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한국교회의 부흥 _ 1903년, 1904년, 1906년, 1907년 대부흥, 한국에서의 부흥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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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기독교] 한국교회의 부흥 _ 1903년, 1904년, 1906년, 1907년 대부흥, 한국에서의 부흥의 기원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1903년

2. 1904년

3. 1906년

4. 1907년 대부흥

5. 한국에서의 부흥의 기원

본문내용

에서 시작되었고, 이것은 1907년의 대 부흥의 시원이 된다. 1907년 1월 14일의 정오기도회는 평양 대부흥의 역사를 가능케 했다.
셋째, 부흥의 역사를 불러 일으켰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죄의 고백이었다. 즉 통회와 자복은 하나님의 역사를 불러일으키는 통로였다는 점이다(행2:37ff, 삼상7). 이 점은 18-19세기 부흥운동사에서 가장 현저한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하나님을 향한 회심’으로서의 회개는 칼빈에 의하면 ‘재생’(reparatio), ‘회복’(instanratio). ‘갱신’(removatio), ‘복귀’(restitutio). ‘개혁’(reformatio), 그리고 ‘중생’(regeneratio) 등의 의미를 함의하는 거룩한 생활로 나아가는 성화의 과정이었다. 이 회개라는 성화의 과정에서 성령께서 역사하신 것이다. 요나단 고포드는 진정으로 회개할 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1903년 8월 하디가 요한복음 14:12-14, 15:7, 16:23을 본문으로 행한 3차례의 연속 강연에서 자신의 죄와 교만을 회개했을 때 선교사들 사이에 회개의 역사가 나타났고, 그것이 한국인들에게로 전파되었다. 이것이 1903년 부흥의 시원이었다. 1907년 대 부흥에서도 길선주의 공개적인 회개는 부흥의 역사를 불러왔다. 1월 16일 수요일 장대현교회 수요예배에서도 죄의 고백은 부흥을 가져왔다. 1859년의 웨일즈의 부흥도 한 여인의 회개에서 비롯되었고, 웨일즈 부흥 1백주년이 되는 1959년 웨일즈를 방문했던 캄펠 몰간(Campbell Morgan)의 증거 속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1904-5년에 웨일즈에 부흥의 역사가 동일한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마틴 로이드 존스, 캄펠 몰간(Campbell Morgan), 마이어(F. B. Meyer) 동일한 견해를 피력했다.
넷째, 부흥에 대한 소식들이 도전과 자극을 주었다는 점이다. 부흥운동의 역사에서 다른 지역의 부흥에 관한 소식과 전언이 상호 영향을 주고 새로운 부흥을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되었다는 점은 미국의 사회학자 조지 토마스(George Thomas)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그는 19세기 부흥의 역사에는 놀라울 정도의 통신과 상호 교류(networking)가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Edwin Orr는 1970년 저술한『인도에서의 복음주의 각성운동』(Evangelical Awakenings in India)에서 인도의 부흥운동은 웨일즈의 부흥운동과 모종의 깊은 관계 하에서 진행되었다고 하여 이 점을 뒷받침 했다. 이점은 한국에서도 동일했다. 1903년 원산에서의 부흥은 중국에서 선교하던 스칸디나비아 선교회 프란손(Rev. F. Franson)의 외국에서의 부흥에 대한 소개가 한국교회에 도전을 주었고, 1906년 8월의 경우 미국의 존스톤목사(Rev Hoard A. Johnston)가 인도와 영국 웨일즈에서 일어난 부흥을 소개한 것이 한국인들에게 감동과 도전을 주었다. 이 때 존스톤은 한국에서 일어날 부흥을 예견했다고 한다. 그해 10월 목포에서 있었던 부흥에 대한 소식은 평양과 다른 지방에도 자극과 도전을 주었다.
1907년 평양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대한 소식은 평양신학교 학생들과 다른 이들을 통해 각 지방으로 전파되었고, 이런 소식이 청주, 광주, 선천, 재령, 의주, 대구 등지로 확산되고 그 지역에서의 부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특히 1907년 2월 17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열린 연합 사경회 때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있었던 부흥의 역사가 소개되었고, 결과적으로는 평양에 임했던 성령의 역사가 그 대로 재현되었다. 그 결과로 부흥의 물결은 곧 송도, 강화, 재물포 등지로 확산되었다.
요나단 에드워드도 이와 같은 부흥 역사의 상호 의존성과 넷워킹을 인정했다. 즉 “외부에서 방문한 이들이 거룩한 축복의 내림을 경험하고 난 후” 기쁨으로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서 그 소식을 전하게 되자 그곳에서도 부흥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또 그는 “경험에 의하면 어떤 곳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가 현저하게 역사하였다는 소식이 다른 지역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우고 사로잡는 경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1908년 중국에서 일어난 부흥의 역사는 평양 부흥에 대한 목격자들에 의한 전언과 보고가 가져온 결실이었다. 평양에서의 부흥에 대한 조나단 고포드(J. Goforth)의 보고는 만주, 특히 산시성(山西), 푸켄성(福建省)에서의 부흥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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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10.18
  • 저작시기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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