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들어가는 말. 아들들을 위해 사랑을 탕진하시는 하나님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
1. 나는 왜 예수 앞에 나오는가
오늘날도 두 부류가 예수님 주위를 맴돈다
2. 우리도 ‘잃어버린 두 아들’처럼 질주한다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죄’에 대한 더 깊은 이해
3.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죄’는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것 그 이상이다
‘잃어버림’에 대한 더 깊은 이해
4.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 불순종만큼 위험하다
맏아들도 둘째 못지않게 ‘잃어버린 존재’다
‘대속’에 대한 더 깊은 이해
5. ‘진정한 형’이 날 찾으러 이 땅에 오셨다
형이 찾아야 하고, 형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그날에 우리는 아버지 집, 영원한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구원’에 대한 더 깊은 이해
6. 아버지 잔치는 이미 시작됐다, 들어가 누리라
예수 복음은 지금, 여기서의 삶부터 바꾼다
마치며..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
1. 나는 왜 예수 앞에 나오는가
오늘날도 두 부류가 예수님 주위를 맴돈다
2. 우리도 ‘잃어버린 두 아들’처럼 질주한다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죄’에 대한 더 깊은 이해
3. 스스로 하나님 노릇한다면, 충성했어도 죄다
‘죄’는 단순히 규범을 어기는 것 그 이상이다
‘잃어버림’에 대한 더 깊은 이해
4. 두려움에 기초한 맹종, 불순종만큼 위험하다
맏아들도 둘째 못지않게 ‘잃어버린 존재’다
‘대속’에 대한 더 깊은 이해
5. ‘진정한 형’이 날 찾으러 이 땅에 오셨다
형이 찾아야 하고, 형이 대가를 치러야 한다.그날에 우리는 아버지 집, 영원한 잔치에 참여할 것이다
‘구원’에 대한 더 깊은 이해
6. 아버지 잔치는 이미 시작됐다, 들어가 누리라
예수 복음은 지금, 여기서의 삶부터 바꾼다
마치며..
본문내용
과 목 :
탕부 하나님
팀 켈러 저.
소 속 :
교 수 :
학 번 :
제출일 :
이 름 :
들어가며..
성경 속 ‘탕자와 그의 형 이야기’ 이 책은 탕자이야기입니다. 탕자로 번역되는 문구의 형용사은 ‘제멋대로 군다’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해프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비유속의 둘째 아들뿐 아니라, 아버지를 수식하는 말로도 어울립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따지거나 그에게 죄의 책임을 돌리거나, 응보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고후5:19절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셨다’고 썼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분입니다. 그런의미에서 그분은 자녀인 우리에게 좋은 아버지이며,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무모할 정도의 은혜야 말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며, 이 책의 주제도 그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예리한 도발
탕자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늘 집나간 탕자입니다. 하지만, 두 형제가 각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다른 길을 대변하고 있기에 두 형제의 모습을 모두 집중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1절“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바로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그들은 비유속의 동생과 같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도덕법도 준수하지 않았고, 종교적으로 유대인들이 따르던 정결 의식도 규율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동생처럼 그들도 삶과 생활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사회와 가정의 전통 윤리를 버리고, ‘집을 나가 허랑 방탕’했습니다.
이 비유를 들은 두 번째 부류의 청중은 비유속의 형으로 대변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2절“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 사람들은 자라면서 배운 전통과 윤리를 고수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그대로 순종하고 충실히 예배하고 꾸준히 기도했습니다. 어찌보면,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은 형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1절에 ‘나아오니’를 보면, 예수님께 이끌린 일이 그분의 사역에 의레 있었던 현상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계속 그분께로 모여들었습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그런 현상에 당황하며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2절“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고대 근동에서 함께 앉아 먹는 다는 것은 상대를 수용한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수용하는가? 저들 죄인들은 우리의 예배에 생전 나온 적이 없다. 그런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끌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진리를 선포하지만, 예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해줄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도 비유에 나오는 ‘형 ’ 부류의 사람과 ‘동생’ 부류의 사람들은 양쪽다 우리와 함께있습니다. 같은 사회 안에 있고, 종종 한 집안에서 있습니다. 요즘은 종교가 없거나, 아예 종교를 배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의 편이셨을까요? 예수님 그분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의 편도 아니고, 종교적인 사람들의 편도 아니지만, 종교적 도덕주의를 치명적인 영혼의 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기독교가 처음 출연했을 때는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전이 없었고, 제사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을 기쁘게 하는 제사 장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성전을 종식시키는 성전이셨고, 모든 제사장을 종식시키는 제사장이었으며, 모든 제물을 종식시키는 제물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당시에 종교에 열심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였고, 종교나 도덕을 준수하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들은 그분께 매료 되고, 마음이 끌렸습니다. 마11: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님이 종교적인 사람과 성적으로 소외된 사람(눅7장), 종교적인 사람과 인종적으로 소외된 사람(요3-4),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눅19장)을 만나실 때면, 소외되던 사람은 매번 예수님과 가까운 사람이 되었지만, ‘형’ 부류의 사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위가 높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마21: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라는 것입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일컫는 이 본문은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로써, 1막의 제목은 잃어버린 첫째 아들이고, 2막의 제목은 잃어버린 맏아들입니다.
먼저,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서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눅15:12)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듣는 청중에게 있어서 매우 불편한 비유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죽으면 맏아들은 다른 자녀보다 두 배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상속자가 둘이면 재산의 2/3는 맏아이의 차지가 되고, 나머지 1/3은 둘째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유산의 분배는 아버지 사후에만 이루어졌습니다. 둘째아들이 지금 유산을 달라고 한 것은 지극히 무엄하고 패륜아적인 행위였습니다. 아버지 유산을 바란다는 것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것과 같았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아버지의 재산만 원할 뿐 아버지는 싫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였기에 만약 아들이 이렇게 나오면, 부모 입장에서 호되게 혼낸뒤 집안에서
탕부 하나님
팀 켈러 저.
소 속 :
교 수 :
학 번 :
제출일 :
이 름 :
들어가며..
성경 속 ‘탕자와 그의 형 이야기’ 이 책은 탕자이야기입니다. 탕자로 번역되는 문구의 형용사은 ‘제멋대로 군다’는 뜻이 아니라,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해프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쓴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비유속의 둘째 아들뿐 아니라, 아버지를 수식하는 말로도 어울립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죄를 따지거나 그에게 죄의 책임을 돌리거나, 응보를 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고후5:19절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셨다’고 썼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은 앞뒤 재지 않고, 아낌없이 내어주는 분입니다. 그런의미에서 그분은 자녀인 우리에게 좋은 아버지이며,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무모할 정도의 은혜야 말로,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경험이며, 이 책의 주제도 그것입니다.
복음에 대한 예리한 도발
탕자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늘 집나간 탕자입니다. 하지만, 두 형제가 각기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다른 길을 대변하고 있기에 두 형제의 모습을 모두 집중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1절“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왔습니다. 바로 세리와 죄인들입니다. 그들은 비유속의 동생과 같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도덕법도 준수하지 않았고, 종교적으로 유대인들이 따르던 정결 의식도 규율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동생처럼 그들도 삶과 생활에 있어서는 바람직한 사회와 가정의 전통 윤리를 버리고, ‘집을 나가 허랑 방탕’했습니다.
이 비유를 들은 두 번째 부류의 청중은 비유속의 형으로 대변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2절“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그 사람들은 자라면서 배운 전통과 윤리를 고수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그대로 순종하고 충실히 예배하고 꾸준히 기도했습니다. 어찌보면, 아버지 집을 떠나지 않은 형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1절에 ‘나아오니’를 보면, 예수님께 이끌린 일이 그분의 사역에 의레 있었던 현상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계속 그분께로 모여들었습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그런 현상에 당황하며 분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2절“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고대 근동에서 함께 앉아 먹는 다는 것은 상대를 수용한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어떻게 저런 사람들을 수용하는가? 저들 죄인들은 우리의 예배에 생전 나온 적이 없다. 그런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끌리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그들에게 진리를 선포하지만, 예수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틀림없이 그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만 해줄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도 비유에 나오는 ‘형 ’ 부류의 사람과 ‘동생’ 부류의 사람들은 양쪽다 우리와 함께있습니다. 같은 사회 안에 있고, 종종 한 집안에서 있습니다. 요즘은 종교가 없거나, 아예 종교를 배격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의 편이셨을까요? 예수님 그분은 종교를 등진 사람들의 편도 아니고, 종교적인 사람들의 편도 아니지만, 종교적 도덕주의를 치명적인 영혼의 병으로 생각하셨습니다. 기독교가 처음 출연했을 때는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신전이 없었고, 제사장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신을 기쁘게 하는 제사 장소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성전을 종식시키는 성전이셨고, 모든 제사장을 종식시키는 제사장이었으며, 모든 제물을 종식시키는 제물이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이것입니다. 당시에 종교에 열심을 가졌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눈에 가시였고, 종교나 도덕을 준수하는 것과 거리가 먼 사람들은 그분께 매료 되고, 마음이 끌렸습니다. 마11:19“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님이 종교적인 사람과 성적으로 소외된 사람(눅7장), 종교적인 사람과 인종적으로 소외된 사람(요3-4),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눅19장)을 만나실 때면, 소외되던 사람은 매번 예수님과 가까운 사람이 되었지만, ‘형’ 부류의 사람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위가 높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하여, 예수님은 마21:31“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나는 맏아들인가? 둘째 아들인가? 라는 것입니다. 흔히 탕자의 비유라고 일컫는 이 본문은 잃어버린 두 아들의 비유로써, 1막의 제목은 잃어버린 첫째 아들이고, 2막의 제목은 잃어버린 맏아들입니다.
먼저,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서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눅15:12)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는 듣는 청중에게 있어서 매우 불편한 비유였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죽으면 맏아들은 다른 자녀보다 두 배의 유산을 받았습니다. 상속자가 둘이면 재산의 2/3는 맏아이의 차지가 되고, 나머지 1/3은 둘째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유산의 분배는 아버지 사후에만 이루어졌습니다. 둘째아들이 지금 유산을 달라고 한 것은 지극히 무엄하고 패륜아적인 행위였습니다. 아버지 유산을 바란다는 것은 아버지가 죽기를 바란다는 것과 같았습니다. 한마디로 자신은 아버지의 재산만 원할 뿐 아버지는 싫다는 뜻이었습니다. 당시, 가부장적인 사회였기에 만약 아들이 이렇게 나오면, 부모 입장에서 호되게 혼낸뒤 집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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