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왕비에 역사적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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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 광개토왕비의 역사적 의의

Ⅱ. 본론
1. 광개토왕비에 대한 설명
① 광개토왕은 누구인가
② 광개토왕비는 언제 발견되었는가
③ 광개토왕비문은 왜 변조되었는가
④ 광개토왕비문의 진상은 무엇인가
2.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왜관계 기사의 해석
3. 광개토왕비에 대한 오해 지적
4. 그밖에 광개토왕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
①「삼국사기」의 정확성
② 우리 나라에 한자가 들어온 시기

Ⅲ. 결론
∼ 맺음말

본문내용

난 『삼국사기』 기록은 광개토왕이 대주류왕의 17세손이라는 비문 기록과 놀랍도록 일치하고 있다.
넷째, 고구려 시조인 추모(혹은 주몽)가 일찍 세상을 떠났음을 두 기록이 공통적으로 전하고 있다. 즉 추모가 죽었을 때 나이가 40세라고 하고 있는『삼국사기』기록은 '(추모왕이) 세상에서 왕 노릇함을 즐겨하지 않았다'(不樂世位)는 광개토왕 비문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이밖에도 광개토왕의 왕 재위 기간을 비롯해『삼국사기』가 광개토왕 비문과 일치하는 대목은 많다. 다만 일치하는 대목, 즉 정확성은 간과한 채 두 기록 중 차이가 나거나 비문에는 있는데도 『삼국사기』에는 나타나지 않은 점만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삼국사기』 초기기록 거의 전부가 마치 믿을 수 없다는 오류에 우리 학계가 빨려들고 말았다고 최재석 교수는 지적한다.
② 우리 나라에 한자가 들어온 시기
한자의 전래시기가 언제라고 기록된 것이 없기 때문에 중국과 우리 나라의 교류를 알아봄으로써 한자의 전래 시기를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전하는 우리 나라의 한자 자료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광개토왕비이다. 이것은 광개토왕이 죽은 다음해인 서기 414년에 그의 아들 장수왕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광개토왕이 살았던 시기에는 한자가 우리 나라에서도 보편적으로 사용되었고 이미 오래 전에 한자가 들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Ⅲ. 결론
능비의 연구과제와 광개토경의 역사적 의미 광개토대왕비는 문자 그대로 '광개토경'의 위업을 이룩한 광개토대왕의 훈적을 기리는 송덕비로서 조공지배를 이상으로 하여 인국에 대한 정복전쟁을 수행하는 한편 국내영토의 순수를 통하여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완성하고자 한 당대 고구려 정치사의 다양한 사실이 유기적으로 구성된 생생한 역사기록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광개토대왕의 팽창정책을 비롯하여 고구려인의 천하관등 고구려사의 발전과정은 물론 동아시아세계의 생동하는 국제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능비의 연구는 문헌사료의 부족이라는 한국고대사가 갖는 일반적 한계와 고구려사 연구의 현실적 한계 및 삼국 학계의 입장의 차이에 의하여 방대한 연구결과에도 불구하고 논의는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신묘년기사의 판독과 해석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변조된 비문을 토대로 한 초기 일본관학에 의해 능비가 '임라일본부'의 주요 근거로 제시된 이래 일본학계는 당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에서 왜를 주도적으로 보고자 한 까닭에 비문 연구의 방법론상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답보상태에 머무르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학계의 경우에도 비문의 구조나 용사의 면밀한 검토없이 왜의 등장에 대한 공방에 경도된 나머지, 주객이 전도되어 일방적 해석이나 결자의 복원도 단순한 방법에 의거 고대 한일관계의 입장을 합리화하는데 지나치게 노력을 낭비해 온 느낌이다. 이는 일차적으로 능비연구의 기본적인 자료가 되는 원석탁본을 비롯한 연구자료의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나 다른 한편으로는 입장의 차이에 의하여 객관적인 자세를 지키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이 비문을 통한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는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나, 최근 한국학계의 {일본서기}를 비롯한 고고학적 자료를 활용한 '임라일본부'를 비롯한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는 하나의 진전이라고 할 것이다.
정복 기사의 연구에 있어서도 그간의 연구는 주로 정복지역의 비정에 매어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능비가 원래 나타내고자 하였던 고구려의 조공지배라는 자존적 대외의식을 배경으로한 정복전의 성격에 대한 구조적 이해가 부족하였다. 그 결과 오히려 정복대상이나 위치비정에 혼선이 오게 되었다. 특히 광개토경의 의미를 단순히 영토확장으로 이해하였던 까닭에 남진의 대상을 북방에서 구하고자한 오류가 생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역설적으로 북방진출의 범위도 이미 고구려의 구토가 된 지역에서 구하는 등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신묘년기사를 비롯한 광개토왕릉비의 연구는 고구려사를 중심으로한 한국고대사 자체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학계의 한국사 왜곡에 대한 체질 비판에까지 연결되는 문제이다. 다시 말하면, 비문의 올바른 판독과 해석은 곧 왜곡된 한국고대사의 재구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능비연구가 왜의 등장에 대한 논쟁에서 벗어나,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고대사의 발전 과정의 해명이라는 능비연구 본류에 도달하기 위하여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의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가 요망된다고 할 것이다.
광개토대왕은 위대한 정복 군주인 동시에 유능한 통치자였다. 광개토대왕대 고구려의 정복전쟁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실질적인 농경지의 확보와 민호의 획득을 통한 국력배양에 있었음은 물론이지만 전제왕권의 자존적 대외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인국에 대한 정토를 합리화하는 동시에 주정복대상에 대하여는 그러한 복속관계를 구체화하고자 하였던 점에 있다고 하겠다.
주목되는 것은 고구려에 있어 주 정복대상은 백제와 신라 및 동부여였으며, 왜와 비려 등은 부수적인 대상으로 단지 토멸의 대상일 뿐이었다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에 있어 백제와 신라 및 동부여가 왜, 비려와는 성격이 다른 동일 세력권내의 민족집단으로 인식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광개토대왕의 남진정책은 민족사의 발전과정에서 최초의 통일의지의 표현이라 하여도 좋을 것이다. 민족의 영광을 위해 점철하였던 광개토대왕의 생애가 어제의 것이 아니라 오늘의 것으로 항상 새롭게 재조명되어야 한다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는 잃어버린 만주의 옛 강토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비는 남북분단이란 현실을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이란 민족사적 과제를 안고 있는 오늘의 우리에게 이러한 사실을 웅변으로 말하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廣開土王碑 硏究」(왕건군, 역민사, 1985)
「廣開土王碑의 探求」(이진희, 一潮閣, 1982)
참고사이트 www.hongik.ac.kr/∼kayakim/klkwang.htm
www.gwanggeto.com/gwang2.htm
www.art3500.com/lytg/nonmun/non3.htm
history21.netian.com/history2/history2-2-44.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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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6.07
  • 저작시기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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