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화의 탄생과 시대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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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 영화의 탄생과 시대별 전개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일본영화의 시작& 역사적 전개
1.활동사진의 도래
2.대중문화로서의 정착
3.무성영화의 특징과 발전
4.무성영화 시절의 또 다른 스타, 변사(弁士)
5. 유성영화의 등장과 변화
6. 전쟁과 패전 속의 일본영화

Ⅱ. 전후 영화의 발전과 현황
1.일본영화의 황금기
2.스튜디오 시스템과 새로운 물결
3.영화인구 감소와 스튜디오 시스템의 붕괴
4.부가시장의 형성과 다양한 제작주체의 등장
5.21세기 일본영화의 현 주소
-참고문헌

본문내용

. 이 사건은 영화감독이 더 이상 영화회사에 소속감을 가질 수 없게 되었음을 상징한다.
도에이의 경우 소유하던 야구단 도에이 플라이어즈(東映フライヤズ)를 매각하고, 인기가 없어진 지다이게키를 촬영하던 교토 촬영소의 일부를 테마파크인 ‘도에이 우즈마사 영화마을(東映太秦映村)’로 만드는 등 생존계획을 마련해나간다. 그러한 도에이에게 적지 않은 수입을 가져다 준 것은 회사가 자랑하는 야쿠자영화였다. 의리와 인정의 세계에 살고 있는 ‘협객(客)’으로 야쿠자를 그린 1960년대와는 달리, 1970년대의 야쿠자영화는 현대도시를 배경으로 비정한 조직폭력단의 세계를 그리는 쪽으로 바뀐다. 이러한 영화들은 실제 있었던 조직폭력단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어 ‘실록노선(路線)’의 영화라 불렸다. 대표작으로 후카사쿠 긴지(深作欣二, 1930-2003) 감독의 <인의 없는 싸움(仁義なきい)>(1973)이 있다.
메이저 영화회사들이 고난을 겪고 있는 와중에, 영화계의 다른 한쪽에서는 다큐멘터리영화 제작운동이 싹을 키우고 있었다. 이러한 영화들은 정식 영화관이 아닌 강당을 빌려 상영하는 ‘자주상영회’라는 형식으로 공개되었다. 오가와 신스케(小川紳介, 1935-1992)는 1968년부터 1977년까지 나리타 국제공항부지로 선정된 토지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농민을 그린 <산리즈카(三里塚)> 시리즈를 일곱 편 만들었다. 츠치모토 노리아키(土本典昭, 1928-2008)는 미나마타병 환자들의 피해를 조사하여 <미나마타-환자씨와 그 세계(水-患者さんとその世界>(1971)를 비롯하여, 총 열일곱 편에 이르는 미나마타병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오가와 신스케와 츠지모토 노리아키는 서로 연대하면서 다큐멘터리를 찍어나갔고, 중립적인 시선보다는 철저하게 농민과 미나마타 환자 쪽에 카메라를 위치시키기는 ‘가담의 논리’를 스크린에 펼쳤다.
4. 부가시장의 형성과 다양한 제작주체의 등장
1980년대에 들어서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는 VTR이 보급되고, 현재 일본 전역에 체인점을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렌탈점 ‘츠타야(TSUTAYA)’가 1983년 문을 연다. 이후 위성TV 및 케이블TV의 보급으로 인하여 영화의 부가시장 또는 2차시장이라 불리는 새로운 시장이 형성된다. 게다가 극장개봉을 거치지 않고 비디오테이프만으로 소개되는 오리지널 비디오영화도 만들어진다. 부가시장의 규모는 일본의 경우 영화관에서 개봉되어 얻어지는 1차수입보다 훨씬 크고, 수익이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다는 특성을 지닌다. 이러한 시장의 형성은 새로운 제작주체들을 영화계로 진입하게 만들었다. 후지TV, 니혼TV와 같은 방송사는 물론이고 대기업도 영화계에 진출한다. 영화인구가 늘어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부가시장의 형성으로 영화회사들은 영화제작에 어느 정도 활기를 되찾는다. 또한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의 인기는 제작, 배급, 상영을 같이하는 영화회사에게 또 하나의 주요한 수입원이 된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감독으로는 이타미 쥬조(伊丹十三, 1933-1997)가 있다. 그는 일본인의 생활문화 속에서 특이함을 찾아내어 영화 소재로 삼았다. 장례식을 치루며 벌어지는 촌극을 그린 <장례식(お葬式)>(1984), 맛있는 라면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이야기에 인간에게 음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여러 에피소드를 섞은 <탐포포(タンポポ)>(1985), 각종 탈세수법에 대항하는 국세청 여직원을 그린 <마루사의 여자(マルサの女)>(1987), 야쿠자에 대처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여성변호사를 다룬 <민보의 여자(ミンボの女)>(1992) 등을 만들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1990년대 들어서 레이저디스크 및 이를 대신하는 DVD의 등장으로 인하여 부가시장의 판매 및 렌탈 시장은 더욱 커진다. 또한 와우와우(WOWOW) 및 스카이퍼펙트TV(スカイパフェクTV)와 같은 상업위성을 통한 방송도 시작하여 영화배급망이 다양해진다. 이러한 부가시장의 확대와 다양화와는 달리, 영화제작의 현장 및 1차시장인 영화관에는 활기가 되돌아오지 못하였다. 일본영화의 연간 제작 편수가 1960년대에는 400편 이상이었고, 1970년대에는 300편 이상을 유지하였으나, 1987년 300편 아래로 떨어져서 286편을 기록하였고, 1991년대에는 230편이라는 최저편수를 기록하게 된다. 또한 1950년대 일본영화 황금기에는 전국적으로 7,000개 이상 존재하였던 스크린이 1993년에는 1,734개로 줄어들어 최저를 기록한다.
영화회사가 감독을 키우던 시스템이 붕괴하였지만, 영화감독들은 다양한 곳에서 배출되어 개성 있는 작품들을 만들어 내었다. 먼저 감독으로 데뷔하기 쉬운 야한 영화(핑크영화) 업계로부터 메이저 영화로 진출하는 경우가 있다. 수오 마사유키(周防正行, 1956- ) 감독은 오즈 야스지로 영화 속의 일본적 가정을 근친상간이 벌어지는 곳으로 패러디한 <변태가족, 형의 아내(態家族兄貴の嫁さん)>(1984)라는 영화로 데뷔하여 주목을 받고, 일반극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는 절의 주지 자격을 따기 위해 수련을 떠나는 대학생이야기 <팬시댄스(ファンシイダンス)>(1989), 인기가 없는 스모 동아리를 일으켜 세우려는 마찬가지로 대학생 이야기 <으랏차차 스모부(シコふんじゃった)>(1991)를 만들어, 일본사회에서의 종교와 전통 스포츠의 위상을 재조명하였다. 1996년에는 중년남자가 사교댄스를 배우면서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는 <샐위댄스(Shall we ダンス?)>를 만들어 사교댄스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구로사와 기요시(, 1955- ) 감독 역시 <간다가와 음란전쟁(神田川淫)>(1983)이라는 야한 영화로 1983년 데뷔하였고, 다른 사람을 조종하여 살인을 저지르게 하는 이를 그린 <큐어(Cure)>(1997)를 만들어 공포영화 감독으로 이름을 날린다. 그와 더불어 텔레비전 화면에서 기어 나오는 귀신 사다코로 유명한, 나카타 히데오(中田秀夫, 1961- ) 감독의 <링(リング)>(1998)은 전 세계에 J-Horror Movie 붐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나카타 히데오의 경우는 TV드라마의 연출이 데뷔작이었다. 마찬가지로 TV드라마의 연출로 시작한 감독으로는 이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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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6.08.15
  • 저작시기20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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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068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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