martha Huntley,『한국 개신교 초기의 선교와 교회성장』,차종순역, 서울:목양사, 1985.

키워드

한국,   선교,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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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2.10.26
  • 저작시기2002.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08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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