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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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4.19 혁명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관련 자료 조사

Ⅱ. 보고서
1. 4.19 혁명의 원인
2. 4.19의 전개과정
3. 4.19의 정신과 의의
4. 4.19혁명의 한계
5. 이승만 정부의 반민주적 작태
6. 대한반공청년단
7. 4.19혁명의 계승
8.자신의 견해

본문내용

포괄할 수 있는 전면적 혁명이 아닌 정치적 혁명에만 국한되어 나타나게 한 가장 큰 요인이 되는 것이다.
(5)구심체의 결여
4.19를 지속적이고 효과적으로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그 이념을 정치제도화 시킬 수 있는 담당 구심체가 필수적으로 학생층과 직접 연간을 갖는다 해도, 학생층의 주장을 대변하고 이끌 수 있는 정당과 같은 구심체가 없었고, 이를 순수한 학생들이 조직하고 결성하기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은 학생층의 이념이 구체성과 현실성을 결여했다는 점과 기존정당의 부패와 이념 결핍, 그리고 4.19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려고 한 계층도 없었던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5. 이승만 정부의 반민주적 작태
첫째, 이승만은 철저히 사인적 권위주의체계(Privatized or Personalized thoritarianism)를 추구하였다. 민중을 억압하면 자기 개인적 권력욕을 추구해 왔었다.
둘째, 민중의 빈곤과 가난을 권력조작에 이용해 왔다. 아직 정상적인 민주주의로 가기에는 멀었다는 거짓말을 일삼았다. 부정투표의 관행화, 관권선거, 환표 등으로 민주주의 기본을 배제해 왔다. 이로써 내재적 혁명의 씨앗을 키워왔다.
셋째, 6.25 참상을 겪은 민중에게 갖가지 반공의식 교육과 진보당 탄압, 반공관련법령의 제정 등으로 반공규율사회를 축성해 왔다. 각종 정치파동 때마다 경찰, 반공청년단, 백골단, 땃벌떼 등이 동원되었다. 억압적 국가기구(repressive state apparatus)와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ideological state apparatus)를 총동원하여 민중을 반공 망 속에 가두어 두었다.
넷째, 이러한 반공규율 사회는 보수적 논리의 타당성만을 용인함으로써 진보적 정향을 차단하는 정치문화의 파행성을 노정시켰다. 따라서 이승만 정부는 전상국가가 아닌 예외국가, 국가주체가 없는 국가객체만이 존재하는 기형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정은 결국 지배정당성(legitimacy)과 민주주의 동일성(identity)에 대한 파괴로 진단되기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학생들의 이의제기가 4월 혁명으로 표출되었다. 당시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 불렀는데 그것은 농촌자녀들이 살림의 큰 몫인 소를 팔아 대학에 진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골탑의 대학생은 당시 전체국민의 70%를 차지한 농민들의 뜻을 대변한 세력이었다. 4월 혁명은 이들 대학생들의 동의(動議)에 의해 촉발되고 다수 국민들의 지지로 성취되었었다
6. 대한반공청년단
자유당(自由黨)이 1960년 3.15 정부통령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조직한 선거전위대. 단장은 신도환(辛道煥)이었다.
1959년 6월 정.부통령후보를 지명한 자유당은 그 뒤 치밀하게 선서조직을 확대해나가면서 전 공무원 및 경찰력을 선거운동에 투입하고 막대한 자금의 살포와 깡패조직까지 동원하였다. 이때 선거전위대로 동원된 깡패조직이 바로 대한반공청년단과 반공예술인단이었다.
선거가 종반기에 접어들자 경찰의 간섭과 반공청년단원들의 테러행위로 선거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졌고, 3월 9일과 10일 전라남도 여수와 광산(광주)에서는 민주당 간부들이 구타, 치사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민주당이 14일 집계한 것에 의하면 테러희생자 수가 56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 전대미문의 부정선거결과는 자유당정권의 붕괴를 가져왔고, 이 선거에 동원되었던 각종 정치깡패조직들은 4.19와 5.16을 거치면서 사라졌다.
7. 4.19혁명의 계승
(1)시민혁명으로서의 의미
4.19묘지를 국립묘지로 만드는 준공식에서 대통령은, "시민들이 즐겨 찾는 이곳이 독재와 불의에 항거하는 민주주의 정신을 배우는 산 교육장이 될 수 있도록 정성껏 가꾸어 주기 바란다."는 연설을 하였다. 4.19혁명은 정치적으로 민주시민 혁명으로서 독재정권을 시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쾌거였다. 이를 계승하여 사회 여러 부분을 지속적으로 민주화해 나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2)평화 통일의 의미
국토와 민족의 분단으로 인해 우리나라는 엄청난 분단 비용을 감수해 왔다. 분단 현실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도 생겨났고, 젊은 세대들은 통일에 점점 무관심함 성향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1961년 4.19혁명 1주년 기념대회부터 본격화된 통일 열망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4.19는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주의 운동으로 출발했으나 민주당 정권이 수립된 후에는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외치며 우리 민족의 최대의 고통인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 운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분단이라는 걸림돌을 제거하고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
8.자신의 견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419혁명. 보통 이 사건을 생각할 때 함께 떠올리는 것은 315 부정선거와 독재타도, 자유민주주의 확립 등일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419혁명은 이승만의 독재정권에 항거한 혁명이었다. 비록 구체적 자유주의가 아닌 추상적 자유주의였다는 점과 농민, 어민, 노동자 등 모든 민중의 참여가 아닌 학생들과 일부 지식인들이 일으킨 혁명이라는 점에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그것을 얻으려 노력했다는 점, 또한 더 나아가 그것을 성취했다는 점에서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현재 학생의 신분이고, 이제 18세, 성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와 있다. 그런데 내가 과연 이런 불의의 사건이 터졌을 때 이들처럼 용감하게 항거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아니 솔직히 좀 두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느낀다. 그들의 희생으로 힘들게 얻은 민주주의가 아닌가? 그들이 우리에게 이런 사회에서 살수 있게 해주는 선물을 주었다면 이것을 지키는 것은 그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이에 우리는 4·19혁명이 지니고 있는 역사적 성격과 그 의의를 규명하여, 자유민주주의가 이 땅에서 흔들려 뽑히지 않도록 깊게 뿌리박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들을 포함한 여러 민주주의의 확립을 위해 희생한 다른 사람들을, 위대한 혁명 인사로서 우리 머릿속에 영원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키워드

419,   4.19,   혁명,   이승만
  • 가격2,3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6.05.07
  • 저작시기2006.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348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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