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 관
Ⅱ. 르네상스
1. 르네상스의 발생배경
2. 인문주의
3. 르네상스 미슬
4. 알프스 이북 르네상스
Ⅲ. 종교 개혁
1. 종교개혁의 배경
2. 종교개혁의 전개
1) 루터의 종교개혁
2) 칼뱅의 종교개혁
3) 영국의 종교개혁
4) 가톨릭교회의 종교개혁
3. 신․구교의 종교전쟁
1) 네덜란드 독립전쟁
2)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
3) 30년 전쟁
Ⅳ. 절대왕정
1. 서유럽 절대왕정의 성격
2. 동유럽 절대왕정의 성격
-참고문헌
Ⅱ. 르네상스
1. 르네상스의 발생배경
2. 인문주의
3. 르네상스 미슬
4. 알프스 이북 르네상스
Ⅲ. 종교 개혁
1. 종교개혁의 배경
2. 종교개혁의 전개
1) 루터의 종교개혁
2) 칼뱅의 종교개혁
3) 영국의 종교개혁
4) 가톨릭교회의 종교개혁
3. 신․구교의 종교전쟁
1) 네덜란드 독립전쟁
2)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
3) 30년 전쟁
Ⅳ. 절대왕정
1. 서유럽 절대왕정의 성격
2. 동유럽 절대왕정의 성격
-참고문헌
본문내용
속하면서, 1581년 7월 독립을 선언하고 빌렘 1세를 초대 총독으로 하는 네덜란드연방공화국을 세웠다. 이후 빌렘 1세가 암살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1588년에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격파되고, 1598년 펠리페 2세가 사망하는 등 에스파냐의 불안으로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점점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1609년에는 에스파냐 왕 펠리페 3세(Felipe III, 1578~1621)와 12년간의 휴전협정을 맺게 되고, 독립전쟁은 일단락되게 된다.
2)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1562~1598)
프랑스는 신교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프랑수아 1세 때부터 일관적으로 신교에 대한 탄압 일변도의 정책을 펼친다. 이에 대항해 프랑스 남부에 널리 퍼져있던 칼뱅파 신교도를 위그노라 한다. 구교와 신교의 대립은, 프랑스의 강경파 가톨릭 귀족가문인 기즈 가문(Les Guise)의 공작이 1562년에 예배 중인 위그노를 기습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위그노 전쟁이라는 과격한 형태로 드러났다. 1572년 8월에는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만명에 육박하는 위그노가 희생된 유혈극이 벌어지기까지 했고, 위그노와 가톨릭 양측의 유혈사태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위그노전쟁은 신구교의 대립, 왕위계승문제가 얽힌 프랑스의 내부적 문제였을 뿐 아니라, 에스파냐가 가톨릭을, 영국이 위그노를 지원함으로써 국가 간의 분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 샤를 9세(Charles IX, 1550~1574)가 죽고, 신교에 대해 다소 온화한 입장이었던 앙리 3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약간 호전되는 기미를 보였고,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위그노의 수장 격이었던 나바르(Navarre)의 왕인 앙리 4세(Henri IV, 1589.~1610)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전쟁의 종결이 눈앞에 다가왔다. 위그노의 지도자인 앙리 4세의 왕위 계승은 가톨릭의 반발에 부딪혔으나, 앙리 4세는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1593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한편, 1598년에 낭트 칙령(Edict of Nantes)를 반포하여 일정한 지역 내에서의 위그노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3) 30년 전쟁(1618~1648)
루터파, 칼뱅파 등의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은 각기의 투쟁의 결과로 제한적이나마 세력 기반을 마련하였고, 구교와 신교 간의 갈등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강상태는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 종교 분쟁의 소지는 여전히 각처에 남아있었다. 이러한 불안요소는 진원지인 독일을 비롯한 전 유럽을 전란에 휩쓸리게 한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사건으로 폭발하게 된다.
전쟁의 진원지인 독일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종교문제에 있어 소강상태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들어,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세력이 현저한 회복세에 접어들고, 독일에서는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한 칼뱅파 교도들이 확산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신교의 지위가 불안해짐을 느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17세기 초 칼뱅파의 팔츠 선제후를 중심으로 연합을 맺고, 가톨릭은 이에 대항하여 바이에른공을 중심으로 동맹을 결성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 보헤미아에서 전쟁의 발단이 되는 분쟁이 일어난다. 보헤미아는 종교개혁의 선구격인 후스운동의 본고장으로, 신교도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런데 1617년, 완고한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1578~1637)가 보헤미아 왕이 되어, 보헤미아의 신교도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은 1618년에 팔츠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Friedrich V, 1596~1632)를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페르디난트는 1619년 독일 황제에 즉위하고, 전황도 가톨릭 동맹의 지원을 받은 페르디난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신교 반란군은 1620년에 격파된다. 이에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보헤미아는 페르디난트에게 점령되어 합스부르크의 세습 왕국이 된다.
그러나 사태는 이로써 마무리되지 않고, 타국의 개입으로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먼저 1625년에, 북부독일에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던 루터파 덴마크왕 크리스찬 4세(Christian Ⅳ, 1588~1648)가 신교도를 지원하며 전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황제군에 의해 격파되고 황제와 가톨릭의 기세는 더욱 거세어졌다. 다음으로 1630년에 발트해의 패권을 노리던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 1611~1632)가 신교도를 지원하며 참전한다. 스웨덴군은 덴마크군과는 달리 승전을 거듭했으나, 1632년의 뤼첸(Lutzen) 전투에서 구스타프가 전사했고, 그 후로는 패전을 거듭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이로써 전쟁은 황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제위세습을 위해서라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게 완전히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에 황제는 1635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화해하게 된다.
그러나 개전 초기부터 재정적으로 독일 내의 신교세력과 덴마크, 스웨덴을 지원하고 있던 프랑스의 참전으로 전쟁은 다시 한 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프랑스는 가톨릭국가였기 때문에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꺼렸지만, 독일과 에스파냐의 사이에 위치한 프랑스로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승승장구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프랑스는 스웨덴의 패색이 짙어진 1635년에 직접 참전을 결정한다. 프랑스군의 참전과 함께 스웨덴군도 전열을 정비해 공격을 재개한다. 독일에서의 전황도 프랑스에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었고, 에스파냐에서도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 강세를 보이는 등 전반적으로 황제군의 진영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에 황제군은 화의를 모색하기 시작하여 1642년에 화평회의가 설치되었으나 교섭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1644년에서야 교섭이 시작되었고, 그 후로도 전황이 복잡하게 전개되어 느린 속도로 교섭이 진행되다가, 황제군의 패배가 결정적인 것이 된 1648년에 드디어 화평조약이 성립된다. 이것이 베스트팔렌(Westphalen)조약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영토에 관련된 내용인데, 프랑스는 알자스 대부분과 메스, 투르, 베르
2)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1562~1598)
프랑스는 신교가 고개를 들기 시작한 프랑수아 1세 때부터 일관적으로 신교에 대한 탄압 일변도의 정책을 펼친다. 이에 대항해 프랑스 남부에 널리 퍼져있던 칼뱅파 신교도를 위그노라 한다. 구교와 신교의 대립은, 프랑스의 강경파 가톨릭 귀족가문인 기즈 가문(Les Guise)의 공작이 1562년에 예배 중인 위그노를 기습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위그노 전쟁이라는 과격한 형태로 드러났다. 1572년 8월에는 ‘성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이라고 불리는, 만명에 육박하는 위그노가 희생된 유혈극이 벌어지기까지 했고, 위그노와 가톨릭 양측의 유혈사태는 계속되었다. 이러한 위그노전쟁은 신구교의 대립, 왕위계승문제가 얽힌 프랑스의 내부적 문제였을 뿐 아니라, 에스파냐가 가톨릭을, 영국이 위그노를 지원함으로써 국가 간의 분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왕 샤를 9세(Charles IX, 1550~1574)가 죽고, 신교에 대해 다소 온화한 입장이었던 앙리 3세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약간 호전되는 기미를 보였고, 앙리 3세의 뒤를 이어 위그노의 수장 격이었던 나바르(Navarre)의 왕인 앙리 4세(Henri IV, 1589.~1610)가 프랑스 왕위를 계승함으로써 전쟁의 종결이 눈앞에 다가왔다. 위그노의 지도자인 앙리 4세의 왕위 계승은 가톨릭의 반발에 부딪혔으나, 앙리 4세는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 1593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한편, 1598년에 낭트 칙령(Edict of Nantes)를 반포하여 일정한 지역 내에서의 위그노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3) 30년 전쟁(1618~1648)
루터파, 칼뱅파 등의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은 각기의 투쟁의 결과로 제한적이나마 세력 기반을 마련하였고, 구교와 신교 간의 갈등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소강상태는 일시적인 것이었을 뿐, 종교 분쟁의 소지는 여전히 각처에 남아있었다. 이러한 불안요소는 진원지인 독일을 비롯한 전 유럽을 전란에 휩쓸리게 한 30년 전쟁(1618~1648)이라는 사건으로 폭발하게 된다.
전쟁의 진원지인 독일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로 종교문제에 있어 소강상태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러나 16세기 말에 들어,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세력이 현저한 회복세에 접어들고, 독일에서는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한 칼뱅파 교도들이 확산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신교의 지위가 불안해짐을 느낀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은 17세기 초 칼뱅파의 팔츠 선제후를 중심으로 연합을 맺고, 가톨릭은 이에 대항하여 바이에른공을 중심으로 동맹을 결성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 보헤미아에서 전쟁의 발단이 되는 분쟁이 일어난다. 보헤미아는 종교개혁의 선구격인 후스운동의 본고장으로, 신교도가 많은 지역이었다. 그런데 1617년, 완고한 가톨릭교도인 페르디난트 2세(Ferdinand II, 1578~1637)가 보헤미아 왕이 되어, 보헤미아의 신교도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에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은 1618년에 팔츠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5세(Friedrich V, 1596~1632)를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하여 전쟁이 시작되었다.
페르디난트는 1619년 독일 황제에 즉위하고, 전황도 가톨릭 동맹의 지원을 받은 페르디난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신교 반란군은 1620년에 격파된다. 이에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보헤미아는 페르디난트에게 점령되어 합스부르크의 세습 왕국이 된다.
그러나 사태는 이로써 마무리되지 않고, 타국의 개입으로 국제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먼저 1625년에, 북부독일에 세력 확대를 노리고 있던 루터파 덴마크왕 크리스찬 4세(Christian Ⅳ, 1588~1648)가 신교도를 지원하며 전쟁에 참여한다. 그러나 황제군에 의해 격파되고 황제와 가톨릭의 기세는 더욱 거세어졌다. 다음으로 1630년에 발트해의 패권을 노리던 스웨덴의 구스타프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 1611~1632)가 신교도를 지원하며 참전한다. 스웨덴군은 덴마크군과는 달리 승전을 거듭했으나, 1632년의 뤼첸(Lutzen) 전투에서 구스타프가 전사했고, 그 후로는 패전을 거듭하여 전쟁의 주도권을 상실한다. 이로써 전쟁은 황제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제위세습을 위해서라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게 완전히 등을 돌릴 수는 없었다. 이에 황제는 1635년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화해하게 된다.
그러나 개전 초기부터 재정적으로 독일 내의 신교세력과 덴마크, 스웨덴을 지원하고 있던 프랑스의 참전으로 전쟁은 다시 한 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프랑스는 가톨릭국가였기 때문에 전쟁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꺼렸지만, 독일과 에스파냐의 사이에 위치한 프랑스로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승승장구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결국 프랑스는 스웨덴의 패색이 짙어진 1635년에 직접 참전을 결정한다. 프랑스군의 참전과 함께 스웨덴군도 전열을 정비해 공격을 재개한다. 독일에서의 전황도 프랑스에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었고, 에스파냐에서도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이 강세를 보이는 등 전반적으로 황제군의 진영은 수세에 몰리고 있었다. 이에 황제군은 화의를 모색하기 시작하여 1642년에 화평회의가 설치되었으나 교섭은 지지부진하게 진행되었다. 1644년에서야 교섭이 시작되었고, 그 후로도 전황이 복잡하게 전개되어 느린 속도로 교섭이 진행되다가, 황제군의 패배가 결정적인 것이 된 1648년에 드디어 화평조약이 성립된다. 이것이 베스트팔렌(Westphalen)조약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영토에 관련된 내용인데, 프랑스는 알자스 대부분과 메스, 투르, 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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