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史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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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고[史庫]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사고[史庫]

적상산사고[赤裳山史庫]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춘추관사고[春秋館史庫]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

태백산사고 [太白山史庫]

마니산사고[摩尼山史庫]

묘향산사고[妙香山史庫]

전주사고[全州史庫]

규장각[窺巖面]

[실록의 편찬과정]

[실록의 보관과 재간]

본문내용

청의 기록인 〈각사등록 各司謄錄〉·〈승정원일기〉 등 각 개인의 일기·문집도 편찬 자료로 이용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등록〉·〈일성록〉도 자료로 사용되었다. 각 방의 당상과 낭청(郞廳)은 이들 자료를 수집하여 연·월·일순으로 분류한 다음 편년체 형식의 실록 초초(初草)를 작성하여 도청에 넘긴다. 도청에서는 낭청에서 작성한 초초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거나 보충하여 2차 원고인 중초(中草)를 작성한다. 중초를 바탕으로 총재관과 도청당상이 교열하여 문장과 체제를 통일하고, 최종적으로 수정·필삭(筆削)하여 정초(正草)를 만들게 된다. 이 정초본으로 실록을 인쇄하여 사고에 봉안하게 된다. 실록의 기본자료로 이용한 사초나 초초·중초·정초는 모두 물에 씻어 없애는데 이것을 세초(洗草)라고 한다. 세초는 실록편찬에 소요된 종이의 양이 많기 때문에 그 종이를 다시 사용하기 위한 것이다.
[실록의 보관과 재간]
조선 초기의 태조·정종·태종의 3대 실록은 처음에는 각각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서울의 춘추관, 1부는 고려시대부터 실록을 보관했던 충주사고(忠州史庫)에 보관했다. 그러나 실록을 장기간 보존하기 위해 1445년(세종 27) 다시 2부를 등사하여 전주와 성주(星州)에 새로운 사고를 설치해 1부씩 보관했다. 〈세종실록〉 이후는 매 편찬시 활자로 인쇄하여 위의 4곳 사고에 보관했다. 그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춘추관·충주·성주에 보관했던 실록이 불에 타 소실되고, 전주사고의 실록만 남게 되었다. 이것을 내장산에 옮겼다가 이후 해주·강화도·묘향산 등지로 옮기면서 보관했다. 1603년(선조 36)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태조에서 명종까지 13대 실록 804권을 3부씩 출판하여, 최종 교정본 및 전주사고의 원본 실록을 합쳐 5부를 만들었다. 또한 사고를 강화도 마니산, 경상북도 태백산, 평안북도 묘향산, 강원도 오대산에 설치하여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선조 때 출판된 신인본(新印本)을, 마니산에는 원본인 전주사고의 실록을,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보관했다. 그후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으로 서울 춘추관의 실록이 소실되었다. 또한 1633년 후금(後金)과의 관계가 악화됨에 따라 조선정부는 이를 염려하여 묘향산사고를 적상산(赤裳山)으로 이전했다. 마니산 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으로 크게 파괴되었으나 현종 때 완전히 보수되었다. 그후 마니산사고는 1678년(숙종 4) 강화도 정족산(鼎足山)에 신설한 사고로 이전되었다. 인조 이후의 실록은 4부를 인쇄하여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 사고에 보관하여 조선왕조 말년까지 계승되었다. 1910년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정족산본·태백산본은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어 종친부 건물에 보관되었고, 적상산본은 창덕궁 장서각(藏書閣)에 보관되었다. 오대산본은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으로 이전되었으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총독부에 이관되었던 정족산본·태백산본은 1929년 규장각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에 이관되어 보관되었다. 적상산본은 6·25전쟁 당시 북한측에서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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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18
  • 저작시기2007.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67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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