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근대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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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입장
1) 공업분야
대륙침략 병참기지 설치정책
일본자본의 독점화
일제의 통제정책
기술독점
전력생산과 철도부설
2) 농업분야
지주경영과 소작제
토지조사사업
3) 통신분야
경비전화선의 확장
병참기지 정책 하 통신시설의 확충
통신수요 증대와 이용실태

3. 식민지 근대화론의 입장

4. 맺음말

본문내용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 백산서당, p.19
한국의 전체적인 경제규모가 커졌을 뿐 아니라 한국인의 경제규모도 그 이전보다 성장하여 한국인 소유의 공장 수가 증가 한국인 소유의 공장 수가 1910년 39개에서 1938년 3936개로 증가
하고 한국인 공장 노동자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고 한다. 한국인 공장노동자가 1929년 84420명에서 1941년에는 272221명으로 증가
이러한 공장과 회사의 설립과 공장노동자와 기술자로 일한 경험이 해방 이후 경제성장의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식민지기의 경제개발이 한국의 독립 이후의 경제성과에 미친 영향 또한 일제 식민지통치기의 경제를 둘러싼 논쟁거리이다. 앞에서 말한 산업구조의 공업화와 공장노동자 증가 외에 일제시기 한반도에 부설된 철도와 곡물 등을 일본에 운송하기 위한 다수의 항만시설, 도로와 교량, 통신시설 재미있는 점은 일제 식민지 시기 한국의 전기통신 기반 시설은 식민지 시기 이후에도 계속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1940년대 후반 미국 조사에 의하면 남한의 전기통신망이 미국 기준에 의거할 때 많은 점에서 구식이지만 현재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설은 1950년대 625 전쟁에서도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통신 시설이 긴급히 요청되는 가운데 미군은 한반도를 통과하는 지하 ‘펑텐 케이블’이 매우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전쟁 기간 동안 미국 기술자들은 일본의 케이블과 자동 중계 장치 기지국을 수리하여 한국에 파견된 군대를 위한 간선이자 도쿄의 맥아더 장군 사령부와 한반도의 미군을 연결하는 생명선으로써 케이블을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북한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케이블이 북한과 1950년 10월 참전한 중국을 연결하는 주요 통신 연결망으로 사용되었다. 신의주와 평양을 연결하는 케이블 손상 부분을 수리할 여유분이 부족한 상황에서 중국 기술자들은 일본이 만주국과 소련의 경계를 따라 깔아 놓은 무장하 케이블의 일부분을 떼어다 사용하였다.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화폐, 금융, 재정, 토지소유권 등에 관한 제도가 정비되었다.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이러한 변화가 해방 이후에 의미 없이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식민지기의 한국의 공업화가 1960~70년대 고도성장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즉, 식민지근대화론은 신흥 산업국의 출현, 사회주의권의 붕괴하는 변화된 조건 속에서 수탈ㆍ종속 등의 개념으로 한국 자본주의상에 반대하고 경제성장에 주목하며, 경제성장의 기초조건을 식민지 시대에서 찾고자하는 시도에서 등장하여, 이러한 관점에서 1930년대에서 1940년대 초에 걸쳐 추진된 공업화와 그 전제 조건의 형성에 주목하였으며,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계기로 농업부문에서 근대화가 이루어지고, 1930년대에 들어 공업화의 추진으로 제조업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적 산업구조가 형성되었으며 이러한 것들이 해방 이후 한국의 산업화의 기반이 되었다는 입장이다.
4. 맺음말
앞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았다. 근대화는 경제성장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경제+문화+정치+사회적 근대화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경제 성장을 중심으로 일제 통치기 한국의 근대화를 설명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종합적인 역사해석 방법이 될 수 없으며 내재적 발전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한 쪽의 입장은 편중된 해석만을 낳을 뿐이다. 그렇기에 식민지 근대화론과 그를 뒷받침하는 단순한 통계자료만으로 일제에 의한 한국사회의 근대화에 동의할 순 없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일제의 억압과 수탈구조 속에서 놓치기 쉬운 경제적 변화를 밝히고 일제 식민지시기와 그 이후 한국경제를 연장선상에서 파악한 점 등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있지만 실제로 식민지 근대화론이 강조한 것은 단순한 개발과 성장의 강조뿐이다. 일제시대의 개발은 일본인들의 일본인들에 의한 일본인들을 위한 개발이었다. 이러한 결과 한국에는 독립 이후의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정치 집단이 없었으며, 일본과의 분업 관련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한국의 공업 생산은 독립 이후 크게 감소했다. 한국이 본격적으로 전시 체제에 들어가기 직전 연도인 1937년경에 광공업의 비중이 17.4%였지만, 1953년에는 10.1%에 지나지 않았다. 1953년은 한국전쟁의 피해가 거의 복구되어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해방 직후에는 그보다 더 나쁜 상태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사학 제 21호, 식민지기 한국과 인도의 공업화, 1996, p.16
그렇다고 해서 식민지 근대화론의 비판적 입장을 전적으로 지지하지도 않는다. 식민지 근대화론을 비판하는 입장은 식민지 근대화론과 반대로 일제의 한국에 대한 수탈의 측면만을 강조하고 식민지기의 경제성장의 지표들도 일제의 수탈의 목적 하에 모두 묻어버린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했듯이 두 입장 모두 그 자체로만은 불완전하고 편중된 것이기에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화와 그에 따른 한반도의 경제개발의 목적은 기본적으로 한국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한 것이기에 일제 식민지 통치기에 수치상의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하여 그것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20C초 늦은 개항과 서양문물의 도입, 주변국의 상황 등 한국의 입장을 고려할 때 내재적 발전론에도 한계가 있으며 식민지 시기 일본의 근대적인 제도 이식과 공업화 정책, 사회간접자본 건설이 한국의 성장에 자극을 주고 해방 후 한국의 고도경제성장에 크든 작든 하나의 자산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한 측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좀 더 넓은 시각에서 일제 식민지시기 한반도의 근대화에 대해 바라볼 필요가 있겠다.
-참고문헌-
신용하, 「일제 식민지정책과 식민지근대화론 비판」, 문학과지성사, 2006.
신용하,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성찰」, 삼인, 2009.
신기욱 외,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 삼인, 2006.
박섭 외,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해와 비판」, 백산서당, 2004.
경제사학 제 21호, 식민지기 한국과 인도의 공업화,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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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7.22
  • 저작시기200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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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46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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