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머리말
Ⅱ동북공정
1. 동북공정
2. 동북공정의 추진과정과 배경
3. 동북공정의 추진목적
4. 동북공정의 연구항목
5. 동북공정의 문제점
Ⅲ.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실체와 고구려의 한국사적 위치
1.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실태와 우리나라 고구려사
2. 한국사의 고구려 계승성
Ⅳ. 한국의 대응방안
1. 정치․외교적 대응방안
2. 교육적 대응방안
3. 사회적 대응방안
4. 그 외의 대응방안
Ⅴ. 맺음말
Ⅱ동북공정
1. 동북공정
2. 동북공정의 추진과정과 배경
3. 동북공정의 추진목적
4. 동북공정의 연구항목
5. 동북공정의 문제점
Ⅲ.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실체와 고구려의 한국사적 위치
1.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실태와 우리나라 고구려사
2. 한국사의 고구려 계승성
Ⅳ. 한국의 대응방안
1. 정치․외교적 대응방안
2. 교육적 대응방안
3. 사회적 대응방안
4. 그 외의 대응방안
Ⅴ. 맺음말
본문내용
강역으로 본 계승 관계
두 나라의 역사적 연계성을 파악할 수 있는 조건에는 크게 혈연적 연계성과 문화적 연계성 그리고 지리적 연계성으로 나눠볼 수 있다. 발해의 영토는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과 러시아의 영역에 걸쳐있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로 볼 수 없다는 동북공정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지리적 연계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측이 주장하는 지리적 연계성은 오늘날의 중국의 국경 개념에 맞춰진 것이므로 고대국가의 지리적 연계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발해는 건국 후 29년인 727년(무왕 대무예 9년) 일본에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면서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 (속일본기 神龜5년 1월 17일조)
며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보면 부여의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는 문화적 연계성과 더불어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는 지리적 연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문제시 되는 발해가 고구려 유민이 아닌 중국의 변방 부족인 말갈족이 세운 국가라는 주장을 말끔히 해소시키는 부분이다. 그리고 <요사 遼史>에서 보면 고구려에서 발해로 연계된 지명을 몇몇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역시 고구려와 발해의 지리적 연계성을 밝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비록 요사가 원대에 칙명에 의해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으며 발해와 전쟁하여 승리한 승리자의 시각이 다분히 들어있다고는 할 수 있으나 다른 역사서에 비해 발해의 멸망까지 유일하게 다루고 있는 사료라는 점에서 오히려 연구해볼만한 사료라 판단되었다. <요사>에 언급된 발해와 고구려 지명의 연계성을 소개해보겠다.
첫째, 고구려의 백석성, 즉 백암성을 들 수 있다. 당은 성주가 항복한 이곳을 ‘암주(巖州)’라고 했는데 <요사>지리지에는 이 암주의 백암군은 원래 발해의 백암성이라고 했다고 한다.
둘째, 발해의 서경 압록부는 요나라 때에는 녹주 압록군 절도였는데, 원래 그곳은 고구려의 고국이었다고 했다. 녹주의 예하에는 환주 풍주 정주 모주가 있었는데 환주는 고구려의 중도성이었고, 정주는 비류왕의 고지로서 발해는 이곳에 비류군을 두었다고 했다. 이로써 판단하건데 고구려의 발상지가 그대로 발해의 서경압록부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막힐부는 부여의 고지였는데 고구려 시대에 막힐부를 설치했고, 발해가 이를 그래도 이어받았다고 했다.
넷째, 발해의 동경 용원부에는 모두 15개의 현이 있었다. 그 가운데 경주 예하의 웅산현이 있는데, 당의 설인귀가 고구려를 공략할 때에 고구려의 장군 온사문과 싸웠다는 곳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동변이 곧 발해의 동쪽 변계의 중심이었다고 본다. 특히 4세기에 이미 고구려에 예속된 동옥저의 기사를 보면 고구려와 발해의 동변의일부가 겹친다고 판단할 수가 있다. 연구총서.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관계. 정진헌. 고구려연구재단.2005
이상의 결과를 종합해보자면 발해는 고구려 영역의 중심부를 온전히 계승했다고 본다. 발해와 고구려의 지명의 해석이 온전히 정확하게 이루어진 부분이 그리 많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각각의 지명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여러 사료에서 기록된 자료들을 통해 발해와 고구려의 강역을 표시한 지도를 비교해보면 발해의 세력권과 고구려의 세력권이 상당 부분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발해는 고구려의 중심부를 기반으로 삼으면서 좀 더 동북변으로 확장시켰다고 볼 수 있으며 앞서 말했던 발해의 외교문서를 통해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민구성으로 본 계승 관계_말갈인과 고구려
최근 동북공정의 연구 성과로 출간된 \'발해국사\'의 주저자인 웨이궈중(魏國忠) 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원은 발표문에서 말갈은 발해를 건국한 중심종족명인 동시에 초기 국명이라는 주장을 거듭했다. 그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당나라의 발해군왕 책봉을 받아들인 후 말갈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불렀다\'는 신당서 등의 역사 기록을 중심으로 이런 주장을 펼쳤다. 이는 동북공정에서 중국인들이 발해가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로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이었으나 대다수는 말갈인 이라는 것이다. 혹은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신성분을 고구려가 아닌 말갈족으로 보아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말갈인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구당서에서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구당서(권 199 하) 발해말갈전
라고 확실히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별종이란 ‘어디서 나온 가지’라는 뜻으로 발해가 고구려와 별개의 국가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웨이궈중이 참고한 신당서는 구당서 이후 100년 이상 지난 1060년 송나라 구양수, 송기 등이 편찬한 사서인데 이에 비해 구당서는 발해가 멸망하고 19년 후인 945년에 편찬된 사서로 발해의 근원을 밝히기에는 신당서보다 더 적합한 사료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신당서에서 ‘國人’이란 발해의 지배층을 일컫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들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전혀 다른 민족이나 국가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통해 이러한 인식이 잘못된 것임을 밝힐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경주의 다른 이름으로 쓰였던 것이 바로 그 예이다. 즉 신라인이란 바로 경주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였다는 점에서 고구려인도 평양사람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말갈과 고구려 유민의 과계가 다른 국가의 구성원이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말갈이라는 호칭이 중국사서에 6세기 무렵 갑자기 등장하는 데다 그 영역이 숙신과 읍루의 거주지였던 쑹화(松花) 강 중하류를 넘어 만주 전역과 한반도 북부로 확대됐다는 점에서 중국인들의 말하는 말갈은 말갈족이 자신들을 지칭해 부르던 명칭이 아니라 당나라 사람들이 만주이역의 주민들을 통틀어 부르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속말갈, 백산말갈, 흑수말갈과 같이 말갈 앞에 붙은 지역 명칭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 속말갈은 송화강 지역의 주민들을 뜻하고 백산말갈은 백두산 지역의 주민을 말하며 흑수말갈은 흑?
두 나라의 역사적 연계성을 파악할 수 있는 조건에는 크게 혈연적 연계성과 문화적 연계성 그리고 지리적 연계성으로 나눠볼 수 있다. 발해의 영토는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과 러시아의 영역에 걸쳐있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로 볼 수 없다는 동북공정의 핵심은 바로 이러한 지리적 연계성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중국 측이 주장하는 지리적 연계성은 오늘날의 중국의 국경 개념에 맞춰진 것이므로 고대국가의 지리적 연계성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발해는 건국 후 29년인 727년(무왕 대무예 9년) 일본에 국교를 회복하기 위해 사절을 보내면서 발해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 (復高麗之舊居 有夫餘之遺俗)’ (속일본기 神龜5년 1월 17일조)
며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기록을 통해 보면 부여의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는 문화적 연계성과 더불어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했다는 지리적 연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문제시 되는 발해가 고구려 유민이 아닌 중국의 변방 부족인 말갈족이 세운 국가라는 주장을 말끔히 해소시키는 부분이다. 그리고 <요사 遼史>에서 보면 고구려에서 발해로 연계된 지명을 몇몇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역시 고구려와 발해의 지리적 연계성을 밝히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비록 요사가 원대에 칙명에 의해 짧은 기간에 이루어졌으며 발해와 전쟁하여 승리한 승리자의 시각이 다분히 들어있다고는 할 수 있으나 다른 역사서에 비해 발해의 멸망까지 유일하게 다루고 있는 사료라는 점에서 오히려 연구해볼만한 사료라 판단되었다. <요사>에 언급된 발해와 고구려 지명의 연계성을 소개해보겠다.
첫째, 고구려의 백석성, 즉 백암성을 들 수 있다. 당은 성주가 항복한 이곳을 ‘암주(巖州)’라고 했는데 <요사>지리지에는 이 암주의 백암군은 원래 발해의 백암성이라고 했다고 한다.
둘째, 발해의 서경 압록부는 요나라 때에는 녹주 압록군 절도였는데, 원래 그곳은 고구려의 고국이었다고 했다. 녹주의 예하에는 환주 풍주 정주 모주가 있었는데 환주는 고구려의 중도성이었고, 정주는 비류왕의 고지로서 발해는 이곳에 비류군을 두었다고 했다. 이로써 판단하건데 고구려의 발상지가 그대로 발해의 서경압록부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막힐부는 부여의 고지였는데 고구려 시대에 막힐부를 설치했고, 발해가 이를 그래도 이어받았다고 했다.
넷째, 발해의 동경 용원부에는 모두 15개의 현이 있었다. 그 가운데 경주 예하의 웅산현이 있는데, 당의 설인귀가 고구려를 공략할 때에 고구려의 장군 온사문과 싸웠다는 곳이다. 이로써 고구려의 동변이 곧 발해의 동쪽 변계의 중심이었다고 본다. 특히 4세기에 이미 고구려에 예속된 동옥저의 기사를 보면 고구려와 발해의 동변의일부가 겹친다고 판단할 수가 있다. 연구총서. 고구려와 발해의 계승관계. 정진헌. 고구려연구재단.2005
이상의 결과를 종합해보자면 발해는 고구려 영역의 중심부를 온전히 계승했다고 본다. 발해와 고구려의 지명의 해석이 온전히 정확하게 이루어진 부분이 그리 많지 않은 점을 고려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각각의 지명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여러 사료에서 기록된 자료들을 통해 발해와 고구려의 강역을 표시한 지도를 비교해보면 발해의 세력권과 고구려의 세력권이 상당 부분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오히려 발해는 고구려의 중심부를 기반으로 삼으면서 좀 더 동북변으로 확장시켰다고 볼 수 있으며 앞서 말했던 발해의 외교문서를 통해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주민구성으로 본 계승 관계_말갈인과 고구려
최근 동북공정의 연구 성과로 출간된 \'발해국사\'의 주저자인 웨이궈중(魏國忠) 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원은 발표문에서 말갈은 발해를 건국한 중심종족명인 동시에 초기 국명이라는 주장을 거듭했다. 그는 \'발해를 세운 대조영이 당나라의 발해군왕 책봉을 받아들인 후 말갈 호칭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 불렀다\'는 신당서 등의 역사 기록을 중심으로 이런 주장을 펼쳤다. 이는 동북공정에서 중국인들이 발해가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로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지배층이었으나 대다수는 말갈인 이라는 것이다. 혹은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의 출신성분을 고구려가 아닌 말갈족으로 보아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말갈인의 나라라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구당서에서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이다 (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 구당서(권 199 하) 발해말갈전
라고 확실히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별종이란 ‘어디서 나온 가지’라는 뜻으로 발해가 고구려와 별개의 국가가 아님을 말해주고 있다. 웨이궈중이 참고한 신당서는 구당서 이후 100년 이상 지난 1060년 송나라 구양수, 송기 등이 편찬한 사서인데 이에 비해 구당서는 발해가 멸망하고 19년 후인 945년에 편찬된 사서로 발해의 근원을 밝히기에는 신당서보다 더 적합한 사료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고 신당서에서 ‘國人’이란 발해의 지배층을 일컫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을 들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전혀 다른 민족이나 국가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통해 이러한 인식이 잘못된 것임을 밝힐 수 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경주의 다른 이름으로 쓰였던 것이 바로 그 예이다. 즉 신라인이란 바로 경주 사람을 지칭하는 말로도 쓰였다는 점에서 고구려인도 평양사람을 지칭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따라서 말갈과 고구려 유민의 과계가 다른 국가의 구성원이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말갈이라는 호칭이 중국사서에 6세기 무렵 갑자기 등장하는 데다 그 영역이 숙신과 읍루의 거주지였던 쑹화(松花) 강 중하류를 넘어 만주 전역과 한반도 북부로 확대됐다는 점에서 중국인들의 말하는 말갈은 말갈족이 자신들을 지칭해 부르던 명칭이 아니라 당나라 사람들이 만주이역의 주민들을 통틀어 부르던 명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속말갈, 백산말갈, 흑수말갈과 같이 말갈 앞에 붙은 지역 명칭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때 속말갈은 송화강 지역의 주민들을 뜻하고 백산말갈은 백두산 지역의 주민을 말하며 흑수말갈은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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