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여왕' 베네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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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베네치아의 탄생과 성장
(2)베네치아인의 무역
(3) 베니스의 상인
◆제노바와의 전쟁

본문내용

밀, 모피, 가죽이 있었지만 노예는 갤리선에 싣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노플과 달렉산드리아 사이를 왕복하는 범선이 사용되었다.
키프로스, 시리아, 팔레스티나 항로의 경우도 목재를 넣으면 수출품은 같은 물건이었다. 수입품은 향신료를 비롯해서 다마스크스산 견직물, 과일, 염료 등이었다.
알렉산드리아 항로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동양의 특산물인 향신료의 독점시장 같은 수입품목 들이었다. 수출품은 금속제품과 모직물에 목재와 노예였다
플랑드르 항로는 가장 늦게 1300년대 초기에 개설된 항로이지만, 수출품은 향신료, 설탕, 그리스산 포도주와 고급 직물이고, 수입품은 주로 양모와 모직물이었다. 이것을 보아도 베네치아 상업이 얼마나 중개무역에 치중했는가를 알 수 있다. 정기항로를 항행하더라도 번선으로 항행하거나 또 지류를 항행하는 배는 상품을 실을 때 이외는 정부의 행정지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이 '무다' 방식이 채용된 것과 같은 해에,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그것을 더욱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해상법(海上法)도 제정되었다. 이것은 정기항로에 관한 모든 것을 법제화한 것이었다.
규정을 위반한 승무원이 처벌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시의 항로변경을 합의제에 의하지 않고 독단으로 결정한 선장도 처벌당했으며, 상인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그들에게 형편이 좋도록 기항지를 바꾸거나 한 선장은 그것이 사실이라고 증명되었을 경우, 하나의 재산에 상당할 정도의 엄청난 벌금으로 부과했던 것이다.
1300년 전후를 고비로 하여 첫째로 항해기술의 혁명이 일어났다. 그 다음에 배의 구조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상인 쪽에서도 상업기술의 획기적인 개량을 하게 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해서 상인의 유형도 달라진 것이다.
먼저 항해기술의 변화에서는 나침반과 항해도와 '타볼라 디 마르텔로지오'라는 항로의 조견표가 항해에 필요한 세 가지 기구로서 큰 구실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기술혁신은 항해 가능한 시기를 대폭 확장하게 되었다. 비가 오든 안개가 자욱하든, 또 날씨가 흐리든 항해할 수 있게 된 거이었다. 종전처럼 육안으로 확인하고 항해할 때는 불가능했던 겨울철의 항해도 기술혁신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종래는 3월말에 개항하던 것이 1월로 앞당겨졌다. 정기항로도 겨울에 출항한 선단은 5월에 귀항하도록 계획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1년에 한 번밖에 항해할 수 없었던 것이 1년에 두 번이 가능해 진 것이다.
이것은 영국이나 플랑드르의 모직물, 독일의 금속공업의 발달로 서유럽에 팔 물건이 늘고 그것에 따라서 갖고 싶은 물건을 보다 많이 살 수 있게 된 시기와 마침 일치했기 때문에, 오리엔트와 서유럽의 중개역을 하는 베네치아 상업으로서도 큰 비약의 기회가 되었다. 물론 베네치아는 이런 호기를 철저히 이용했다. 배의 개조가 그것이었다.
14세기 특색인 개혁의 두 번째는 상업기술의 진보였다. 그것은 우선 부기의 보급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아라비아숫자로 적은 복식 부기에 의해서 상인들은 자기가 직접 관여한 상거래의 전모를 알뿐만 아니라 해외의 대리인을 통해서 하는 간접거래도 포함한 장사 전반의 진행상태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베네치아 상인들의 유형 변화에 큰 구실을 하게 된다.
그리고 베네치아인의 발명은 은행제도를 창설하게 된다. 그때까지도 '방코'라고 불리는 은행은 있었지만 그것은 책상 위에 금화, 은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점포 구조로, 환전 업무를 주로 해온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금업이었다. 한편 베네치아인이 만든 은행은 장부만 책상 위에 놓은 점포 구조였기 때문에 '방코 디 스크리타'라고 불렸다.
t상인들은 거래가 성립되면 은행으로 갔다. 그들은 모두 계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의 계좌에 이만한 액수를 옮겨달라고 은행가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은행가는 장부에 그것을 기입했다. 이것으로 돈은 움직인 것이다. 종전처럼 금화나 은화 자루를 들고 다니지 않아도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계좌로 돈을 옮겨도 은행가는 그것을 증명하는 영수증과 같은 것은 발행하지 않았다. 은행의 장부는 복사되어 정부의 그것을 담당하는 위원회의 감시를 항상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인은 보통 복수의 은행과 거래가 있었으며, 베네치아 상인과 거래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각국의 상인들은 그 대부분이 베네치아의 은행에 계좌를 개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계좌간 돈의 이동은 보통 아주 간단하게 끝났다. 하지만 베네치아의 은행에 계좌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과의 상거래도 일단 성립되면 베네치아의 은행과 상대 은행간의 조작으로 환어음에 의해서 먼 지방에서의 지불도 전혀 문제가 없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은 상업면에에서 뿐만 아니라 함대 편성이라든가 대사관의 비용 등으로 돈을 이동시킬 필요가 있는 국가로서도 대단히 합리적인 변혁이었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800년이나 전에 이 정도의 근대적인 은행을 생각해냈던 베네치아인은 은행 업무의 하나로서의 융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이 방면에 있어서 주된 융자 대상은 국가였다. 마침 그 무렵은 제노바와의 백년전쟁이 일어났다가는 끝나고 휴전했다가는 시작되곤 하는 상태가 한창이던 시기여서, 국가는 전비조달에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개개 상인에 대한 융자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융자이지 투자는 아니었다. 그런 처지를 이용해서 기업경영으로까지 진출하는 일은 없었다.
국가에 3천 리라의 보증금을 적립하고서 다음에 개점을 했으면서도 돈을 너무 많이 빌려주어서 뒤처리하느라 고생하는 경우도 가끔은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베네치아의 은행에서는 다른 나라의 왕에게 융자를 주었다가 그 왕이 싸움에 졌기 때문에 본전을 찾지 못하게 되어 도산하는 것 같은, 동시대의 피렌체에서 일어났던 현상은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것은 베네치아 경제계의 주역은 은행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었으며, 은행은 상인의 일을 합리화하여 그것이 보다 효율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측면지원을 하는 역할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베네치아인은 그들 나라를 사기업을 경영하는 것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운영했다는 평을 듣는 국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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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4.09.27
  • 저작시기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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