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관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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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국근대의 역사관 발달>

< 실학사상의 특징>

<식민지사관>

<반식민주의 사학>

<해방 이후 신민족주의 사학과 1950년대의 식민주의사학 비판 제기>

<1960년대 이후 한국사학-현대 민족주의 사학의 발전>

<한국사학의어떤방향으로가야되는가>

<이러한 많은 역사관중에서 어느것을 따르고 배워야하는가>

<일본안의 우리역사>

<고조선>

<그당시한나라는 굳이왜 고조선을 멸망시키나>

<고구려>

<우리민족사상 최고강력한 국가인 고구려는 왜 멸망했나>

<고구려가 정복국가,강력한 국가가 될 수있었던 이유는>

<고구려는 어느정도로 강성했나>

<백제>

<과연 백제와 왜의 관계는>

<해상천국 백제는 요서지방을 점령했나>

3.신라

<신라는 왜 여왕이 있나>

<신라와 당나라 관계>

<신라의 통일이 우리역사에서의 위치>

<가야>

<철의 최고생산량인 가야>

<가야는 왜 중앙국가를 형성하지 못햇나>

<남북국시대의 역사적의미>

<남북국시대를 바라보는 시각>

< 발해사가 한국사에서 제외된 배경>

3. 발해사가 한국사에 편입된 근거

<발해와 신라가 왜 통일되지못했나>

<발해는 왜 멸망했는가>

<발해가 왜 책에 거의 없었고 우리역사로 포함되지못했나>

<발해는 왜 책이 없을까>

<동북공정과 우리의 자세>

본문내용

들은 모두 발해를 의식한 군사행동이었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또한 발해가 당의 등주를 공격했던 사건(732)으로 인해 신라와 당이 밀착되게 되었다든지, 일본의 신라공격계획(759 764)에 발해가 끼여들어 신라를 협공하려고 했던 사건들 역시 그러했다. 한편 일본의 승려 에닌(圓仁)의 기행문인『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의하면, 신라인들이 8월15일(음)을 기해 3일동안 주야로 가무행사를 폈는데(839), 그 이유인 즉 신라가 발해와의 싸움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니, 두 나라간의 충돌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고 하겠다.
외교적인 측면과 두 나라 지식인들의 태도에서도 서로 치열했던 대결상은 입증이 된다. 최치원이 당 소종(昭宗, 888 904)에게 보냈던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 발해가 신라보다 위에 거하기를 요구했으나 당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음을 감사하는 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내용인 즉 897년 발해 왕자 대봉예가 글을 올려 발해의 국세가 신라보다 강성함을 들어 국명의 서열에 있어 [신라 발해]가 아닌 [발해 신라]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했으나, 당이 이를 거절하고 옛 관습대로 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최치원이 감사의 글을 당 소종에게 쓰면서 발해를 맹렬히 비난했던 것이다. 당의 외국인들을 위해 설치된 빈공과(賓貢科)에서도 신라와 발해는 서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875년 발해의 오소도가 신라의 이동을 제치고 수석합격하자 최치원은 [일국의 수치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라고 하였는가 하면, 906년에는 반대로 신라의 최언휘(신지)가 오소도의 아들인 오광찬보다 상위에 합격하자 당에 있던 오소도가 심하게 항의를 하였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모두가 신라와 발해의 대결상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남북국은 이렇듯 대결만을 하였던 것은 아니다. 몇 번의 교섭기록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발해는 건국기인 700년경과 멸망기인 924년경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협조를 구했던 적이 있었는데, 초기에는 신라가 대조영에게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는 형식으로 발해건국을 인정했는가 하면, 멸망기에는 발해의 구원요청을 응낙하기는 하였으나 결국 돕지 못하고 발해멸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였던 시기는 원성왕(元聖王) 4년(812)이었다. 이들 두 왕은 모두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왕들로서 국내외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발해와의 교섭을 시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헌덕왕11년(819), 당에서 일어났던 고구려계의 이사도반란 토벌에 당의 요청으로 신라군사 3만이 지원된 사건직후부터는, 신 당의 밀착과 함께 남북국은 무력적 대결을 각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732년 발해의 등주공격사건에서도 그랬듯이, 신 당의 밀착이 곧 남북국의 대결심화라는 측면으로 나타났던 사실들은 한국사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겠다.
<발해와 신라가 왜 통일되지못했나>
당나라의 분열정책으로 인하여 발해와 신라는 그들의 대립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곧 남북국이 문화적으로 이질성이 심화되어 대립적 상황이 고착되게 하였다. 아직도 남북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양국 교섭의 한계이기도 하고 끝내 대립 상황을 극복하지 못했던 원인은 첫째, 신라의 경우 양국 교섭의 근본 동기가 진실한 평화 교섭이 아니라, 특정 당파의 정치적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 둘째, 발해의 경우 항상 신라와의 대결을 의식한 나머지, 그들의 신라에 대한 교섭 시기를 안정기가 아닌 건국이나 멸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로 하였다는 점, 셋째, 남북국의 외교가 서로의 교섭을 우선으로 하는 평화 지향적 자주 외교였던 것이 아니라, 당과 일본과의 관계를 우선으로 하는 대립 지향적 외교였다는 점이었다.
<발해는 왜 멸망했는가>
(1) 내부적 갈등
발해는 대인선 통치시기에 내분에 의해 우왕좌왕하던 중,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발해 내분에 의한 자멸'설은 현재까지도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발해 내분설을 뒷받침할 근거는 전혀 없다. 내분설 자체가 추론일 뿐이다. 내분설의 유력한 근거로는 《고려사(高麗史)》 등에 등장하는 '발해 유민의 고려 망명'이 그것인데, 高麗 太祖 8년(925년) 이후 각계 각층 발해민의 망명, 특히 高官과 武官職의 주요 인물들이 대거 망명한 기사가 보인다. 곧 발해 멸망 직전에 발해 지도층 내부에 분열이 일어나, 민심이 이반된 가운데, 일부가 고려로 망명하는데, 이 틈을 이용한 거란의 기습적이고도 대대적인 공세에 결국 발해가 멸망하였다는 주장이다.
(2) 화산폭발
백두산 화산폭발설로 발해가 멸망했다는 설이 있지만 이 설의 진앙지인 일본에서도 이미 부정적 견해가 나왔는데도, 우리 는 이 설을 재활용하고 있음은 아이러니컬하다. 폭발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고, 발해 상경용천부 일대에 광범위하게 사용된 용암들이란 폭발 시 점이 역사시기 이전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3) 기후한랭
계속적인 한랭기후로 인하여 농산물 생산에 타격을 입어 발해가 멸망했다는 설이 있다.
<발해가 왜 책에 거의 없었고 우리역사로 포함되지못했나>
발해사에 대한 자료가 거의 없었고 중국이 개방전까지 자유롭게 드나들어 연구할수없었다
그리고 발해 스스로 쓴 역사책을 거의 없었다
<발해는 왜 책이 없을까>
의문이 아닐수 없다 문자가 없는것도 아니고 해동성국이라 불리우는 뛰어난 문명의 국가에서 책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멸망으로 인해서나 그후 그위에 세워진 국가로 인한 없어지지 않았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근거 없음)
<동북공정과 우리의 자세>
과연 중화주의의 중국이라 할 수 있다 중국에 조공을 바치거나 관계에 있는 모든나라는 자기나라라는 생각이다 말이 안된다. 누구를 기분으로 말하는가 사실 중국내 한족은 별로없다 오랜세월을 거쳐 한족화 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중국에서 한족이 지배했던 시절은 별로없다 거란의요 여진의금(청),우리의 고구려 발해 훨씬많은 지역과 시간을 지배했다 이러한 근거로 봐서 차라리 지금중국의 지역에 많은 국가가 형성되었고 그중에 한족도 있었다는 것이 정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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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31
  • 저작시기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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