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레포트-16세기 이후의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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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 레포트-16세기 이후의 조선시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서울 중간계급이며 새로운 도시문화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양반지향적이었다. 오히려 양반으로 가는 길이 단절되었으므로 양반류·양반화를 즐겼는데, 양반의 모임인 시회(시사) 결성을 모방하여 제한된 관료의 길을 문화로서 진출한 것이다. 그들은 지배층의 가치체계인 성리학과 다른 성향을 가진다. 작품세계가 남녀 애정이나 신분동향 등을 주요 내용으로 삼았다. 그들은 여항문화를 형성하는데 문화 예술적 욕구의 증대와 유흥문화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집안을 장식하는 장신구가 유행하고, 김홍도의 그림이나 가옥·그릇·복식 등이 최신의 유행을 선도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는 서점이 크게 유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서적 중개상 책쾌, 서쾌로 유명했다. 대표적 거간꾼은 조신선으로 책의 거래를 담당하였고 이는 서책 공급 수요가 양반 사대부에 집중되었고 정부에 의해 통제된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경제적·시간적 여유가 있고 한글을 읽을줄 아는 여자나 서민도 독자가 되었고, 상업성 있는 책을 통해 유통시장을 확보하면서 출판업을 발달시킨 공급자가 있었다. 이를 세책이라 하는데 식자층이 증가하면서 독서층문화는 도시발달, 민중의식 성장과 맞물려 영리를 목적으로 간행된 상업적 서적인 방각본이 발달하는 등 직접적 독자층이 증가하면서 책이 상품화 되었다. 심지어 가짜 작품이 유행하는등 양반문화를 끊임없이 모방하면서 바둑·화훼·서책·골동품 수장 등 자신들도 나름의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였으며, 서울에 새로운 구성원으로 위치를 확보한다. 그래서 양반문화를 모방하면서 양반이 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도시·상공업 발달에 맞추어 문화를 형성했다. 여항문화의 특징은 유흥문화로 부 축적이나 남녀의 애정을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당연시하였다. 그래서 술·매춘·음식 등의 풍류를 즐기는 것이 발달하고 놀이문화가 발달하여 예능인도 생겨났다. 대표적으로 판소리를 집대성한 신재효나, 도시 가면극, 이야기꾼이 나타나는 등 상품화폐체제의 발달과 관련있다. 도시문화발달에는 안동김씨 김조순처럼 경화세력이 경제적 후원자 역할을 하며 여항인과 친교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는 농업중심·유교중심의 중세사회가 새로운 변화의 태동기로 이해할 수 있다.
19C 한국사학사도 서얼·향리·중인·서민·천민의 전기가 전개되고, 양반지향적인 것이 차단된 상태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는 새로운 역사학 저술 양상이 나타난다. 역사학을 하는 사람이 전통적 유교 정신의 양반이 아닌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서얼의 역사인 <규사>, 향리의 역사를 정리한 <연조귀감>, 중인의 전기인 <호산외기>, 유재건의 <이항견문록> 등을 통해 양반 유학자들이 전할 수 없었던 다양한 역사서가 출간되었고 이는 지배층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나 여항의 움직임과 맞물려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즉, 비양반이 새로운 역사를 쓰면서 역사도 양반중심관점에서 탈피하여 근대 사회로 이행하였고, ‘주체에 대한 자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후기에는 새로운 사상으로 실학이 대두한다. 이는 허학의 반대로 실질적인 학문이다. 물론 이를 통시대적·한시대적으로 보는 배경에 따라 이해가 달라지지만 조선후기의 시대적 산물로 현실에 대한 자각과 반성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학문이자 새로운 인식론이다. 내적으로 국가위기 극복하고 민중을 구제하며, 외적으로 국제정세에 대처할 수 있었다. 실학은 학술과 사상에 개방적이며 민생을 위한 학문과 생산의 실효성을 중시하였다. 그래서 공리공론의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여 올바른 것을 구하는 실사구시의 실증적 연구 방법을 채택했다. 뿐만 아니라 기존에 지리적 중심지인 중화사상, 즉 화이관에서 탈피하고 주변과 중심의 개념이 모호해졌다. 대표적으로 홍대용은 자국 중심 문명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하였고 더 이상 소중화가 아닌 ‘동화’로서 세계를 바라볼 것을 제시했다. 실학도 유파마다 성격의 차이가 있는데 근기남인실학은 유형원이 체계화하여 이익이 집대성하기까지 농촌생활에 근거하여 토지소유관계 모순을 중심으로 해결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그 대안으로 균전제·여전제·정전제를 제시하였다. 소론실학은 유수원이 대표적 인물로 사농공상의 비신분적인 개편과 전문화된 분업 수행이 국가부강·민생안정의 길로 보고 상업발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제두는 성리학 중심 속에서 ‘양명학’이란 새 사상을 받아들이면서 양명학을 체계화하고 양반신분제 폐지, 실리추구를 주장하였다. 북학파는 18C 대표적 호락논쟁으로 같은 노론 내에서 사물과 사물의 본성이 같은가 아닌가의 문제를 두고 노론 내에서도 대논쟁이 일어난다. 대표적으로 홍대용·박지원·<북학의>박제가·이덕무 등이 있는데, 그들은 화이론을 극복하고 도시의 성장은 상공업 발달로 보고 이를 중시했다. 토지제도를 강조하기도 하였으며, 호락논쟁은 인수·유석·화이의 구분을 타파하고 인간과 문명의 분별의 논리 즉, 이기론으로 발전한다. 낙론은 이기의 본성이 같다고 보고 정치적으로 탕평정치와 타협적 온건파인 시파(청 존재 긍정)적 입장을 하고, 호론은 이들을 엄격히 구분하면서 수직적 신분관으로 노론 벽파의 정치사상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실학은 이후 개화의 기반이 되어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다리 역할을 하였고, 그 중심에 ‘박규수’가 있었다. 물론 박규수의 인맥 뿐만 아니라 중화주의적 세계관 탈피·이념적 개방성(서양학문과 종교 수용 주장, 서구 선진문물 수용 주장)·실사/실용중심·박제가가 중국 강남 지역 통상 주장과 유사한 통상개국론과 연관이 있다. 물론 그가 실학을 본격적으로 심화·발전시키지 못하였고 토지개혁이나 현실적으로 실학파에 미치지 못한 점도 많아 정강이 제 발휘를 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조선 후기 중세적 사회가 해체되어 가는 여러 가지 지류가 존재함에도 결과적으로 변혁주체로서 그 결과는 성공은 아니었다. 이를 한국의 근대가 일본 식민지로 전락할 수 없다고 믿는 입장도 있지만 이는 명확하지 않다. 전근대역사발전 단계는 日보다 中이 우세했으나 청일전쟁에서 패하는 바람에 전·근대 역사 발전 단계의 결과의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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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13.06.11
  • 저작시기201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5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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