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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동학혁명, 오늘 우리에게 무엇인가
2. 동학농민혁명은 왜, 어떻게 일어났나
3. 동학농민혁명은 어떻게 준비되었나
4. 고부농민봉기
5. 전주성 점령과 전주화약
6. 농민군 해산과 청일전쟁
7. 갑오개혁과 집강소 설치
8. 삼남 각지의 항일봉기와 재봉기의 준비
9. 2차봉기 - 북상, 서울을 향하여
10. 전국 각지의 봉기
11. 농민들이 꿈꾼세상
12. 동학농민혁명, 그 100년에 흐른 정신
2. 동학농민혁명은 왜, 어떻게 일어났나
3. 동학농민혁명은 어떻게 준비되었나
4. 고부농민봉기
5. 전주성 점령과 전주화약
6. 농민군 해산과 청일전쟁
7. 갑오개혁과 집강소 설치
8. 삼남 각지의 항일봉기와 재봉기의 준비
9. 2차봉기 - 북상, 서울을 향하여
10. 전국 각지의 봉기
11. 농민들이 꿈꾼세상
12. 동학농민혁명, 그 100년에 흐른 정신
본문내용
선교사와 일본상인 등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외세축출의 지향이 구체화되고 본격화된 것은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하면서 부터이다. 그리고 일본군이 궁궐을 강제로 점령하고 청ㅗ일전쟁을 도발하며 내정 간섭을 심화하면서, 일본군이 제1의 적으로 떠올랐다. 이후 농민군은 일본군을 대상으로 전면적인 반외세(반일) 항쟁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농민군의 반외세 항쟁은, 조선정부와 군대까지 장악한 일본군, 그리고 농민군을 더 위험시하여 일본군에 동조한 기득권세력의 공격에 밀려 좌절하고 말았다. 외침이라는 민족적 위기 앞에 농민군은 정면으로, 그러나 외롭게 맞서 싸우다 산화해 갔던 것이다.
12. 동학농민혁명, 그 100년에 흐른 정신
동학농민혁명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한 '청·일전쟁',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개혁인 '갑오개혁'이라는 대 사건을 불러왔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주목 받을 사건이다. 그러나 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그런 외형에 있는게 아니다. 농민혁명 내용 그 자체에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그 후 지금까지 100년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은 무엇인가?
통치질서가 파탄에 처하고 일본 등 열강의 침탈이 자행되던 19세기 말, 조선은 크게 두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안으로는 낡은 신분질서를 뜯어 고치고 모든 민족 구성원이 평등의 원칙 아래 자유를 느리며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 가는 개혁, 즉 근대화(近代化)가 필요했다. 밖으로는 이런 내적인 역사발전을 해치는 외부로 부터의 힘에 대응하는 것, 즉 자주화(自主化)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당시 조선은 침략을 배격하는 자주적 입장에서 사회적 개혁을 이룩해야 했다. 이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는 한, 조선은 어떤 형태로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과제에 부응하기 위한 위정자(爲政者)들의 고민과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반지배계층의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과 개화 지식인들의 개화(開化)운동이 그런 맥락의 노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두 운동은 모두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양반층은 위정척사운동을 통해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사회개혁은 반대했다. 개화세력은 개화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외세의 본질을 간과하고 침략세력과 결탁했다.
이런 한계 등으로 결국 두 운동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폐해는 더욱 심각해졌고, 그 최대 피해자인 농민들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실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시의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 세상을 향한 농민 대중의 일대 항쟁인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시작되어 1894년 한 해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다가 30∼40만명의 희생자를 내며 끝났다. 그런데 이 사건의 전개과정은 우연히도 우리의 한 해 농사와 꼭 닮았다. 농민혁명의 씨앗이 부려진 동학공인운동 기간은 해빙에, 고부농민봉기는 봄의 파종에, 3월 봉기는 여름의 경작에, 집강소 설치 및 재봉기 단행은 가을의 결실에, 그리고 9월의 재봉기의 좌절은 농부가 떠난 겨울의 황량한, 그러나 새로운 농사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하는 들판에 견주어 봄직한 것이다.
농민혁명과정에서 농민군은 전(前)근대적 모순과 부패의 척결 즉 근대적 사회개혁을 요구하고 실행해 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농민군은 사회적으로는 신분타파운동을 벌여 양반질서를 혁파하고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경제적으로는 조세 수취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지주 중심의 구조를 혁파하고) 영세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 직접생산자들의 자립과 발전을 꿈꾸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王政)체제의 개선을 희망했다. 나아가 농민군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절체절명의 과제인 '사회개혁과 외세침탈 배격 = 자주 근대화(반봉건 반외세)'를 이루려 한 농민들의 일대 항쟁이었으며, 우리 근대사의 성패(成敗)를 가르는 사건이었다.
국가와 민족의 뿌리인 농민들의 대항쟁은 불행하게도 일제의 무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흔히 실패한 혁명이라 말한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이 사건은 광무년간의 사회개혁 및 항일운동·의병전쟁·3.1 만세운동·상해임시정부·고아복군 활동 등 농민혁명 이후에 전개되는 숱한 민족운동의 조직적·이념적 수원지였다. 18세에 동학접주가 되어 이듬해 황해도 해주 농민군의 선봉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일본인 밀정 살해, 신민회(新民會) 및 상해 임시정부 활동, 광복군 조직 등 민족지도자의 길을 걸은 백범 김구의 생애가 이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현대에 전개된 여러 민주화운동 즉 4.19의거 ·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신적 본령을 리룬다. 그런 점에서 농민혁명은 끝내 실패로 마무리된 사건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할 때, 부패한 지배세력이나 노골적인 외세침략에 대한 대중적 비판과 저항이 미약할 때, 그 공동체가 어떤 처지로 전락하는지를 현재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산 경험이자 역사로 남아 있다.
역사에서 '만일'이라는 가정(假定)은 부질없는 일이다. 역사의 대상인 과거는 말 그대로 이미 지나 버려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정'을 한번 세워보자. 만일 농민군의 호소에 호응하여 민족 구성원(관료와 지주, 양반과 향리층 등) 모두가 농민군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면 어떠 했을까? 정말 그랬어도 우리는 일제의 침략에 그처럼 무기력하게 허물어지고, 식민지 백성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졌을까? 결과야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온 민족이 나서서 저항했다면, 그 성패에 관계없이, 우리 근대사는 분명 그에 걸맞게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식민지화에서부터 파생된 현대사의 온갖 불행 역시 모습을 달리했을 것이다.
상상으로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보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 더 큰 의미와 아쉬움을 던지며 다가오지 않는가?
12. 동학농민혁명, 그 100년에 흐른 정신
동학농민혁명은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한 '청·일전쟁',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개혁인 '갑오개혁'이라는 대 사건을 불러왔다는 것만으로도 우선 주목 받을 사건이다. 그러나 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는 그런 외형에 있는게 아니다. 농민혁명 내용 그 자체에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와 그 후 지금까지 100년에 면면히 흐르는 정신은 무엇인가?
통치질서가 파탄에 처하고 일본 등 열강의 침탈이 자행되던 19세기 말, 조선은 크게 두가지 과제를 안고 있었다. 안으로는 낡은 신분질서를 뜯어 고치고 모든 민족 구성원이 평등의 원칙 아래 자유를 느리며 역사에 참여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해 가는 개혁, 즉 근대화(近代化)가 필요했다. 밖으로는 이런 내적인 역사발전을 해치는 외부로 부터의 힘에 대응하는 것, 즉 자주화(自主化)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당시 조선은 침략을 배격하는 자주적 입장에서 사회적 개혁을 이룩해야 했다. 이 시대적 과제를 실현하지 못하는 한, 조선은 어떤 형태로든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과제에 부응하기 위한 위정자(爲政者)들의 고민과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양반지배계층의 위정척사(衛正斥邪)운동과 개화 지식인들의 개화(開化)운동이 그런 맥락의 노력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두 운동은 모두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양반층은 위정척사운동을 통해 자주권을 수호하고자 했지만 사회개혁은 반대했다. 개화세력은 개화운동을 통해 근대화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외세의 본질을 간과하고 침략세력과 결탁했다.
이런 한계 등으로 결국 두 운동은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사회적 모순과 외세의 침탈로 인한 폐해는 더욱 심각해졌고, 그 최대 피해자인 농민들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이다.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은 실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한, 시의적절한 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 세상을 향한 농민 대중의 일대 항쟁인 동학농민혁명은 그렇게 시작되어 1894년 한 해 동안 한반도 전역에서 전개되다가 30∼40만명의 희생자를 내며 끝났다. 그런데 이 사건의 전개과정은 우연히도 우리의 한 해 농사와 꼭 닮았다. 농민혁명의 씨앗이 부려진 동학공인운동 기간은 해빙에, 고부농민봉기는 봄의 파종에, 3월 봉기는 여름의 경작에, 집강소 설치 및 재봉기 단행은 가을의 결실에, 그리고 9월의 재봉기의 좌절은 농부가 떠난 겨울의 황량한, 그러나 새로운 농사를 기다리며 힘을 비축하는 들판에 견주어 봄직한 것이다.
농민혁명과정에서 농민군은 전(前)근대적 모순과 부패의 척결 즉 근대적 사회개혁을 요구하고 실행해 갔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농민군은 사회적으로는 신분타파운동을 벌여 양반질서를 혁파하고 평등사회를 실현하고자 했다. 경제적으로는 조세 수취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지주 중심의 구조를 혁파하고) 영세한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 등 직접생산자들의 자립과 발전을 꿈꾸었다. 정치적으로는 왕정(王政)체제의 개선을 희망했다. 나아가 농민군은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며 항일민족운동을 전개했다.
한마디로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조선이 안고 있던 절체절명의 과제인 '사회개혁과 외세침탈 배격 = 자주 근대화(반봉건 반외세)'를 이루려 한 농민들의 일대 항쟁이었으며, 우리 근대사의 성패(成敗)를 가르는 사건이었다.
국가와 민족의 뿌리인 농민들의 대항쟁은 불행하게도 일제의 무력에 의해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사건을 흔히 실패한 혁명이라 말한다. 그러나 우리 근대사의 큰 맥락에서 보았을 때, 이 사건은 광무년간의 사회개혁 및 항일운동·의병전쟁·3.1 만세운동·상해임시정부·고아복군 활동 등 농민혁명 이후에 전개되는 숱한 민족운동의 조직적·이념적 수원지였다. 18세에 동학접주가 되어 이듬해 황해도 해주 농민군의 선봉장을 맡은 것을 시작으로, 이후 일본인 밀정 살해, 신민회(新民會) 및 상해 임시정부 활동, 광복군 조직 등 민족지도자의 길을 걸은 백범 김구의 생애가 이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현대에 전개된 여러 민주화운동 즉 4.19의거 ·5.18 광주민주화항쟁 등의 정신적 본령을 리룬다. 그런 점에서 농민혁명은 끝내 실패로 마무리된 사건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대한 대중적 요구가 제대로 수용되지 못할 때, 부패한 지배세력이나 노골적인 외세침략에 대한 대중적 비판과 저항이 미약할 때, 그 공동체가 어떤 처지로 전락하는지를 현재의 우리에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산 경험이자 역사로 남아 있다.
역사에서 '만일'이라는 가정(假定)은 부질없는 일이다. 역사의 대상인 과거는 말 그대로 이미 지나 버려 되돌릴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가정'을 한번 세워보자. 만일 농민군의 호소에 호응하여 민족 구성원(관료와 지주, 양반과 향리층 등) 모두가 농민군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면 어떠 했을까? 정말 그랬어도 우리는 일제의 침략에 그처럼 무기력하게 허물어지고, 식민지 백성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졌을까? 결과야 단정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온 민족이 나서서 저항했다면, 그 성패에 관계없이, 우리 근대사는 분명 그에 걸맞게 달라졌을 것이다. 또한 식민지화에서부터 파생된 현대사의 온갖 불행 역시 모습을 달리했을 것이다.
상상으로 역사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보면, 동학농민혁명의 역사는 오늘 우리에게 더 큰 의미와 아쉬움을 던지며 다가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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