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서론
본론
제1장 황진이의 생애
제1절 출생 배경
제2절 시대적 배경
제3절 황진이가 기녀가 된 동기
제2장 황진이의 문학세계
제1절 시조 문학 세계
제2절 한시 문학 세계
1) 예술로 승화된 여심
2) 은유된 기녀의 삶
제3장 황진이 시조의 문학사적 위상
제4장 황진이 작품의 일반적 특징
제5장 황진이 문학의 한계
결론
본론
제1장 황진이의 생애
제1절 출생 배경
제2절 시대적 배경
제3절 황진이가 기녀가 된 동기
제2장 황진이의 문학세계
제1절 시조 문학 세계
제2절 한시 문학 세계
1) 예술로 승화된 여심
2) 은유된 기녀의 삶
제3장 황진이 시조의 문학사적 위상
제4장 황진이 작품의 일반적 특징
제5장 황진이 문학의 한계
결론
본문내용
에서 삼베를 빨고 있는데, 다리 위에서 인물이 좋고 옷을 잘 차려 입은 한 남자가 자기를 눈여겨 바라보며 웃기도 하고 손짓도 하여 현금 역시 마음이 동했다. 그런데 그 사람이 갑자기 보이지 않다가 해질 무렵이 되어 여느 아낙네들이 다 가버리자 다시 나타났다. 그는 교각에 기대어 긴 노래를 부르더니 현금에게 다가와 물을 달라고 하였다.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떠서 주자 반쯤 마시더니 미소를 지으며 현금에게도 마셔보라고 하였다. 현금이 마셔보니 그것은 물이 아니고 술이었다. 그녀는 매우 놀라 이상하게 여겼다. 이러한 인연으로 진이가 출생했다. 라고 하였다.
황진이의 출생에 관한 부분은 그녀의 비범함을 알리기 위하여 과장 또는 미화되어 있다. 하나는 황진사의 서녀설이요, 다른 하나는 맹인의 자식이라는 설이다. 이 외에도 “황진이는 황진사의 서녀도 아니요, 하물며 신선의 딸도 아닌 서민층의, 그것도 천한 가문의 사생아였을 것이다.” 김용숙 ,「황진이의 전기적 연구」 강전섭 편저 (1986),「황진이 연구」,창학사, p.185
라는 주장도 있다.
황진이의 생존연대는 빠르면 연산군 3년(1497년 A. D)부터 인종 1년(1545년 A. D)까지, 늦어도 중종 7년(1512년 A. D)부터 명종 21년(1567년 A. D)까지의 기간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황진이의 생존 기간은 약 48년 이상이 되는 셈이다.
황진이는 역사속의 실존 인물이지만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흥미 위주로 왜곡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출생에 관한 사실을 단언하기는 어렵다.
제2절 시대적 배경
조선사회는 유교 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된 사회였다. 초기에 미신을 타파하기 위하여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를 폐지하는 동시에 불교의 도승제도를 폐지하도였으며, 도성 안의 요승, 무가를 적발하여 처치하고 새로이 절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를 취하면서 유교 주의적 향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향약을 전국화 하였다. 한때 조광조 일파의 몰락으로 주춤하기는 하였으나, 그 뒤 유교주의화 정책은 더욱 추진되어 소학, 이륜행실, 속삼강행실 등을 간행하여 국민교화에 힘써 유교 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갔다.
한국 고대의 여인사는 인고와 비련과 궁핍과 고독으로 엮어진 애한의 역사였다. 그 밑바닥으로 흐르는 것은 항상 인종을 위한 침묵과 기다림 속에서 당하는 번뇌와 가난에서 오는 생활고였다. 이러한 사회질서와 조선시대를 풍비했던 유교사상 속에 인습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삶과 사랑을 구하며 생명을 살았던 기생들에게서 진실 된 문학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질서와 규범, 도리와 법도 속에 자신을 희생하는 자세와 남성위주의 법칙 속에 인종만을 거듭하던 현실에서 그 정당하고도 필연적인 규방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기생의 자유분방함과 사랑에 살아왔던 기류문학에서 참다운 문학정신은 꽃 필 수 있었던 것이다.
제3절 황진이가 기녀가 된 동기
황진이가 기녀가 된 동기에는 구구한 전설이 많은데, 그녀의 용모가 너무나 아름답고 일거일동이 예절바름에 감탄해서 연정을 품었던 이웃에 사는 \'홍윤보\'라는 총각이 있었다. 가난한 살림에 보잘 것 없는 신분이었으나 어려서부터 같은 이웃에서 자라온 진이의 모습이 그의 마음속에 큰 비중으로 자리를 잡아갔으나 커서 정을 느끼게 되었을 때는 그녀는 자기가 생각할 수 없는 먼 곳으로 자꾸자꾸 멀어져 갔다. 진이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기회도 영영 오지 않았다. 마침내 상사병으로 몸 져 눕게 되고 안타까움을 하소연도 못한 채 아지랑이가 운무처럼 내리는 이른 봄 어느 날 눈을 감고 말았다.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도중 진이의 문 앞에 이르러선 움직이지 않아 열다섯 앳된 처녀가 된 진이가 평소에 즐겨 입던 속적삼과 꽃신을 주어 운구를 덮게 하니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이 일로 감정이 예민한 사춘기의 진이는 항상 마음이 괴로웠고, 날이면 날마다 자기를 그토록 애절하게 그리다가 죽어간 넋을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미모로 인하여 또 다른 총각을 죽일까 염려하여 스스로 명월이라 하며 기생이 되었다고 하는 설, 또한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서출임을 비관하여 기생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제2장 황진이의 문학세계
한국 고전 문학을 살펴볼 때 뛰어난 문학적 수준을 보여준 여성 시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황진이이다. 비록 적은 수의 작품을 남겼지만 각각의 작품들이 이룩한 문학적 완성도에 있어서 어느 사대부에 못지 않다. 오히려 조선 시대의 남성에게 의지하며 살아야 했던 소극적 여성으로의 삶과 대담한 성 개방 의식을 갖고 있던 기녀로서의 삶이 함께 해 특유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황진이의 문학은 그녀의 사회적 신분이 기녀였다는 데서 ‘기류문학(妓類文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사회적 신분으로 문학의 종류를 분류하는 것으로 출생 신분에 의한 계급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는 불평등한 조건 아래에서는 황진이의 문학에 대한 평가의 방법으로는 타당치 않다.
한편, 황진이의 문학을 ‘여류문학(女流文學)’이라고도 하는데, 기류문학을 포함하는 여성의 문학이라는 점에서 기류문학보다는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으나, 이 또한 ‘남성문학’에 대비해서 명명했다. 이는 양분법적인 분류 방식으로 옳지 않다. 이러한 방법으로 한다면 남성들의 문학은 모두 남성문학으로 평가해야 될 것이다.
황진이의 문학은 ‘황진이의 문학’이요 우리 민족 문화 가운데 시대적 분류상 조선 시대 문학의 하나로 평가되어야 한다. 한국 문학 중 시문학의 한 축으로 애정 문학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황진이의 문학 작품 가운데 시조와 한시 작품의 주제와 구조와 표현 기교, 정서 등을 살펴 황진이의 문학 작품이 우리 한국 고전 시가 문학 가운데 차지하는 위상을 더욱 굳건히 하고 한층 더 높이고자 한다.
제1절 시조 문학 세계
황진이의 시조는 모두 6수가 전한다. 영조연간에 편찬된 남파 김천택의 「원본청구영언」(1728)과 노가재 김수장의 「해동가요」(1755)에 각각 기명(記名)되어 전하는 5수 〈청산리 벽계수야〉,〈冬至ㅅ 기나긴 밤을〉,〈내 언제 無信여〉,〈山은
황진이의 출생에 관한 부분은 그녀의 비범함을 알리기 위하여 과장 또는 미화되어 있다. 하나는 황진사의 서녀설이요, 다른 하나는 맹인의 자식이라는 설이다. 이 외에도 “황진이는 황진사의 서녀도 아니요, 하물며 신선의 딸도 아닌 서민층의, 그것도 천한 가문의 사생아였을 것이다.” 김용숙 ,「황진이의 전기적 연구」 강전섭 편저 (1986),「황진이 연구」,창학사, p.185
라는 주장도 있다.
황진이의 생존연대는 빠르면 연산군 3년(1497년 A. D)부터 인종 1년(1545년 A. D)까지, 늦어도 중종 7년(1512년 A. D)부터 명종 21년(1567년 A. D)까지의 기간을 벗어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황진이의 생존 기간은 약 48년 이상이 되는 셈이다.
황진이는 역사속의 실존 인물이지만 후세 사람들에 의하여 흥미 위주로 왜곡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그녀의 출생에 관한 사실을 단언하기는 어렵다.
제2절 시대적 배경
조선사회는 유교 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된 사회였다. 초기에 미신을 타파하기 위하여 도교적 요소가 강한 소격서를 폐지하는 동시에 불교의 도승제도를 폐지하도였으며, 도성 안의 요승, 무가를 적발하여 처치하고 새로이 절을 짓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조처를 취하면서 유교 주의적 향촌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향약을 전국화 하였다. 한때 조광조 일파의 몰락으로 주춤하기는 하였으나, 그 뒤 유교주의화 정책은 더욱 추진되어 소학, 이륜행실, 속삼강행실 등을 간행하여 국민교화에 힘써 유교 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갔다.
한국 고대의 여인사는 인고와 비련과 궁핍과 고독으로 엮어진 애한의 역사였다. 그 밑바닥으로 흐르는 것은 항상 인종을 위한 침묵과 기다림 속에서 당하는 번뇌와 가난에서 오는 생활고였다. 이러한 사회질서와 조선시대를 풍비했던 유교사상 속에 인습을 거부하고 자유로운 삶과 사랑을 구하며 생명을 살았던 기생들에게서 진실 된 문학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질서와 규범, 도리와 법도 속에 자신을 희생하는 자세와 남성위주의 법칙 속에 인종만을 거듭하던 현실에서 그 정당하고도 필연적인 규방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기생의 자유분방함과 사랑에 살아왔던 기류문학에서 참다운 문학정신은 꽃 필 수 있었던 것이다.
제3절 황진이가 기녀가 된 동기
황진이가 기녀가 된 동기에는 구구한 전설이 많은데, 그녀의 용모가 너무나 아름답고 일거일동이 예절바름에 감탄해서 연정을 품었던 이웃에 사는 \'홍윤보\'라는 총각이 있었다. 가난한 살림에 보잘 것 없는 신분이었으나 어려서부터 같은 이웃에서 자라온 진이의 모습이 그의 마음속에 큰 비중으로 자리를 잡아갔으나 커서 정을 느끼게 되었을 때는 그녀는 자기가 생각할 수 없는 먼 곳으로 자꾸자꾸 멀어져 갔다. 진이에게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자신의 심정을 토로할 기회도 영영 오지 않았다. 마침내 상사병으로 몸 져 눕게 되고 안타까움을 하소연도 못한 채 아지랑이가 운무처럼 내리는 이른 봄 어느 날 눈을 감고 말았다.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도중 진이의 문 앞에 이르러선 움직이지 않아 열다섯 앳된 처녀가 된 진이가 평소에 즐겨 입던 속적삼과 꽃신을 주어 운구를 덮게 하니 비로소 상여가 움직였다고 한다.
이 일로 감정이 예민한 사춘기의 진이는 항상 마음이 괴로웠고, 날이면 날마다 자기를 그토록 애절하게 그리다가 죽어간 넋을 생각한 나머지 자신의 미모로 인하여 또 다른 총각을 죽일까 염려하여 스스로 명월이라 하며 기생이 되었다고 하는 설, 또한 자신의 출생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서출임을 비관하여 기생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제2장 황진이의 문학세계
한국 고전 문학을 살펴볼 때 뛰어난 문학적 수준을 보여준 여성 시인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황진이이다. 비록 적은 수의 작품을 남겼지만 각각의 작품들이 이룩한 문학적 완성도에 있어서 어느 사대부에 못지 않다. 오히려 조선 시대의 남성에게 의지하며 살아야 했던 소극적 여성으로의 삶과 대담한 성 개방 의식을 갖고 있던 기녀로서의 삶이 함께 해 특유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황진이의 문학은 그녀의 사회적 신분이 기녀였다는 데서 ‘기류문학(妓類文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사회적 신분으로 문학의 종류를 분류하는 것으로 출생 신분에 의한 계급의 세습화가 이루어지는 불평등한 조건 아래에서는 황진이의 문학에 대한 평가의 방법으로는 타당치 않다.
한편, 황진이의 문학을 ‘여류문학(女流文學)’이라고도 하는데, 기류문학을 포함하는 여성의 문학이라는 점에서 기류문학보다는 진일보했다고 볼 수 있으나, 이 또한 ‘남성문학’에 대비해서 명명했다. 이는 양분법적인 분류 방식으로 옳지 않다. 이러한 방법으로 한다면 남성들의 문학은 모두 남성문학으로 평가해야 될 것이다.
황진이의 문학은 ‘황진이의 문학’이요 우리 민족 문화 가운데 시대적 분류상 조선 시대 문학의 하나로 평가되어야 한다. 한국 문학 중 시문학의 한 축으로 애정 문학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황진이의 문학 작품 가운데 시조와 한시 작품의 주제와 구조와 표현 기교, 정서 등을 살펴 황진이의 문학 작품이 우리 한국 고전 시가 문학 가운데 차지하는 위상을 더욱 굳건히 하고 한층 더 높이고자 한다.
제1절 시조 문학 세계
황진이의 시조는 모두 6수가 전한다. 영조연간에 편찬된 남파 김천택의 「원본청구영언」(1728)과 노가재 김수장의 「해동가요」(1755)에 각각 기명(記名)되어 전하는 5수 〈청산리 벽계수야〉,〈冬至ㅅ 기나긴 밤을〉,〈내 언제 無信여〉,〈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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