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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화장실의 기능

Ⅱ. 화장실의 예절
1. 처음처럼
2. 사용한 화장지는 변기에 버리자
3. 껌, 침 안 뱉기
4. 화장실에서는 금연
5. 소변기에 가까이 다가가기
6. 화장실 한 줄 서기

Ⅲ. 화장실의 변화

Ⅳ. 화장지의 발전
1. 손가락과 물
2. 손가락과 모래
3. 돌
4. 나뭇잎이나 식물의 줄기
5. 밧줄
6. 대나무 주걱과 나무 조각
7. 나무 껍질
8. 해면, 해조
9. 롤(roll)
10. 종이 수건

Ⅴ. 궁중의 화장실

참고문헌

본문내용

였다. 셀루코튼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원래 이 새로운 소재는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면을 대체하기 위한 것이었다. 셀루코튼은 전시의 야전 병원에서 외과용 붕대로 사용되었다.
Ⅴ. 궁중의 화장실
경운각의 모난 뒷칸은 당시의 욕실이고 그 옆의 작은 칸이 뒷간으로 쓰였다고 추측되는데 마루에는 배설구로 보이는 긴 구멍이 하나 있을 뿐이다. 마루에서 땅바닥은 약 70센티미터 높이의 공간이고 밖에 있는 문 두짝을 열고 보면 그 속에 7센티미터 가량의 네 바퀴(30×70센티미터)가 달린 끌개 한 대가 있다. 끌개 위에는 3센티미터 높이의 칠테가 둥글게 박혀 있는데 그 위에 배설물을 담는 그릇을 얹어 두었다가 밖으로 끌어내는 데 쓰여진 유물같이 생각된다.
대조전은 태종 5년(1450년)에 창건하여 임진왜란 전후에 소실되어 중건되었다. 그러나 1917년 다시 불이 나서 1920년에는 경복궁 교태전을 그곳에 옮겨 개축(改築)하였다.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등 현대식 건축법을 도입한 개화기의 것이었으므로 그 이전의 형태를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도 없다. 다만 여러 개의 방과 구석 욕실과 뒷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궁인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짐작될 뿐이다.
매화틀을 이용하면 대소변 모두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요강 같은 간편한 변기도 함께 사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가(私家)에서도 작은 요강을 바지 속에 넣고 소변을 보았는데 하물며 임금이나 왕비가 겹겹의 아래옷을 다 벗어야 앉을 수 있는 매화틀에서 소변까지 보았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만조백관과 군병들의 옹위를 받으며 장거리를 행차하던 어가 속에서 상감의 생리적 현상은 역시 요강으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가마 속에서 얼굴을 보일 수 없었던 왕비나 이에 버금가는 궁중의 귀인들 역시 요강 같은 그릇을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것은 단지 추측일 뿐 정확한 사료가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김광언 교수의<한국 민속지>를 보면 일반 사가에서는 옛날 \'길요강\'이라는 것이 있어서 두루 이용되었다고 하니 상감의 행차에까지 이용되지 않았을까 생각할 뿐이다.
프랑스의 화려하고 웅장하기로 이름난 17세기 베르사이유 궁전에만 궁인들의 화장실이 없 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궁중 역시 궁신과 각급 궁인들의 칙간음 따로 있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비원 으슥한 곳에 사대부집을 본따서 지은 연결당 행랑채, 마굿간 구석에 남아 있는 유일한 칙간이 제한된 수준의 사람만 쓰던 것으로 보이지만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궁중에 화장실이 없다고 단정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예의를 최고의 가치로 숭상하던 시대였으므로 궁중에서 방뇨했을 리는 없다고 믿어지기에 어떤 형태이든 대소변을 보던 장소는 존재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상감의 생활 주변에 칙간을 아예 없애야 할 이유로, 첫째는 사가(私家)와 같은 방식의 위생 시설을 궁중에 설치한다는 것은 왕의 절대 권위에 손상이 된다는 점과 뒷간의 위생적인 처리 방안이 여러모로 당시 기술로는 미흡했기 때문에 배설물을 즉시 땅에 묻거나 없애는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착간은 없어도 변을 보는 그릇 또는 틀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하던 \'매화(梅花)틀(매우틀)\'과 \'매화그릇(매우그릇)\'이 바로 그런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유물들은 창덕궁 대조전 경운각에서 발견되었다. 매화틀은 높이가 21센티미터, 너비가 39.5센티미터, 길이가 48.3센티미터 정도 되는 목제(木製)로 윗면은 장방형이며, 가운데 역시 장방형의 구멍이 파져있다. 또, 외곽은 엽문(葉紋)주단으로 폭신하게 입혀져 있고 아랫부분 양옆에는 발판이 있고 이 역시 엽문 주단으로 입혀져 있다. 이중 한쪽은 막혀 있지만 다른 한쪽은 터져 있다.
터진 면으로 변을 받는 \'청동제 매화그릇\'을 넣고 빼낼 수 있게 되어 있다. 틀의 규격이 작기 때문에 빼낼 수 있게 되어 있다. 틀의 규격이 작기 때문에 어린 왕자들이 쓰던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보관하고 있는 청동제 매화그릇은 현존하는 매화틀에 맞는 것이 아니다. 현존하는 매화그릇은 큰 어른용으로 높이 12센티미터, 넓이 22.5센티미터, 길이 49.5센티미터의 선형(船形)으로 되어 있다. 매화틀 겉에 입혀진 주단의 무늬나, 직조와 나무를 접합시킬 때 쓰인 핀의 모양으로 볼 때 개화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청동제 매화그릇은 부식 상태가 꽤 심한 것으로 보아 훨씬 이전의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유적으로 남아 있는 왕궁의 매화틀에 앞서 다른 매화틀이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음을 짐작케 한다. 역대의 부유했던 상류층에서도 이런 형태의 변기를 모방하기도 하였는데 강릉의 선교장에 보존되어 있는 변기는 궁중의 매화틀과 매우 흡사하다. 이 변기가 매화틀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바닥이 없다는 것인데 배변후 틀을 들어내고 받침그릇을 처리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민속학자 김광언 교수에 의하면 궁중에서는 매화틀을 담당하는 \'복이나인(지밀나인)\'이 있어 매화그릇에 \'매추\'라는 잘게 썰은 여물을 담아 틀 안에 넣어 두었다가 귀인(貴人)이 쓰고난 다음 여물을 다시 덮고 그릇을 빼내어 처리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프랑스 왕가의 의자식 변기(stool)와 매우 유사한 처리 방법이다. 왕이 쓰던 매화틀은 모두 세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침전에, 그리고 정사를 보는 곳과 신하는 만나는 곳에 하나씩 있었다고 하며 왕비나 왕대비는 각각 두 개씩을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문헌
다니엘 푸러, 선우미정 역(2005), 화장실의 작은 역사, 들녘
박윤남(2001), 화장실 문화의 변천, 아름다운 작은공간, 미소공, 통권15호, 한국화장실문화협의회
송재승(2000), 공중화장실의 개선방향을 위한 대안적 방법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편집부, 전봇대에서 화장실까지, 사민사
야콥 블루메, 박정미 역(2005), 화장실의 역사, 이룸
줄리 L.호란, 남경태 역(1996), 1.5평의 문명사, 푸른숲
Planning OM 주식회사(1994), 화장실이 웃는다, 100가지 해우소 이야기, 사민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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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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