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상속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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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상속제도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序論

Ⅱ. 本論
1. 朝鮮前期 相續制의 특질
1) 財産에 대한 인식
2) 相續방식
3) 相續 법제와 관행
4)『經國大典』均分相續제의 함의와 영향
2. 朝鮮 中期 相續制度의 변화와 그 원인
1) 相續 대상의 변화
2) 祭祀와 相續制度의 변화
가. 祭祀相續의 변화
나. 財産 相續의 변화
다. 相續制度 변화의 원인
3. 相續制度 변화의 의미

Ⅲ. 結論

【參考文獻

본문내용

子女均分制가 철저했던 17세기 중엽이전에는 아무리 당대 부호라 하더라도 子女가 많은 財主는 그 財産이 그 자녀들에가 분할, 平分되었으니 한때 집적된 財産도 곧 여러 자녀에게 분산되고 말았다. 그렇던 것이 17세기 후반부터 子女差等相續제와 다량의 承重몫이 嫡長子에게 관장되면서 각 가문의 宗家에게 累代 계승된 이른바 萬石君 千石君(실제보다 과장된 표현)이란 大地主가 도처에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성리학적 의례와 윤리의 보급에 따라 承家 奉祀와 接賓客을 강조하는 풍조가 양반사회에 만연되자 財主들이 承重條로 財産을 承重子孫에게 집중 傳係시킴으로서 宗家의 財産이 격증하게 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17세기 후반 子女差等制와 嫡長子단독봉사제이ㅡ 확립과 함께 일반화되어갔다. 『慶北地方古文書集成』
현재 시골에 남아 있는 규모 큰 古家들은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세워졌던 것이며 朝鮮後期 지방의 부호들은 각 가문의 종가에서 많이 나오게 되었다. 물론 17세기 이전에도 大地主가 있었지만 그것이 후기처럼 累代에 계승되지는 못하였다.
Ⅲ. 結論
이상에서 朝鮮前期와 後期에 있어 극명한 차이를 보이는 相續制度가 그 사회 변동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며 그러한 相續제의 변동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朝鮮王朝實錄의 사료를 바탕으로 고찰해 보았다.
우리가 朝鮮사회의 相續제에 관심을 두는 것은 相續制度의 변천 역시 철저히 부계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상(장자중심의 차등 相續)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朝鮮 前ㆍ後其 相續관행에 변화를 주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고찰하는 일은 相續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朝鮮前期와 後期의 사회상의 변화와 그 원인, 그리고 그 사회에 내재된 가치관과 의식을 함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朝鮮社會는 유교주의의 정책을 전 왕조보다 더 강화함으로써 국가의 정치원리로 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이런 유교 이데올로기는 忠孝思想을 강조하였고 특히 孝의 강조는 祖上崇拜 家系尊重의 정신과 기풍을 고양하게 하였으며 자손의 영속과 조상의 祭祀를 인간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도리며 의무로 삼았다. 朝鮮社會는 유교적 정치이념 하에서 삼강오륜을 국가적, 사회적 기본원리로 하고 왕가를 정점으로 하는 귀족과 양반계급을 지배층으로 하는 사회제도와 가장을 절대적 중심으로 삼는 가족제도를 사회적 기반으로 하였던 것이다. 이런 봉건적 이데올로기를 구체화 한 것이 신분제도이며 그에 근거한 것이 바로 相續制度인 것이다. 그리하여 호주나 가장의 권위에 의한 가족의 통솔과 융합의 원리는 곧바로 상전과 예속자간 나아가서 군신간의 원리로서 朝鮮社會를 유지·존속케 하는 기간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공동상속제가 적장자위주와 남자위주의 상속제로 변천해 가는데 있어 농토의 부족과 그 영세화도 그 중요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고 할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봉건 사회적 체제의 유지라는 요청이 보다 큰 요인이었다고 할 것이다.
즉 朝鮮時代 相續의 그 법제와 실제의 차이는 결국 법과 관습에 있어서 관습이 우위가 되어 진행되었으며 관습을 형성시킨 추진력은 고려 말에 도입된 신유학이 朝鮮社會에 정착하는 과정에 있어서 결국 기존의 고려로부터의 相續관행들과 병행되다가 17세기 중반기 이후에야 정착하게 되었다는 것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相續관행의 변화에 영향을 끼친 요인이 물론 유교이데올로기만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위에서 살펴보았듯 朝鮮社會를 형성하는 기저가 바로 유학을 정치적, 사회적 목적에 의해 이데올로기로서 이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相續관행의 방향성은 결국 적장자우대로 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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