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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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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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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2. 일제 강점기 농민은 무엇을 꿈꾸었는가?
진도 농민단체의 선언문: “전쟁은 평화의 근본이다. 머뭇거리지 말자. 지주의 횡포로 우리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우리는 스스로 耕作․耕食한다. 토지소유권은 인정될 수 없는 것인데도 국가가 이를 승인함은 부당하다. 우리는 끝까지 이를 타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지경이 된 것은 일본인의 소행이다. 조선의 지주도 일본인과 한 무리가 되었다.”(조선총독부『조선의 군중』1925).
1-3. 어느 자작지주(自作地主)의 ‘신(新)지주’ 비판 : 순천군 상사면 운곡리 최익련(崔益連)(『동아일보』1923년 11월 6일).
① 지금부터 20년 전에는 삼분경작(三分耕作)이란 농촌 숙어가 있었는데 소작인이 2/3를 가져가고 1두락에 5ㆍ60전의 세금을 부담하였다.
② 현재의 5할 소작료는 농사실정을 모르는 신사계급지주의 책상 위의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소작인에게 이익이 없음은 물론이고 1년 동안 의 농사비용도 충당할 수 없다.
③ 지주가 소작료만을 챙기려고 농촌을 퇴폐시키고 선량한 소작인을 악독하게 하니 이것이 바로 지주의 죄악이다.
1-4. 광주학생운동의 지향과 의의
① 성진회(醒進會) 강령(1926년 11월 3일 결성)
하나, 일제의 기반에서 한국의 독립을 쟁취한다.
둘,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을 절대 반대한다.
셋, 언론ㆍ출판ㆍ결사의 자유를 요구한다.
② 1929년 6월 독서회 중앙본부 결성
③ 고등보통학교 혹은 농업학교를 졸업하는 자는 사회에 나가 농민 및 노동자에 대하여 사범학교를 졸업하는 자는 교직에 나가서 학교생도에 대하여…재학생은 일반학생에 대하여 선전활동을 한다.
1-5. ‘10ㆍ26’과 ‘서울의 봄’
1979년 8월 11일: YH노조 신민당사 농성
1979년 10월 13일: 부마민중항쟁
1979년 10월 26일: ‘10ㆍ26사건’
1979년 11월 24일: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 즉 ‘명동위장결혼사건’
1979년 11월 28일: 광주재야 <민주주의를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자>
1980년 3월 : 대학가 학원자율화 운동(~4월).
1980년 4월 21일: 사북항쟁
1-6. 민주세력의 정치적 분열
① 신민당: 선(先)개헌 후(後)선거 민간민주정부구성
② 재야세력: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반대, 거국민주내각 및 과도정부 구성 주장(1979년 11월 12일,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의장 윤보선, 함석헌, 김대중).
③ 명동위장결혼사건

1-7. 광주 학생의 민중생활 보장 요구
① 1980년 4월 19일: 민주농정 주장(강제농정 중단, 무분별한 외국농산물 도입정책과 농산물 저(低)가격정책 즉각 폐기, 농협임시조치법 즉각 폐지, 소작농 일소와 비생산적인 토지의 농민 환원, 재벌과 특권층의 대토지소유 및 토지투기 제도적 금지, 헌법에 의한 농민운동 보장, 지방자치체 전면 실시).
② 1980년 4월 25일: 노동자 생존 보장, 노ㆍ농ㆍ학 연대 방침
1-8. 왜 광주인가?
① 1980년 5월 8일 광주학생, <제1시국선언문> 채택. 민족민주화성회 개최, 5월 14일 이내 비상계엄 즉각 해제, 휴교령 거부, 대학인의 행동 통일’ 결의(~5월 16일까지).
② 1980년 5월 15일, <제2 시국선언문> 발표: ‘유신잔당의 국권찬탈 음모를 분쇄하고자 우리 대학인의 민주역량을 총집결하여 반민주 반민족 세력과의 성전을 엄숙히 선포한다.’
③ 1980년 5월 18일
④ 1980년 5월 19일 들불야학의 〈투사회보〉배포(범시민 민주투쟁위원회와 학생혁명위원회 명의)
1-9. 빛과 길과 땅: 이 강좌는 무엇을 찾아가는가?
① 大抵卜居地也 地理爲上 生利次之 次則人心 次則山水 四者缺一 非樂土也.
② 觀國之光 尙賓也…觀我生 觀民也
③ 人能弘道 非道弘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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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5.12
  • 저작시기2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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