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혁명과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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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산업혁명과 바우하우스의 디자인의 역할에 대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서 론

Ⅱ 본 론
1. 근세 공예와 산업혁명
2. 산업혁명 이후 현대디자인의 형성
3. 바우하우스의 탄생
4. 바우하우스의 목적
5. 바우하우스의 교육

Ⅲ 결 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하는 칭호가 사용되었지만, 젊은 책임자라고 하는 명칭은 고참 마이스터와 구별하기 위해 바우하우스 내에서 사용했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아카데믹한 입장을 견지했는데, 기능의 책임자는 교수진에 들 수가 없었다. 바이마르·바우하우스에서 옮겨 온, 뎃사우·바우하우스에서는 공간론을 연구하고 있던 모홀리·나기(L.Moholy Nagy, 1895∼1946)와 또 바이마르 이래 형태와 소재의 상관관계, 시각상의 착각 등에 대해 연구하고 있던 요셉·알버스(Josef Albers, 1888∼1977)등이 기초 교육(바이마르 예비과정에 해당한다)을 담당해, 형태, 소재, 구조 등에 관해 가르쳤다. 그리고 새롭게, 젊은 허버트·바이어(Herbert Bayer 1900∼)가 인쇄 공방을, 마르셀·브로이어(Marcel Breuer, 1902∼)가 가구 공방을 (바이마르에서는 직물공방이라고 지칭되고 있었다), 또한 게오르그·뮤헤(Georg Muche, 1895∼)와 군타·스퇴르츠르(Gunta St lzl, 1897∼?, 그녀는 1926년이후)가 직물 공방을 담당했다. 또 히네르크·쉐파(Hinnerk Scheper, 1897∼1957)가 벽화공방을, 요스트·슈밋트(Joost Schmidt, 1893∼1948)가 조소공방을, 또한 오스카·슐레미(Oskar Schlemmer, 1888∼1943)가 무대공방을 맡았다. 바이마르 이래 P.클레와 W.칸딘스키는, 기초적인 형태교육을 계속해서 담당했다.
기본적으로는 바이마르 교육을 답습했으나, 뎃사우·바우하우스에서는 1년간의 기초 교육과정(공작기초교육과 형태기초교육)을 수료하면, 3년간의 전문교육과정(특정의 공방에서의 공작교육과 형태교육)에 진학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1928년 이후, 책임자, 직인, 도제의 등급제 또, 직능심의회의 시험은 폐지되고, 수료제로 되었다. 특히 뎃사우의 바우하우스에서 개혁된 것은 전문 교육과정의 수료 후 1년 반의 건축교육과정 내지는 1년 이상의 실천 실험부(특정의 공방에 있어서 제품 모델의 연구와 제작)를 설치한 것, 또한, 각 공방이 교육공방과 실험공방(바이마르에서는 양쪽이 일치되어 있었다)으로, 즉 교육기관과 생산사업체(예를 들면 1925년의 바우하우스 상회설립)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1930년, 프랑스 장식미술가 협회 주최의 전시회가 파리에서 개최되었는데, 이때 독일 공작가 연맹의 의뢰를 받아 독일 부문을 맡은 것이, 이미 바우하우스를 떠난 W.그로피우스, 모홀리·나기, H.바이어 등의 바우하우스 교수들이었다. 이 대 전시회에 출품된 것은 표준형 시리즈의 무기교의 제품으로, 근대 미를 느끼게 하는 들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바우하우스에서는, 새로운 조형교육을 기초로 건축(건축가), 예술(예술가), 공예(공예가), 공업기술(기술자)의 통합이 지향되었다. 또한 근대기술문명이 가져다준 분업과 전문화를 대등한 공동 작업에 의해 조화 있는 총합체(건축)에 재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창립 당시의 수 공작에서 1923년 이후의 기계 생산에의 적극적인 채용을 기조로, 예술과 산업의 결합, 예술과 공업기술의 통합을 목표로 교사들과의 인간적 향기를 원동력으로 해서 합리주의적인 모던·디자인에의 새로운 어프로치를 시도했던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사상과 교육은 세계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Ⅲ 결 론
산업혁명은 미술가와 공예가의 전통적인 기능을 침범한 기계와 재료의 발명을 초래했다. 예를 들어서, 주철은 벽돌이나 나무보다 훨씬 용도가 다양하였고 증기기관은 사람의 손보다 훨씬 빠르고 규칙적으로 찍어내고 자르고 만들 수 있었다. 즉, 기계생산으로 더욱더 가격을 절약할 수 있었고, 그 절약된 가격으로도 높은 이익을 낼 수 있었다. 영국에서는 이 신식기계들 엔진과 망치 그리고 선박과 직조기들이 산업적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이들은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강하게 반발했던 존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스 등은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은 기계들이 인간의 영혼을 황폐화시킨다고 믿었다. 또 공예가로서의 즐거움과 보람을 앗아간다고 믿었다. 모리스는 이런 산업화의 위기에 놓인 미술을 되살릴 수 있는 벙법은 전통공예부흥에 있다고 생각하였고, 1861년 전통공예가들의 작품을 생산하는 상사를 세우고 공예제품을 제작 판매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량생산되는 제품보다 비쌀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라고도 할 수 있을 법한 모리스의 생각은 꿈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달리 생각해보면 산업혁명이라는 역사적 배경에 의해 바우하우스가 내세운 교육적 정책은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르다. 하지만 이 시대의 교육은 미국으로 전달되었고, 많은 학교들이 이 정책을 받아들임으로서 현재 21세기 매년 수천의 학생들이 20세기의 교육을 그대로 받고 있다. 물론 유니버설디자인, 감성 디자인, 그리고 지속가능한 디자인 등 다양한 디자인 트렌드들이 등장하면서 디자인 교육도 조금씩 진화, 발전하고는 있지만 1919년 형성된 독일의 교육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고 본다. 만약 독일의 바우하우스가 없었더라면, 지금처럼 디자인이 실용적으로 급속하게 발전하지는 않았으리라 본다. 체계적이고 기능적인 디자인 교육을 통해 디자이너들은 효과적으로 빠른 시간 안에 더 많은 제품을 창조할 수 있었다.
Ⅳ 참고문헌
권명광, 「바우하우스」(서울: 미진사, 1996)
권명광·명승수,「近代디자인史-산업혁명에서 바우하우스까지」(서울: 미진사, 1983)
김현화, 「20세기 미술사(추상미술의 창조와 발전) (한길아트, 1999)
김현화, 「칸딘스키 - 바우하우스에서의 작품과 조형이론:1922-1933」 (미술사연 구회 미술사연구 제 10호, 1996)
명승수, 「현대 디자인학의 지평」(서울: 디자인하우스, 2001)
이건호, 「한 권으로 배우는 디자인 이야기」(경기도: 유림문화사, 1999)
이해성, 「근대건축의 흐름」(서울: 세진사, 1998)
사노 히로시(역: 현동희 외 1), 「21세기의 디자인」(서울: 태학원, 1998)
Efland, A, 「미술교육의 역사 (박정애 옮김)」(서울: 예경, 1990)
Whitford, F, 「 바우하우스 (이대일 옮김)」(서울:시공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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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2.28
  • 저작시기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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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899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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