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문화대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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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제1장 서론
모택동의 사회주의 사상(문화대혁명과 관련하여)
모택동파와 유소기파

▪ 제2장 본론
1.문화대혁명의 발생 배경
2.문화대혁명의 전개 과정
3.문화대혁명의 성격

▪ 제3장 결론
1.문화대혁명의 결과
2.문화대혁명의 영향(및 평가

본문내용

인민들 속에도 심각한 파벌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문화혁명 기간에 서로 반대 입장에 있던 사람들이 같은 작업장에서 함께 일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며, 그런 일은 그들이 일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인류 역사상 자신이 만든 체제를 부수려고 그와 같이 엄청난 대중의 힘을 동원한 지도자는 결코 없었을 것이다. 그 체제에 가해졌던 폐해는 심각한 것이었으며 마오쩌둥이 궁극적으로 달성하려고 했던 목표는 실현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2.문화대혁명의 영향
1. 경제적
中國의 근대화를 30년 후퇴시켰다.「역사결의 주석본」에 따르면 우선 文革 기간 중 홍위병이 자행한 학대행위의 결과로 숨진 사람은 40만 명으로 추산된다. 毛澤東의 아내 江靑(강청)을 중심으로 한 4인방은 70만 명 이상을 비방·박해했으며, 그 가운데 3만5000명을 죽게 만들었다. 또한 수많은 인민이 육체적·정신적 불구가 되었고, 자살하기도 했다.
중국의 경제를 10년 이상 후퇴시킨 대 재앙이었다.
2. 사회적
ㄱ. 예술에 관한 영향: 문화대혁명이 일어난 후 공산당은 종례의 경극이나 모든 예술들은 자본주의의 병폐라고 여겨 예술인들이나 지식인들을 투쟁의 대상으로 삼고 모두 배척시켜 버렸다. 중국 영화 폐왕별희와 인생에 잘 나타 있는데 폐왕별희에서 경극배우였던 주인공은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모두 홍위병들에게 잡혀가 투쟁의 대상의 되어 자아비판을 하는 고초를 겪는다. 문화혁명이 되면서 모든 예술은 위대한 지도자 모택동을 찬양하는게 주된 내용이 되고 혁명과 관련된 내용으로 바뀌게 된다. 노래도 혁명가 마오쩌뚱을 찬양하는 노래로 바뀌게 되고 영화에도 다 노동자들의 출연하여 혁명을 주제로 한 영화로 바뀌게 된다.
이처럼 오직 마오쩌둥을 위한 예술이 나온다. 하나의 획일성으로 모든 것이 정지되어 있는 것이다.
ㄴ. 교육에 끼친 영향 자유 아시아 방송
: 문화 대혁명은 특히 교육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습니다. 왜냐면 66년부터 10년 동안 계속된 문화 대혁명 기간 동안 정부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못하게 했습니다. 이로 이 당시의 중국인의 실력은 겨우 중학생이 될까하는 정도였다. 공부보다는 정치적 학습과 활동을 강요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 역시 날마다 정치적 학습을 하느라고 공장에서 일을 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공장은 제품을 생산할 수 없었습니다.
ㄷ. 중국인들의 심리상태에 영향: 중국인들의 심리상태에 미친 영향은 더욱 뿌리 깊음. 예컨대, 아무도 남의 일에 개입하려하지 않으려 함. 자신에게 똥물이 튈까봐. 길가에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소매치기 도둑 성폭력 폭행이 일어나도 구름같이 몰려서 구경만 하고 있을 뿐, 위험한 상황에서 철저히 방관자로만 존재. 등등. 문화대혁명의 상흔이 중국현대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음.
ㄹ.여성들의 인권 상승.: 어찌 보면 문화대혁명은 남성들의 ‘수난시대’라고 표현될 수 있다. 당시 유교와 공자를 철저히 비판하고 척결하려던 데에서 알 수 있듯이 문화대혁명은 기존의 모든 관습과 전통을 철저히 부정했다. 당연히 역사적으로 중국 사회를 지탱해왔던 전통적인 가부장제도 역시 혹독한 비판대상이 됐으며, 당시 모택동은 아직 어리고 대부분 문화수준이 낮은 홍위병을 선동 동원하여 문화대혁명의 추진력으로 삼았다. 동시에 마오쩌둥이 중시하고 동원 대상으로 삼은 또 다른 계층이 바로 여성들이었다. 특히 기득권층은 남성 위주였기 때문에 그 ‘기득권적’ 남성들을 공격하는 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기득권을 가질 수 없었던 여성들이 많은 ‘활약’을 보였던 것은 당연했다. 여기에 모택동의 처인 장칭(江靑)이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다는 사실도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기득권이 무너지는 10여 년의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성들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상승하게 되었던 것이다.
* 평가
평가사례 <신문기사>
中 문화대혁명 40주년… 극단행동 불씨 될라 ‘조용한 대륙’ 국민일보 2006-05-14
중국 대륙을 10년간 혼란 속으로 몰아넣었던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지 16일로 40주년을 맞는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어떤 기념행사도 계획하지 않았고 관영 언론도 한결같이 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경제 성장의 부작용으로 빈부 격차가 날로 심화되는 상황에서 문혁과 마오쩌둥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해진다면 또 다른 극단주의 운동으로 이어질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침묵의 이유는=쩡칭훙 국가부주석은 최근 비공개 회합에서 “문혁에 관한 기념행사는 사회 안정을 해치고 경제 개혁에 역효과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모택동이 추구했던 ‘농민·노동자의 천국’은 지금 실직자가 수백만명에 이르는 불평등의 땅으로 변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해에만 400만명이 중국 각지에서 사회 불만 시위를 일으켰다. 이들 불만 세력이 문혁과 마오의 이념을 자신들의 불평등을 타파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중국 지도부의 판단이다. 하지만 국가의 지도이념과 정권의 정통성 유지 차원에서는 모택동 전면 부정할 수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논쟁 자체를 피하고 있다.
후 국가주석을 중심으로 한 4세대 지도부는 마오를 극단적으로 매도하는 모순에 빠지지 않으려고 “문혁을 발동한 마오의 좌경적 과오는 사회주의 궤도에서 이탈한 것으로 모택동사상과는 완전히 구별해야 한다” 는 인식을 갖고 있다. 결국 문혁에 대한 현 지도부의 입장은 마오의 사상은 여전히 사회주의 중국의 정치이념이라는 것이다.
◇“논쟁으로 극복하자”=1966년 5월25일 당시 베이징대 루핑 총장을 비난하는 대자보를 붙여 문혁의 물꼬를 튼 녜위안츠 전 베이징대 경제학과 부주임은 최근 영국 일간 더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거대한 재앙이었던 문혁에 대해 활발히 논의해야 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인민들에게 문혁을 이해시키기 위해 자살하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했다.
일부 중국학자들은 “문혁에 관한 논쟁을 억누르기만 하는 당국의 입장은 잘못된 것이며, 그런 억압이 문혁과 같은 재앙을 다시 초래할 수도 있다”고 우려한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쉬요우위 철학교수는 “아픈 과거와 직접 맞닥뜨리는 것만이 역사의 반복을 피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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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7.07.02
  • 저작시기2007.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18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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