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1쪽
Ⅱ. 본론·························································
1쪽
1. 三人의 생애와 문학세계·····································
1쪽
1) 송강 정철···················································
1쪽
2) 노계 박인로·················································
3쪽
3) 고산 윤선도·················································
4쪽
2. 시조(短歌)의 비교···········································
5쪽
1) 송강의 시조················································
5쪽
2) 노계의 시조················································
8쪽
3) 고산의 시조················································
9쪽
4) 송강·노계·고산의 시조 비교·································
11쪽
3. 가사(長歌)의 비교···········································
11쪽
1) 송강의 가사················································
11쪽
2) 노계의 가사················································
13쪽
3) 송강·노계의 가사 비교······································
16쪽
4. 시가의 후대적 수용··········································
16쪽
1) 후대적 수용················································
16쪽
2) 현대적 변용················································
16쪽
Ⅲ. 결론·························································
19쪽
□ 참고문헌·····················································
19쪽
1쪽
Ⅱ. 본론·························································
1쪽
1. 三人의 생애와 문학세계·····································
1쪽
1) 송강 정철···················································
1쪽
2) 노계 박인로·················································
3쪽
3) 고산 윤선도·················································
4쪽
2. 시조(短歌)의 비교···········································
5쪽
1) 송강의 시조················································
5쪽
2) 노계의 시조················································
8쪽
3) 고산의 시조················································
9쪽
4) 송강·노계·고산의 시조 비교·································
11쪽
3. 가사(長歌)의 비교···········································
11쪽
1) 송강의 가사················································
11쪽
2) 노계의 가사················································
13쪽
3) 송강·노계의 가사 비교······································
16쪽
4. 시가의 후대적 수용··········································
16쪽
1) 후대적 수용················································
16쪽
2) 현대적 변용················································
16쪽
Ⅲ. 결론·························································
19쪽
□ 참고문헌·····················································
19쪽
본문내용
가〉를 지었다. 그 밖에 가사 〈입암별곡 立巖別曲〉과 〈소유정가 小有亭歌〉가 전하는데, 가사가 9편이고 시조는 68수에 이른다.
말년에는 천석(泉石)을 벗하여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다가 1642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양군 남쪽 대랑산(大朗山)에 안장되었다. 죽은 뒤에 향리의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여 1707년(숙종 33)에 생장지인 도천리에 도계서원(道溪書院)을 세워 춘추제향하고 있다.
그는 비록 후반생부터 문인활동을 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鄭澈)에 버금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3권 2책으로 이루어진 ≪노계집≫과 필사본 등에 실려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시가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록 시조를 즐겨 지어 완전히 생활화했지만, 국문학사상 의의는 가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 재능도 가사에 더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3) 고산 윤선도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 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 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 했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 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 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 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 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 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되었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 문제(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해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문학적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 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 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문집 ≪고산선생유고 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 가인(三大歌人)으로 일컬어지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시조(短歌)의 비교
1) 송강의 시조
(1) 감상적 정조
훈민가(訓民歌)를 제외한 송강의 시조는 님(임금)을 중심으로 한 이별기다림그리움이 중심이 되는 감상적 정조를 띠고 있다. 즉, 이별의 한(恨)과 고독, 그리움은 그의 시심(詩心)을 지배하는 세 가지 주된 요소이며, 감상적 정조를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
길우 두돌부텨 벗고굼고 마조셔셔
람비 눈서리 맛도록 마만졍
人間에 離別을 모니 그 부러워노라
위의 시조에서 벗고 굶고 바람비 눈서리 싫도록 맞아도 정답게 마주 서 있는 돌부처의 모습을 부러워하는 시인은 추위굶주림바람비눈서리보다 더한 님(임금)과의 이별의 슬픔에 젖어 있다.
花灼灼 범나
말년에는 천석(泉石)을 벗하여 안빈낙도하는 삶을 살다가 1642년에 세상을 떠났다. 영양군 남쪽 대랑산(大朗山)에 안장되었다. 죽은 뒤에 향리의 선비들이 그를 흠모하여 1707년(숙종 33)에 생장지인 도천리에 도계서원(道溪書院)을 세워 춘추제향하고 있다.
그는 비록 후반생부터 문인활동을 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매우 풍요로워서 정철(鄭澈)에 버금가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작품들은 3권 2책으로 이루어진 ≪노계집≫과 필사본 등에 실려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시가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소실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비록 시조를 즐겨 지어 완전히 생활화했지만, 국문학사상 의의는 가사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의 문학적 재능도 가사에 더 잘 나타나 있다고 할 수 있다.
3) 고산 윤선도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 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유기(唯幾)의 양자다. 유기는 유심의 동생으로 큰댁에 입양되었고, 선도는 유기에게 입양되어 가계를 이었다. 당시 금서(禁書)였던 『소학 小學』을 보고 감명을 받아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18세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陞補試)에 1등 했으며 향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1616년(광해군 8) 성균관 유생으로서 이이첨(李爾瞻)·박승종(朴承宗)·유희분(柳希奮) 등 당시 집권 세력의 죄상을 격렬하게 규탄하는 『병진소 丙辰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이이첨 일파의 모함을 받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견회요 遣懷謠』 5수와 『우후요 雨後謠』 1수 등 시조 6수를 지었다. 1년 뒤 경상남도 기장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이이첨 일파가 처형된 뒤 풀려나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만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내려갔다. 그 뒤 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1628년(인조 6)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33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예조정랑·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그러나 1634년 강석기(姜碩期)의 모함으로 성산현감(星山縣監)으로 좌천된 뒤, 이듬해 파직되었다. 그 뒤 해남에서 지내던 중 병자호란이 일어나 왕이 항복하고 적과 화의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이를 욕되게 생각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甫吉島)의 수려한 경치에 이끌려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그 일대를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격자봉(格紫峰) 아래 집을 지어 낙서재(樂書齋)라 하였다. 그는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十二亭閣)·세연정(洗然亭)·회수당(回水堂)·석실(石室) 등을 지어 놓고 마음껏 풍류를 즐겼다.
그러나 난이 평정된 뒤 서울에 돌아와서도 왕에게 문안드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1638년 다시 경상북도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이로부터 10년 동안 정치와는 관계없이 보길도의 부용동과 새로 발견한 금쇄동(金鎖洞)의 산수 자연 속에서 한가한 생활을 즐겼다. 이 때 금쇄동을 배경으로 『산중신곡 山中新曲』·『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고금영 古今詠』·『증반금 贈伴琴』 등을 지었다. 그 뒤 1651년(효종 2)에는 정신적 안정 속에서 보길도를 배경으로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를 지었다.
다음해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하고 경기도 양주 땅 고산(孤山)에 은거하였다.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 夢天謠』는 이곳에서 지은 것이다. 1657년, 71세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동부승지에 이르렀으나 서인 송시열(宋時烈) 일파와 맞서다가 삭탈관직되었다. 이 무렵 『시무팔조소 時務八條疏』와 『논원두표소 論元斗杓疏』를 올려 왕권의 확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1659년 효종이 죽자 예론 문제(禮論問題)로 서인파와 맞서다가 패배해 삼수에 유배되었다가, 1667년 풀려나 부용동에서 살다가 그곳 낙서재에서 85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자연을 문학의 제재로 채택한 시조 작가 가운데 가장 탁월한 역량을 나타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 문학적 특징은 자연을 제재로 하되 그것을 사회의 공통적 언어 관습과 결부시켜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개성적 판단에 의한 어떤 관념을 표상하기 위해 그것을 임의로 선택하기도 한 데에 있다. 또, 대부분의 경우 자연은 엄격히 유교적인 윤리 세계와 관련을 맺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과 직접적인 대결을 보인다든가 생활 현장으로서의 생동하는 자연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그가 자연이 주는 시련이나 고통을 전혀 체험하지 못하고 유족한 삶만을 누렸기 때문이다.
문집 ≪고산선생유고 孤山先生遺稿≫에 한시문(漢詩文)이 실려 있으며, 별집(別集)에도 한시문과 35수의 시조, 40수의 단가(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또, 친필로 된 가첩(歌帖)으로 『산중신곡』, 『금쇄동집고 金鎖洞集古』 2책이 전한다.
정철(鄭澈)·박인로(朴仁老)와 함께 조선시대 삼대 가인(三大歌人)으로 일컬어지는데, 이들과는 달리 가사(歌辭)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나 창작한 점이 특이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시조(短歌)의 비교
1) 송강의 시조
(1) 감상적 정조
훈민가(訓民歌)를 제외한 송강의 시조는 님(임금)을 중심으로 한 이별기다림그리움이 중심이 되는 감상적 정조를 띠고 있다. 즉, 이별의 한(恨)과 고독, 그리움은 그의 시심(詩心)을 지배하는 세 가지 주된 요소이며, 감상적 정조를 형성하는 토대가 된다.
길우 두돌부텨 벗고굼고 마조셔셔
람비 눈서리 맛도록 마만졍
人間에 離別을 모니 그 부러워노라
위의 시조에서 벗고 굶고 바람비 눈서리 싫도록 맞아도 정답게 마주 서 있는 돌부처의 모습을 부러워하는 시인은 추위굶주림바람비눈서리보다 더한 님(임금)과의 이별의 슬픔에 젖어 있다.
花灼灼 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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