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 답사경로
Ⅲ. 무덤과 역사 그리고 백제
1. 인간과 고분
2. 백제 한성시대와 당시의 고분
Ⅳ. 방이동 백제 고분군
1. 한강에서 방이동 백제고분이 갖는 의미
2. 방이동 백제고분의 특징(석촌동고분과의 비교)
3. 방이동 백제고분을 통한 당시의 백제 시대상
Ⅴ. 석촌동 백제 고분군
Ⅵ. 고분에 반영된 백제 한성도읍의 사회상
1. 한성도읍 전기
2. 한성도읍 후기
Ⅶ. 맺음말
Ⅱ. 답사경로
Ⅲ. 무덤과 역사 그리고 백제
1. 인간과 고분
2. 백제 한성시대와 당시의 고분
Ⅳ. 방이동 백제 고분군
1. 한강에서 방이동 백제고분이 갖는 의미
2. 방이동 백제고분의 특징(석촌동고분과의 비교)
3. 방이동 백제고분을 통한 당시의 백제 시대상
Ⅴ. 석촌동 백제 고분군
Ⅵ. 고분에 반영된 백제 한성도읍의 사회상
1. 한성도읍 전기
2. 한성도읍 후기
Ⅶ. 맺음말
본문내용
후기
한성도읍 후기에는 이전시기의 고분과 크게 탈피하여 새로운 것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적석총이 등장하여 사용되는가 하면, 점차 횡혈식 석실분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적석총은 외형을 장대하게 조성하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이 묘제는 지배층의 묘제로 보고 무덤 자체에 그들의 사회·정치권력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는 고총고분의 조성이 정치권력의 성장과 비례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해당 사회의 성장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고대사회에서 고총고분의 출현은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고분문화의 특징은 고총고분의 조영에 있고, 이들의 등장은 삼국시대 각국의 정치권력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백제의 적석총도 백제라는 고대국가, 즉 막강한 정치권력을 갖고 있는 지배세력의 등장과 그 존재를 연상케 하는데 문제가 없다.
백제의 적석총은 그 묘제의 연원이 고구려에 있는 것으로 본다. 다만 백제의 적석총이 고구려 적석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고구려의 적석총은 압록강 중류지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3~2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이것이 봉토석실분으로 전환되는 4~5세기 대까지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묘제는 구조속성도 매우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고구려의 적석총 중에서 백제의 기단식 적석총과 같은 유형은 후대의 발전된 형식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이 적석총이 사용되던 시기에 도읍지역에 다시 새로운 묘제로 횡혈식 석실분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횡혈식 석실분은 한동안 적석총과 함께 사용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도읍지역의 유일한 묘제로 횡혈식 석실분이 정착되는데, 그 배경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다. 이는 4~5세기 대에 백제의 지배층이 교체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동일세력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묘제에서 새로운 묘제로 교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적석총에서 횡혈식 석실분으로의 교체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이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묘제가 교체되는 것은 구성세력의 교체가 아니라 신문물의 수입과 전개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Ⅶ. 맺음말
근기문화권 중 특히 한강유역은 우리 역사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 역사와 늘 함께 한 지역이다. 또한 지금의 우리도 이곳을 수도로 하여 터전을 잡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터전을 이용하며 살아가기에 급급할 뿐이지 이곳이 과거에 어떻게 발전해 왔고, 과거에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과거의 모습을 보려주려 해도 이익을 위해 우린 그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이 과거의 모습위에 우리의 문명을 세우기 바쁘기만 했다. 때문에 지금 여기서 고대사에서 근기문화권이 가지고 있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걸어가는 도로가 그 옛날 누군가의 집일 수 있고, 누군가의 무덤일지 모른다. 우린 이런 과거를 매일 접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젠 고층건물과 도로로 덮어버렸어도 말이다. 지금이라도 발굴된 옛 모습을 보존하고, 앞으로 발견 될 수 있는 옛 모습을 계속 연구하여 적어도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터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남석, 『백제의 고분문화』, 서경, 2002
이남석, 『백제 묘제의 연구』, 서경, 2002
이남석, 『백제의 무덤 이야기』, 주류성, 2004
이학도, 『백제 고대국가연구』, 일지사, 1995
박현숙, 『잊혀진 우리의 역사 백제이야기』,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9.
문화재청 홈페이지
한성도읍 후기에는 이전시기의 고분과 크게 탈피하여 새로운 것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적석총이 등장하여 사용되는가 하면, 점차 횡혈식 석실분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적석총은 외형을 장대하게 조성하는 점을 특징으로 한다. 따라서 이 묘제는 지배층의 묘제로 보고 무덤 자체에 그들의 사회·정치권력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는 고총고분의 조성이 정치권력의 성장과 비례한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해당 사회의 성장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고대사회에서 고총고분의 출현은 정치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고분문화의 특징은 고총고분의 조영에 있고, 이들의 등장은 삼국시대 각국의 정치권력 성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백제의 적석총도 백제라는 고대국가, 즉 막강한 정치권력을 갖고 있는 지배세력의 등장과 그 존재를 연상케 하는데 문제가 없다.
백제의 적석총은 그 묘제의 연원이 고구려에 있는 것으로 본다. 다만 백제의 적석총이 고구려 적석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확인하기는 어렵다. 고구려의 적석총은 압록강 중류지역을 중심으로 기원전 3~2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이것이 봉토석실분으로 전환되는 4~5세기 대까지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묘제는 구조속성도 매우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고구려의 적석총 중에서 백제의 기단식 적석총과 같은 유형은 후대의 발전된 형식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이 적석총이 사용되던 시기에 도읍지역에 다시 새로운 묘제로 횡혈식 석실분이 등장한다. 그러면서 횡혈식 석실분은 한동안 적석총과 함께 사용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도읍지역의 유일한 묘제로 횡혈식 석실분이 정착되는데, 그 배경에 대한 이해는 쉽지 않다. 이는 4~5세기 대에 백제의 지배층이 교체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므로, 동일세력이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묘제에서 새로운 묘제로 교체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적석총에서 횡혈식 석실분으로의 교체가 장기간에 걸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이처럼 오랜 기간에 걸쳐 묘제가 교체되는 것은 구성세력의 교체가 아니라 신문물의 수입과 전개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Ⅶ. 맺음말
근기문화권 중 특히 한강유역은 우리 역사와 함께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우리 역사와 늘 함께 한 지역이다. 또한 지금의 우리도 이곳을 수도로 하여 터전을 잡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터전을 이용하며 살아가기에 급급할 뿐이지 이곳이 과거에 어떻게 발전해 왔고, 과거에 무엇이 있었는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과거의 모습을 보려주려 해도 이익을 위해 우린 그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듯이 과거의 모습위에 우리의 문명을 세우기 바쁘기만 했다. 때문에 지금 여기서 고대사에서 근기문화권이 가지고 있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걸어가는 도로가 그 옛날 누군가의 집일 수 있고, 누군가의 무덤일지 모른다. 우린 이런 과거를 매일 접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비록 이젠 고층건물과 도로로 덮어버렸어도 말이다. 지금이라도 발굴된 옛 모습을 보존하고, 앞으로 발견 될 수 있는 옛 모습을 계속 연구하여 적어도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터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이남석, 『백제의 고분문화』, 서경, 2002
이남석, 『백제 묘제의 연구』, 서경, 2002
이남석, 『백제의 무덤 이야기』, 주류성, 2004
이학도, 『백제 고대국가연구』, 일지사, 1995
박현숙, 『잊혀진 우리의 역사 백제이야기』,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9.
문화재청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