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방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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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규방가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서 론

2. 탄식류 규방가사의 의의

3. 탄식류 규방가사에 나타난 여성의식
3-1. 결혼생활에 대한 인식
3-2. 남편과의 이별에 대한 인식
3-3. 개가에 대한 인식
3-4. 기타

4. 결 론

본문내용

규방가사에 나타난 여성의식
-탄식류 여성가사를 중심으로-
1. 서론
조선사회는 유교문화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관료제도는 철저히 남성 중심의 사회체제로 존속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 하에서 여성들이 공적인 분야에서 활동하기란 불가능 하였다. 또한 조선사회는 폐쇄적, 배타적, 가문중심사회로 계층과 남녀의 구별 없이 모든 것이 부자유스럽고 억압된 사회였다. 문학은 사회상의 거울이므로 조선시대 문학은 그 시대의 사회상을 잘 투영하고 있다. 이러한 문학의 종류 중에서 규방가사는 그것의 저자가 대부분 여자라는 것과 여자를 대상으로 하여 창작되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규방가사는 특히 조선시대 여성들이 자연스레 자신이 처한 상황에 적응해 나간 그들의 생활 감정, 사회관, 인생관 등이 비교적 풍부하게 반영되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먼저 규방가사란 조선조 후기 이후 주로 영남지방 양반가의 부녀자들을 주된 향유층으로 하여 그들에 의해 창작되어 온 문학 양식으로, 본래의 특별한 명칭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명칭으로 일컬어진다. 그저 막연하게 ‘가’ 또는 그 보존 방법에 따른 명칭으로 ‘두루마리’라고 불려졌을 뿐이나 권영철, 『규방가사연구』, 이우출판사, 1980, 10쪽.
‘이 두루마리 형식의 <가>는 <가>이지, 별다른 명칭이라고는 없었던 것이다. 이는 내가 영남지방을 실지로 답사하면서 느낀 것이다, 현지에서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붙잡고 “내방가사(內房歌辭)나 규중가도(閨中歌道)가 누구 집에 갈무려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열이면 열 모두가 그런것을 모른다고 한다. 그러나 <가>나 <두루마리>라고 말하면, 모두가 회심의 미소로 아는 체를 한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그 명칭은 <가>란 두 글자밖에는 없다.’
연구자들에 의해 ‘내방가사’ 이재수, 『내방가사연구』, 형설출판사, 1976, 10쪽
, ‘규방가사’ 권영철, 『규방가사연구』, 이우출판사, 1980, 9쪽
, ‘여류가사’ 박요순, 호남지방의 여류가사연구, 『국어국문학』48호, 국어국문학회, 1970.
손봉창, 내방가사 연구-새로운 문제점 제기-, 『한국시가의 신조명』, 탐구당, 1990.
라는 명칭으로 연구되었다. 이것은 대체로 창작이 이루어진 공간의 측면과 아울러 창작층과 관련하여 부여된 명칭이다. ‘규방가사’는 향유되는 장소의 상징적 의미가 붙여진 명칭이고 ‘내방가사’는 ‘외(外)’와 대립되는 용어로서 그 명칭을 붙인 것이며, ‘여류’라는 명칭은 남성 중심적 사고의 편향성에서 유래해 사용된 용어이다. 이렇듯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려지는 가운데 본고에서는 ‘규방가사’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하겠다.
규방가사의 생성시기를 보면 연구자에 따라 그 시각이 각각 다르다. 김사엽 김사엽, 『이조시대의 가요 연구』, 정읍사, 1956, 30쪽
은 “부녀자들이 가사 창작을 한 예로써 다음 두 가지 사실로써 비교적 일찍이, 중종 때부터 일부 상층 규중에서 유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 하고 그 예증으로서 聾巖 李賢輔의 자당인 권씨의 <선반가(宣飯歌)>와 허난설헌의 <규원가(閨怨歌)>및 <봉선화가(鳳仙花歌)>를 들었다.
이재수 이재수, 앞의 책, 13쪽
는 내방가사의 효시가 <宣飯歌>라고 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한다. <宣飯歌> 이후 60년 후에 <閨怨歌>및 <鳳仙花歌>가 있고 그 이후 약 300년간의 공백기간이 있은 후 갑오경장을 시발점으로 한 향후 수십 년 동안 많은 작품이 창작되었다는 점을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 것이냐는 것이다. 김사엽은 수백년을 경과한 작품이 보존되어 있음이 발견된다고 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떠한 작품인지를 명시하지 않아 알 수 없다. 김사엽, 앞의 책, 333쪽
이재수는 그가 수집한 597편 중에서 경북대본(慶北大本) <계녀가(誡女歌)>와 영천(永川) 이씨댁에서 수집한 <여자탄(女子嘆)>이 가장 고형을 띤 것으로 고종 때의 것이라는 점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연대의 상고는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재수, 앞의 책, 13쪽
이처럼 규방가사의 기원을 聾巖 李賢輔의 자당 권씨의 <宣飯歌>나 허난설헌의 <閨怨歌>, <鳳仙花歌>가 아니면 이재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시각이 있는 등 연구자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언제부터를 시작으로 해야 하는가를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시기가 불분명한 규방가사는 공통적으로 여성들의 생활상 등을 나타내주고 있음은 잘 알 수 있다. 대부분이 양반 부녀자들의 생활 주변에서 얻어지는 것들을 소재로 하였고, 그러다보니 유교적인 윤리관에 입각하여 교훈적인 것이 가장 많고, 다음은 그들의 신변 탄식의 것이 많으며, 문물제도인심풍속의무 등이나 자연에의 관조, 나아가 민족수난까지도 광범하게 취급하고 있다. 권영철, 『규방가사에 나타난 신변탄식류의 연구』, 효성여자대학출판부, 1985, 7쪽
특히 규방가사 중 탄식류로 나뉘는 가사에는 봉건사회에서 부자유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던 여성들의 일생이 잘 담겨있다. 즉 자신의 체험에서 우러나온 불만의 토로나 현실 비판적인 내용이 많은 것이다. 이러한 탄식류의 가사들은 남성주의 문화 속에서 기존의 질서체계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작품에 투영된 것은 자아의식의 발로라는 차원에서 발전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통적 유교윤리규범을 강조하던 계녀가사의 한계를 벗어나 여성중심의 관점에서 창작된 작품이라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탄식류의 가사들은 여성의 결혼생활에 대해서 나타나 있고, 그것에 대한 여성들의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이러한 가사들 중에서도 <소지라>, <정부인자탄가>, <리씨회심곡>, <한별곡>, <부녀가>, <창회곡>, <여자탄식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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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25페이지
  • 등록일2007.12.25
  • 저작시기2005.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44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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