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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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 론

Ⅱ.이승만 대통령의 약력

Ⅲ.이승만 대통령의 주요 정책들

Ⅳ.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평가

Ⅴ.결 론

본문내용

준법제정(근로여성 보호, 모성보호 명시)등의 성과가 있었다.
2. 부정적인 평가
1) 고집적인 권력욕 추구
1948년 제헌의회에서 만든 의원내각제 중심의 헌법초안을 “대통령제를 채택하지 않을 경우 대통령직을 맡지 않겠다”고 고집하면서 바꿔버렸다. 순전히 자신의 권력욕에서 권력구조를 바꾼 첫 케이스다.
2) 반민특위 활동 저해
친일파를 처벌하기 위해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에 따라 반민특위의 활동이 시작됐으나 그는 불체포특권을 잦고 있던 반민특위 관련의원 6명을 공산당 혐의로 체포해 특위활동을 무산시키고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체시켰다. 이로써 친일파 척결의 민족적 과제는 영구히 사라지고 말았다.
3) ‘발췌개헌’으로 의회민주주의 파괴
1952년 625전쟁과 양민학살사건 그리고 거듭된 실정으로 간접선거에서 재선 가능성이 희박하자, 전시 중인데도 계엄령을 선포해 개헌안에 반대하는 의원 47명을 구속하고 국회의원들을 강압적으로 의사당 안에 들여 보내 개헌안을 통과시킨 소위 ‘발췌개헌’으로 의회민주주의를 철저히 파괴하고 반대세력을 탄압했다.
4) ‘사사오입 개헌’으로 영구집권기도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 철폐’를 골자로 하는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종신집권을 기도, 의회정치를 짓밟았다. 즉, 재적인원 203명 중 202명이 참석한 가운데, 찬성 135표, 반대 60표, 기권 7표로 개헌선인 3분의 2, 즉 136명에 1표 차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135.333에서 0.333도 인간으로 봐야한다며 궤변논리로 가결 처리해버린 것이다.
5) 부정선거의 기틀마련
1958년에는 거듭된 실정과 민심 이반 625전쟁으로 기간 산업시설 파괴(생활물자 태부족), 빈익빈부익부 현상심화로 ‘못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국민 원성이 높아짐
으로 대통령 4선이 어렵게 되자 국가보안법, 지방자치단체장 임명제 등의 법안을 야당의원들을 의사당 밖으로 끌어낸 뒤 통과시켜 부정선거의 기틀을 만들었다.
6) 부당한 정치적 라이벌 제거
1959년에는 정치적 라이벌인 조봉암 진보당 당수를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혐의로 ‘사법살인’을 자행하고 비판적인 언론(당시 야당신문이였던 경향신문)은 재갈을 물리거나 강제 폐간시켰다.
7) 315 부정선거 실시
1960년 종신대통령을 기도하면서 악명 높은 315 부정 관권선거를 획책했다. 이에 항거하는 시민학생들을 공산당으로 몰아 무차별 학살,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Ⅴ. 결론
1. 이승만 대통령 종합 평가
적어도 이즈음이면 광화문이나 여의도공원 어딘가에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동상이 하나쯤 서 있을 법도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못한다. 이는 그가 반공에 기초해 당시 강대국들의 정치적 각축전 아래서 ‘대한민국’을 성공리에 건국한 지도자였지만, 장기집권의 야욕으로 인해 이 땅에 민주주의를 뿌리내리게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학력과 지도자적 자질 그리고 독립운동 경력으로 인한 카리스마로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권력 연장을 위해 친일 세력에 대한 과도적 비호와 강압적 정치공작으로 그의 권력은 도덕성에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그에게 주어졌던 카리스마적 권위를 합리적인 국가 경영에 적절하게 활용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건국 초기에 필요한 국민 통합과 민주주의 제도의 정착을 기대만큼 이뤄내지 못했다. 또한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최고의 학식과 경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법적권위주의적폭력적 정치 행태로 일관해 장기 집권을 시도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엔 그를 국부로 존경하며 그가 도입한 민주주의를 배우면서 성장한 청년과 학생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하야를 당했다.
이번의 평가 결과는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질 분야 총괄 3위(56.95점)를 차지했지만, 업적분야 총괄은 전체 8명중 6위(51.84점)로 하위권에 머물렀다.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자질은 떨어지지 않았지만, 자질을 현실화시킨 업적 면에서는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는 정치행정, 외교안보통일 분야에서는 각각 4위와 3위로 평가를 받았지만, 경제(5위, 44.31점)와 교육과학기술(6위) 그리고 사회복지 부문(7위)에서는 하위 수준의 평가를 받았다. 결국 그가 미국의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나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초대 수상처럼 후대에도 존경받는 국부가 되지 못한 것은 건국 초기 그가 지녔던 카리스마적 권위를 장기 집권을 위해 남용했기 때문이다. 한국대통령평가위원회. (2002). 『한국의 역대 대통령 평가』. 조선일보사. p114~115.
이에 반해 초기 워싱턴 대통령의 경우에는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기본적 시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워싱턴도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의회에서 선출되어 뉴욕시에서 취임 선서를 했다. 워싱턴 대통령이 통상 링컨 대통령 다음으로 위대하게 평가되는 것은 그가 초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국가의 기틀을 만들면서 대통령의 위치를 확고히 하여 후임자들에게 좋은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즉 초대 워싱턴 대통령이(1789~1797)이 1회 연임한 후 물러난 것이 관례화 되었다. 그랜트 대통령이 3선을 시도하여 실패한 예는 있으나 워싱턴 대통령 이후 1회 연임 선례는 헌법의 창시자들이 두려워한 ‘헌법적 군주’의 출현을 피하기라도 하듯이 150년간 불문율로 지켜져 왔다. 우리의 경우에도 이승만 대통령이 1회만 역임하고 나라의 기틀을 잡은 후 후임자에게 평화적인 선거를 통해 정권을 이양했다면 역사적인 평가가 지금보다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참 고 문 헌
한국대통령평가위원회한국대통령학 연구소, 한국의 역대 대통령 평가, 조선일보사, 2002.
로버트 올리버, 황정일 옮김, 이승만 -신화에 가린 인물-, 건국대학교 출판부, 2002.
김도연, 알기쉬운 한국현대정치사, 공동체, 1988.
최평길, 대통령학(제2판), 박영사, 2002.
최한수, 한국정치의 이해, 건국대학교 출판부, 1999.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한국현대정치사, 집문당, 1997.
연시중, 한국 정당정치 실록, 知와 사랑, 2001.
김학준, 한말의 서양정치학 수용 -유길준안국선이승만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출판부,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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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5.12.31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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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3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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