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 관한 소고
1. 들어가는 말
2. 바보 질문: 칭의한 사람이 성화가 없다면 구원이 되는가?
3. 칭의는 단번, 순간에 이루어진다(subita conversio).
4. 칭의는 인식 과정이 아니고 존재 변화이다
5. 칭의와 성화의 관계
6.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제언
1. 들어가는 말
2. 바보 질문: 칭의한 사람이 성화가 없다면 구원이 되는가?
3. 칭의는 단번, 순간에 이루어진다(subita conversio).
4. 칭의는 인식 과정이 아니고 존재 변화이다
5. 칭의와 성화의 관계
6.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제언
본문내용
용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웨슬리안이 사회성화를 제시하는 것은 특별계시를 일반영역에 구별없이 사용하는 것이다.
칭의와 성화는 구별해야 한다. 성화도 개인에게 한정해야 하며, 사회 등 여러 일반 영역까지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칭의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유일한 사건(죄인이 의인이 되는)이다. 칭의 후에 남은 죄가 제거된 뒤에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데(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뒤에 얻은 의) 그것은 칭의라고 하지 않고 성화라고 한다. 동일한 죄사함 구도이고 은혜이지만 칭의와 성화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그 이유는 단번에 주신 은혜의 선물(구원)이 너무가 크고 놀랍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화에서 여전한 난제는 남은 죄 때문이다. 성화가 윤리를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죄를 제거하는 방식이다. 칭의도 은혜로 죄를 사함받았듯이, 성화를 이루는 남은 죄도 은혜로 사함을 받는다. 성화에서는 남은 죄를 제거함과 함께 선을 행하는 것도 병행한다. 선을 행할 때에도 인간의 의지나 덕이 아니라 은혜의 방식으로 한다. 그러므로 개혁된 가르침을 따르는 성도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 선행을 자랑하거나 드러낼 수 없다. 그러한 믿음 행동을 보면서 성화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육신의 신비와 십자가의 구속을 알지 못하는 사단의 수준이다. 사단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 있는 것은 자녀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경륜을 자녀 외에 다른 이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6.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제언
신자는 죄인에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다. 죄사함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은혜로 예기치 않은 상태에 인식하지 못할 순간에 단번에 주어진다. 그러나 신자는 반드시 자기가 죄사함 받은 상태임을 언제가 반드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 죄를 사한 구주의 은혜에 무한한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칭의와 성화는 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신자는 자기를 의인으로 만든 구주의 이름을 어찌하든지 증언하려고 노력하고 시도할 뿐이다. 논쟁에서는 열매를 맺기 어렵다. 논쟁은 최대한 피하지만,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할 최소한 수준에서 진행한다. 신자의 최우선 과제는 예수 구원을 증언하는 역할이고 사역이다. 예수 이름을 고백하며 선포하면 구원이 이루어진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성화의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빛에서 어둠을 볼 때 어둠으로 가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빛의 자녀는 절대로 어둠으로 가지 못한다. 우리는 동시에 빛과 어둠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을 연마하는 것은 합당한 예배와 복음 선포(목사의 설교와 불신자에게 복음 전함)을 목표한다. 칭의와 성화 관계를 토론한다면 칭의의 신비와 성화의 증진에 전념할 수 있다. 그리고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시는 주님의 초대 편지를 보낼 수 있다. 성화 과정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편지이다(고후 3:3). 새로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사람을 구하며 찾으며 두드려야 한다(마 7:7-12).
칭의와 성화는 구별해야 한다. 성화도 개인에게 한정해야 하며, 사회 등 여러 일반 영역까지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칭의는 단번에 이루어지는 유일한 사건(죄인이 의인이 되는)이다. 칭의 후에 남은 죄가 제거된 뒤에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수 있는데(아브라함이 이삭을 드린 뒤에 얻은 의) 그것은 칭의라고 하지 않고 성화라고 한다. 동일한 죄사함 구도이고 은혜이지만 칭의와 성화를 분명하게 구분한다. 그 이유는 단번에 주신 은혜의 선물(구원)이 너무가 크고 놀랍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성화에서 여전한 난제는 남은 죄 때문이다. 성화가 윤리를 증진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죄를 제거하는 방식이다. 칭의도 은혜로 죄를 사함받았듯이, 성화를 이루는 남은 죄도 은혜로 사함을 받는다. 성화에서는 남은 죄를 제거함과 함께 선을 행하는 것도 병행한다. 선을 행할 때에도 인간의 의지나 덕이 아니라 은혜의 방식으로 한다. 그러므로 개혁된 가르침을 따르는 성도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자기 선행을 자랑하거나 드러낼 수 없다. 그러한 믿음 행동을 보면서 성화가 없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육신의 신비와 십자가의 구속을 알지 못하는 사단의 수준이다. 사단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 있는 것은 자녀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경륜을 자녀 외에 다른 이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6.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서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제언
신자는 죄인에서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다. 죄사함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의 은혜로 예기치 않은 상태에 인식하지 못할 순간에 단번에 주어진다. 그러나 신자는 반드시 자기가 죄사함 받은 상태임을 언제가 반드시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자기 죄를 사한 구주의 은혜에 무한한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칭의와 성화는 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신자는 자기를 의인으로 만든 구주의 이름을 어찌하든지 증언하려고 노력하고 시도할 뿐이다. 논쟁에서는 열매를 맺기 어렵다. 논쟁은 최대한 피하지만,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역할을 감당해야 할 최소한 수준에서 진행한다. 신자의 최우선 과제는 예수 구원을 증언하는 역할이고 사역이다. 예수 이름을 고백하며 선포하면 구원이 이루어진다. 구원을 받은 사람은 반드시 성화의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빛에서 어둠을 볼 때 어둠으로 가고 싶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빛의 자녀는 절대로 어둠으로 가지 못한다. 우리는 동시에 빛과 어둠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학을 연마하는 것은 합당한 예배와 복음 선포(목사의 설교와 불신자에게 복음 전함)을 목표한다. 칭의와 성화 관계를 토론한다면 칭의의 신비와 성화의 증진에 전념할 수 있다. 그리고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시는 주님의 초대 편지를 보낼 수 있다. 성화 과정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편지이다(고후 3:3). 새로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사람을 구하며 찾으며 두드려야 한다(마 7: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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