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인텔리겐치아(인텔리겐찌아)
Ⅲ.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보건의료
Ⅳ.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교육제도
1. 사회주의 교육의 모색 단계
2. 기초체제 정착단계
3. 사회주의 교육의 정비단계
4. 제도의 개혁
5. 교육내용의 개혁
1) 1~4학년
2) 5학년이상
3) 수업 시수
6. 사회주의 교육의 발전단계
1) 교육제도
2) 교육내용
Ⅴ.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도시계획
Ⅵ.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대한민국임시정부
Ⅶ.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한반도개입
Ⅷ.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서기장(니키타 흐루시초프)
1. 스탈린 격하운동
2. 사회주의의 다양성
3. 공산당의 개혁
4. 소련의 대외정책
Ⅸ. 결론
참고문헌
Ⅱ.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인텔리겐치아(인텔리겐찌아)
Ⅲ.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보건의료
Ⅳ.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교육제도
1. 사회주의 교육의 모색 단계
2. 기초체제 정착단계
3. 사회주의 교육의 정비단계
4. 제도의 개혁
5. 교육내용의 개혁
1) 1~4학년
2) 5학년이상
3) 수업 시수
6. 사회주의 교육의 발전단계
1) 교육제도
2) 교육내용
Ⅴ.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도시계획
Ⅵ.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대한민국임시정부
Ⅶ.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한반도개입
Ⅷ. 소비에트연방(러시아, 소련)의 서기장(니키타 흐루시초프)
1. 스탈린 격하운동
2. 사회주의의 다양성
3. 공산당의 개혁
4. 소련의 대외정책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말 렌코프,카가노비치, 보로쉴로프, 그리고 미코얀과 같은 스탈린의 가까운 동료들을 공격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있었는데 권력의 자리로부터 추방을 당하든지 아니면 흐루시쵸프의 권위에 굴복을 해야했다. 당시 스탈린 격하운동은 흐루시쵸프의 탁월한 업적이었다. 흐루시쵸프의 비밀연설은 국내와 동유럽에서의 자유화 운동을 촉진시켜, 폴란드 헝가리등지에서 대중봉기가 일어났으며 이 자유화의 물결은 흐루시쵸프의 당내 지위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었으나 대중사이에 그의 개인적 인기는 높았다.
2. 사회주의의 다양성
스탈린 집권시에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와의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이에 흐루시초프는 대권을 이어받고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그러므로 해서 각국의 공산당은 개개국가의 특수성과 전통에 가장 적합한 자신의 정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흐루시초프는 사회주의로의 다양성을 인정하였다.
대표적으로 폴란드의 항거는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소련의 대폭적인 양보로 해결되었으나 폴란드 항거보다 더 거칠었던 헝가리의 항거 때는 다른 사회주의 위성국가들의 동의 하에 소련이 무력으로 진압하였는데 이는 동구에 허용한 스탈린 체제의 수정범위를 나타내 준 것이다.이외에도 루마니아의 경우는 중소대립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정책의 비중을 두었고, 알바니아는 서기장 호자가 스탈린주의자이므로 비스탈린화를 추진하고 있는 소련에 등을 돌리고 중국 측으로 선회함으로써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유고, 루마니아, 이태리 등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공산당들은 흐루시쵸프의 실각에 의혹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탈 스탈린 운동의 기수로써 세계공산주의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흐루시쵸프의 공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3. 공산당의 개혁
흐루시쵸프가 당 기구를 개편한 이유는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고 당기구내에서의 전문화에 보다 중점을 두며, 공산당의 활동의 초점을 경제문제의 해결에 두도록 하는 것으로 흐루시쵸프 생산의 향상을 달성하기를 희망하였다. 흐루시초프는 그의 경제계획의 성패가 당의 개혁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당이 기술적 지도를 할 수 있도록 당 관료의 경력에 있어서 기술적 훈련과 실질적 경험을 중시하고 당원에 대한 기술교육을 강화하였으며 1962년에는 당의 구조를 개편했으나 그의 개혁계획은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①당 관료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으며 ②정부 관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고 ③대중참여방식이 대중에겐 호소력이 있었으나 대중의 인기가 조직적인 정치력에 있어서는 무의미하며 당을 떠난 대중지지의 동원이란 실제에 있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4. 소련의 대외정책
흐루시초프 시대의 외교정책 변화는 짧게 말해서 두 가지 요인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그 하나는 스탈린 외교의 실패에 대한 반성이고, 둘째는 소련의 초강대국으로서의 부상이다. 이러한 흐루시초프의 정책변화는 이미 1955년 티토와의 관계 회복을 위한 그의 베오그라드 방문과 메이 데이 슬로건들에서 그 단서를 드러내기 시작했거니와 1956년 소련 공산당 제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새로운 정책 노선의 확고한 윤곽이 드러났다. 그 대강을 정리하면 ①정세관에 있어서 스탈린이 말한 “자본주의 포위”의 시대는 지나고 소련은 항구적으로 안전한 나라가 되었으며, 평화공존의 시대를 통하여 세계는 미국에 대한 “사회주의 포위”의 단계로 넘어갔다는 것, ②세계관에 있어서 과거 스탈린의 완고한 2개 진영론은 그것이 저지른 과오에 비추어 수정되어야 하며, 반제, 비사회주의적 제3세력 그룹을 사회주의 국가와 함께 ‘광범한 평화 지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 ③스탈린의 “전쟁불가침론”은 낡은 것이고 스탈린 외교의 강제적이고도 폭력적인 수단은 반소 진영의 강화와 소련의 평화 캠페인에 대한 의혹을 결과한 것으로 핵시대의 실정에서도 어리석다는 것, 그리고 ④스탈린의 5개 주요 모순 가운데 주요 자본주의 국가간의 모순을 소련 외교의 주목적으로 설정한 데 반해서 세계 세력 균형의 급격한 변화로 역사의 한 단계에서는 반식민지주의 세력과 제국주의 세력간의 모순이 최대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Ⅸ. 결론
舊소련의 붕괴로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과연 그것은 자본주의가 역사의 마지막 단계임을 시사하는 것일까. 물론 여기에 대답을 하기에는 살펴본 자료가 너무나 적은 양이고 그것도 본인이 구한 자료들은 너무 경제개혁에 치우친 듯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소화하기엔 많은 양이었다. 따라서 부분부분 빠진 부분과 오류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변증법에 입각하여 대답을 한다면 대답은 나올 듯하다. 즉 자본주의가 正으로써 등장을 했다면 이에 反으로써 공산주의-사회주의가 등장했다. 즉 자본주의는 合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진다. 즉 현존하는 체제 이외의 다른 형태의 사회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이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자본주의를 계속적으로 보충하고 조정해 나갈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간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소련은 각각의 민족국가로 해체되어 자본주의로의 일보를 내딛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미래의 전망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역사의 진행을 예측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일 것이고 언제 또다시 1917년의 혁명이 재연될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자본주의가 인류의 최상의 체제는 아니라는, 근거는 소박하지만 신념은 뚜렷한 말을 하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참고문헌
◇ 구자정(2011), 소비에트 연방은 왜 해체되었는가?, 역사학회
◇ 이준일(1986), 소련의 정치제도와 언론 : 소비에트연방의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중앙대학교 언론연구소
◇ 침헌용(2001), 소비에트 민족정책에 대한 재평가,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 편집부(1977), 소비에트 연방의실정, 고려서림
◇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2002), 소비에트체제 붕괴 후 10년 : 러시아연방 민주주의의 현실,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 홍현익(1998), 소비에트 연방체제 붕괴의 원인, 한국세계지역학회
2. 사회주의의 다양성
스탈린 집권시에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와의 사이가 좋지 못하였다. 이에 흐루시초프는 대권을 이어받고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그러므로 해서 각국의 공산당은 개개국가의 특수성과 전통에 가장 적합한 자신의 정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흐루시초프는 사회주의로의 다양성을 인정하였다.
대표적으로 폴란드의 항거는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소련의 대폭적인 양보로 해결되었으나 폴란드 항거보다 더 거칠었던 헝가리의 항거 때는 다른 사회주의 위성국가들의 동의 하에 소련이 무력으로 진압하였는데 이는 동구에 허용한 스탈린 체제의 수정범위를 나타내 준 것이다.이외에도 루마니아의 경우는 중소대립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하면서 경제발전을 이룩하는데 정책의 비중을 두었고, 알바니아는 서기장 호자가 스탈린주의자이므로 비스탈린화를 추진하고 있는 소련에 등을 돌리고 중국 측으로 선회함으로써 소련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유고, 루마니아, 이태리 등 독자노선을 추구하는 공산당들은 흐루시쵸프의 실각에 의혹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탈 스탈린 운동의 기수로써 세계공산주의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흐루시쵸프의 공로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3. 공산당의 개혁
흐루시쵸프가 당 기구를 개편한 이유는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고 당기구내에서의 전문화에 보다 중점을 두며, 공산당의 활동의 초점을 경제문제의 해결에 두도록 하는 것으로 흐루시쵸프 생산의 향상을 달성하기를 희망하였다. 흐루시초프는 그의 경제계획의 성패가 당의 개혁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당이 기술적 지도를 할 수 있도록 당 관료의 경력에 있어서 기술적 훈련과 실질적 경험을 중시하고 당원에 대한 기술교육을 강화하였으며 1962년에는 당의 구조를 개편했으나 그의 개혁계획은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혀 실패하고 말았다. 그 이유는 ①당 관료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했으며 ②정부 관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고 ③대중참여방식이 대중에겐 호소력이 있었으나 대중의 인기가 조직적인 정치력에 있어서는 무의미하며 당을 떠난 대중지지의 동원이란 실제에 있어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4. 소련의 대외정책
흐루시초프 시대의 외교정책 변화는 짧게 말해서 두 가지 요인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그 하나는 스탈린 외교의 실패에 대한 반성이고, 둘째는 소련의 초강대국으로서의 부상이다. 이러한 흐루시초프의 정책변화는 이미 1955년 티토와의 관계 회복을 위한 그의 베오그라드 방문과 메이 데이 슬로건들에서 그 단서를 드러내기 시작했거니와 1956년 소련 공산당 제 20차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의 새로운 정책 노선의 확고한 윤곽이 드러났다. 그 대강을 정리하면 ①정세관에 있어서 스탈린이 말한 “자본주의 포위”의 시대는 지나고 소련은 항구적으로 안전한 나라가 되었으며, 평화공존의 시대를 통하여 세계는 미국에 대한 “사회주의 포위”의 단계로 넘어갔다는 것, ②세계관에 있어서 과거 스탈린의 완고한 2개 진영론은 그것이 저지른 과오에 비추어 수정되어야 하며, 반제, 비사회주의적 제3세력 그룹을 사회주의 국가와 함께 ‘광범한 평화 지대’로 보아야 한다는 것, ③스탈린의 “전쟁불가침론”은 낡은 것이고 스탈린 외교의 강제적이고도 폭력적인 수단은 반소 진영의 강화와 소련의 평화 캠페인에 대한 의혹을 결과한 것으로 핵시대의 실정에서도 어리석다는 것, 그리고 ④스탈린의 5개 주요 모순 가운데 주요 자본주의 국가간의 모순을 소련 외교의 주목적으로 설정한 데 반해서 세계 세력 균형의 급격한 변화로 역사의 한 단계에서는 반식민지주의 세력과 제국주의 세력간의 모순이 최대의 모순이라는 것이다.
Ⅸ. 결론
舊소련의 붕괴로 미국은 세계의 유일한 초강대국이 되었다. 과연 그것은 자본주의가 역사의 마지막 단계임을 시사하는 것일까. 물론 여기에 대답을 하기에는 살펴본 자료가 너무나 적은 양이고 그것도 본인이 구한 자료들은 너무 경제개혁에 치우친 듯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소화하기엔 많은 양이었다. 따라서 부분부분 빠진 부분과 오류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변증법에 입각하여 대답을 한다면 대답은 나올 듯하다. 즉 자본주의가 正으로써 등장을 했다면 이에 反으로써 공산주의-사회주의가 등장했다. 즉 자본주의는 合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해진다. 즉 현존하는 체제 이외의 다른 형태의 사회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이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자본주의를 계속적으로 보충하고 조정해 나갈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간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소련은 각각의 민족국가로 해체되어 자본주의로의 일보를 내딛을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미래의 전망은 그리 밝지만은 않다. 역사의 진행을 예측한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일 것이고 언제 또다시 1917년의 혁명이 재연될 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자본주의가 인류의 최상의 체제는 아니라는, 근거는 소박하지만 신념은 뚜렷한 말을 하며 이 글을 맺고자 한다.
참고문헌
◇ 구자정(2011), 소비에트 연방은 왜 해체되었는가?, 역사학회
◇ 이준일(1986), 소련의 정치제도와 언론 : 소비에트연방의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중앙대학교 언론연구소
◇ 침헌용(2001), 소비에트 민족정책에 대한 재평가,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 편집부(1977), 소비에트 연방의실정, 고려서림
◇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2002), 소비에트체제 붕괴 후 10년 : 러시아연방 민주주의의 현실,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 홍현익(1998), 소비에트 연방체제 붕괴의 원인, 한국세계지역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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