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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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들어가며

2. 영친왕의 생애

가. 유년기와 결혼 전까지

나. 결혼 후부터 해방 전 까지

다. 해방 후부터 서거하시기까지

3. 영친왕과 관련된 인물들

가. 부친 고종임금과 모친 엄비

나. 태자대사 이토 히로부미

다. 두 형님 순종임금, 의친왕과 동생 덕혜옹주

4. 영친왕에 대한 평가

5. 끝맺으며

본문내용

.249~253 참고.
이전에 도쿄 아카사카의 영친왕부부의 저택을 대한민국 주일대사관저로 싼값에 팔라는 말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들으신 영친왕께서는 그렇게 하겠다 하셨으나 한국 정부에서 대금지급도 하지 않은 채 차일 피일 미루기만 하였고, 생활고에 시달리시던 영친왕께서는 일본 참의원 공관으로 저택을 임대하셨다. 김을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페이퍼로드, 2010, p.244~248 참고.
이 일도 있고, 이승만 정부에서는 영친왕이 대한민국의 여권을 발급받아 미국에 가서 ‘프린스 오브 코리아’라고 불리게 될까봐 이를 달가워하지 않은 탓에 여권 발급이 어렵다고 하였고. 위와 같은 책, p.251~252 참고.
이 와중에 두 분은 아드님의 졸업식 날짜에 맞추어 출국하시기 위하여 일본으로 국적을 바꾸시고 여권을 발급받게 되신 것이다. 위와 같은 책, p.33~37 참고.
영친왕께서 일본으로 귀화하실 생각이 아니신 탓에 미국에서 도쿄로 돌아 오시자마자 다시 국적을 환원하려 하셨지만, 국적을 바꾸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위와 같은 책, p.252~254 참고.
환원시킬 방법은 영친왕부부가 한국으로 귀화하시고 한국 국적을 얻으신 후에 다시 일본으로 가지 않으시면 일본 국적이 자연히 소멸되는 방법뿐이었다. 한국 정부 측의 영친왕부부 환국에 대한 방관과 비협조로 이방자여사가 일본에 영주할 계획이 있으시다는 오해가 있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방자여사의 이러하신 행동도 영친왕의 환국을 달가워하지 않는 한국에 돌아가서는 윤대비께서 낙선재에서 쫓겨나셔 정릉의 남의 집에서 군색한 생활을 하시듯 영친왕께서도 그러한 상황에 놓이게 될까 하는 염려에서 였던 것이다. 위와 같은 책, p.263~274 참고.
이방자여사가 나쁜 마음을 먹으시고 그와 같은 행동을 하셨더라도 우리 정부측 태도를 알고 나면 욕을 할 수 없는데, 이방자여사의 진의를 알고 나니 이방자여사 또한 일본인이시지만 완전한 조선의 황태자비가 되시어 여필종부의 끝을 보여주시는 부분이 아니었나 싶다. 부부는 닮아간다고들 하는데, 두 분께서는 실제로 생김새도 좀 닮으신 듯 하고, 또 서로의 좋은 점만 닮아 가신 듯 해 뿌듯했다.
끝맺으며
영친왕은 1960년, 미국인 여성과 결혼한 아들을 보려 다녀오신 후 위와 같은 책, p.284~285 참고.
기력이 급격히 쇠해지셨는데, 고혈압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1961년 초 부터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셨다. 위와 같은 책, p.307 참고.
5·16으로 정권을 은 박정희정부는 영친왕이 병원비 마련조차 힘들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황급히 특사를 파견하여 최고급 치료를 받게 하였고, 위와 같은 책, p.299~300 참고.
덕혜옹주께서는 이듬 해인 1962년에, 위와 같은 책, p.301~306 참고.
영친왕부부는 1963년에 드디어 조국으로 오시게 되셨다. 위와 같은 책, p.316 참고.
영친왕께서는 병석에 누워계실 때 고국에는 누구의 부축을 받으며 가기 싫으시고 자신의 발로 직접 땅을 밝겠다고 하셨지만, 병상에 누우신 채 귀국을 하셨다. 위와 같은 책, p.321~322 참고.
영친왕은 1970년 5월 1일, 73세가 되시던 해에 아무런 괴로움 없이 마치 잠을 주무시듯 눈을 감으셨다. 위와 같은 책, p.318~321 참고.
일본에 볼모로 가시기 전 아버님이시던 고종임금께서 영친왕께 ‘일본에 가거든 기쁘거나 슬프거나 얼굴에 드러내지 마라’고 타이르셨다는데, 김을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페이퍼로드, 2010, p.331 참고.
그 덕에 영친왕은 평생을 과묵하게 사셨고, 가시는 날에도 유언 한 마디 하지 않으셨던 것 같다. 죽는 날까지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았던 효자이셨던 것이다. 영친왕비 이방자여사께서는 약 20년을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시며 장애우 봉사활동에 전념하시다 1989년 4월 30일, 영친왕의 기일 하루 전 날 돌아가셨다. 위와 같은 책, p.334 참고.
국적은 한국인이시지만, 일본의 피가 흐르는 자신의 마음속의 부채를 갚는다 생각하시며 한국의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느라 힘쓰셨다. 두 분의 아드님이시자 조선왕조 제 29대손이신 이구공은 후사 없이 몇 해 전인 2005년에 지금은 도쿄의 최고 전망 좋은 호텔이 되어 버렸으나 자신이 나고 자라신 아카사카 프린스호텔에서 돌아가셨다. 위와 같은 책, p.334~335 참고.
요즘같은 시대에 왕의 후손이 무슨 소용이냐 할 수도 있겠지만, 영친왕가족은 어찌 보면 가장 불운하셨던 왕족이셨고, 관심 밖의 왕족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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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12.14
  • 저작시기20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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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643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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