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1장 세계종교
제 2장 로마세계의 정복
제 3장 암흑시대
제 4장 초기 유럽의 팽창
제5장 발견의 시대
제 6장 로마 카톨릭의 선교
제7장 동양과 서양에서의 새로운 출발
제8장 서론
제9장 유럽과 아메리카의 새로운 세력들
제10장 식민주의의 전성기(1858~1914)
제11장 로마, 정교회 그리고 세계
제12장 어제와 오늘, 1914년과 그 이후
제13장 선교부체제에서 교회체제로
제 2장 로마세계의 정복
제 3장 암흑시대
제 4장 초기 유럽의 팽창
제5장 발견의 시대
제 6장 로마 카톨릭의 선교
제7장 동양과 서양에서의 새로운 출발
제8장 서론
제9장 유럽과 아메리카의 새로운 세력들
제10장 식민주의의 전성기(1858~1914)
제11장 로마, 정교회 그리고 세계
제12장 어제와 오늘, 1914년과 그 이후
제13장 선교부체제에서 교회체제로
본문내용
증인들이 있다는 점이다.
제 2장 로마세계의 정복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세계는 여러 면에 있어서 복음 전파에 유리하였다. 로마제국은 광대한 지역 위에 그 유례가 없는 거대한 통일 제국을 수립하였다.
최초의 교인들은 팔레스타인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말했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신앙적인 표현을 위하여 언어들의 어떤 전반적 배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학자들의 보고들에 의하면 전체 로마 제국의 인구의 7% 이상이었을 것이라 한다.
사도시대의 선교가 그 후 시대들의 선교와 다를 수밖에 없고 비교 자체를 거의 불가능하게 한 그 요인은 이와 같이 준비 되어진 엘리트들의 존재에 있었다.
만약 누가가 사도행전을 쓰지 않았던지 또는 많은 초기 그리스도교 문학들의 경우처럼 이 위대한 작품을 상실해 버렸다면 우리는 편지서들 속에 간혹가다가 나타나는 힌트들을 제외하고는 초대 교회의 발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를 뻔하였다.
신약성경 말고 바울이 하는 방식의 정당성과 연속성을 확인해 주는 첫 번째의 중요 증언은 이그나티우스의 편지서들이다.
두 번째의 작은 증언은 112년 경에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젊은 플리니우스의 유명한 편지인데 이 편지가 전하는 모습은 상당히 다른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팔레스타인의 교회가 완전히 멸절된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1800여년에 걸쳐 유대인들의 국가적 존재를 박탈하였다.
시리아의 안디옥은 그리스도 교회의 두 번째 본거지였다. 예수를 믿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곳도 이곳이었다.
로마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다음가는 그리스도 세계의 제 3의 중심지였다.
초기 로마 교회는 빈민층 출신들로 이뤄졌음이 분명하다. 일세기 이상이나 이 교회가 희랍어 사용 교회로 지냈다는 사실이 교인들의 사회적 선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영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경위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매우 일찍이 이집트, 특별히 번잡하고 번영하던 항구 알렉산드리아에 복음이 전파됐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도바울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칼리굴라 황제 때에 유대인을 대표하여 로마에 사절로 파견되었던 일도 있었던 철학자 필론의 저술의 덕택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상당히 풍부해졌다.
이집트의 서쪽에 구레네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의 중요한 네 구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 성 마가가 대상으로 삼아 복음서를 기록한 그리스도인 집단은 그의 아들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를 익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구레네 시몬이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첫 설교를 할 때에 구레네 사람들도 그 자리에 있었으며 스데반과 변론한 사람도 있었다.
이집트의 교회처럼 북아프리카 교회도 인종 문제와 언어의 문제로 고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우리는 3세기 말까지 로마제국의 판도 내에 부분적으로라도 복음이 침투하지 않은 지역은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플라톤 이래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걱정스러운 문제들에 대하여 애매한 답변 이상의 것을 주지 못했다.
스토아 철학은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장엄하게 표현한 세계 시민으로서의 인간관 속에 나타난 좀 더 광범위한 충성심을 대치시키려 하였으나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너무나 막연하고 이론적이었다.
그리스도인 공동생활의 주목할 만한 현상의 하나는 자선 활동의 정교한 발전이었다. 하르낙은 이를테면 고아와 과부의 후생, 죄수들과 여행자들을 위한 봉사 등 적어도 열 개에 달하는 봉사 종목들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핍박이 일반 여론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신화적인 과장에 빠져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초대 그리스도교가 고대 세계 마지막 기간의 모든 생기 넘치는 사상과 창조력을 교회로 집결 시킬 수 있었던 그 점이야 말로 그 어떤 것들보다도 괄목할 만한 일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황제의 호의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교회의 형편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한미한데서 찬연히 빛나는 모습으로 오욕스러웠던 데서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인망이 쏠리는 자리로, 교회는 높이 떠올랐다.
밀라노 칙령 다음해는 적어도 기독교인이 네배로 증가한 것 같다.
교회는 니케아에서 칼케돈에 이르는 교회 회의들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로 교리적인 정의를 완성 했을 뿐 아니라 두 개의 다른 분야에서 위대하고 창조적인 활력을 나타내었다.
두 번째로 4세기는 위대한 고전적 기도문들이 발전한 시대였다. 대부분의 교회사는 이 시대의 탁월한 지도자들과 대 논쟁들을 취급하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에 이처럼 비할 수 없이 가치 있는 유산을 물려 준 이름 모르는 천재들을 내놓은 교회는 또한 성령의 불을 가지고 있던 교회였다.
첫 번째로 에뎃사 쪽과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조그마한 나라 오스르호에네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치유의 이적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은 아브가르 왕은 그 자신이 병이 들어 예수님께 초청의 편지를 보낸다. 이것은 세가지 중요 사실들을 지적하고 있다. 즉 복음이 일찍이 팔레스틴으로부터 동쪽의 매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전파되었으며 에뎃사는 그 지역의 큰 그리스도교 중심지의 하나였고 이 지역의 통용어는 시리아어였다는 점들이다.
우리는 이미 3세기의 이집트 교회의 교세를 기술하였다, 우리는 16세기나 지난 지금까지도 교회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에디오피아 지역에 신앙이 들어간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제 에뎃사로 돌아가서 북서쪽 방향으로 관심을 돌려보자. 복음 갑바도기아에서 아르메니아로 전파되었으며 타우마투르구스로 알려진 이적을 행하는 사람, 그레고리우스가 이 지역의 가장 저명한 전도자였다.
서쪽으로 더 가면 다뉴브 강 북쪽의 야만 국가들에 다다르게 된다. 이 종족들은 3세기 중엽부터 로마제국의 안정을 계속적으로 위협해 왔었다. 고드족은 다수의 갑바도기아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충실히 지켰으며 이들을 통하여 고드족이 처음으로 복음과 접하게 되었다.
켈트 교회는 독특한 교회였다. 교회 생화
제 2장 로마세계의 정복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살았던 세계는 여러 면에 있어서 복음 전파에 유리하였다. 로마제국은 광대한 지역 위에 그 유례가 없는 거대한 통일 제국을 수립하였다.
최초의 교인들은 팔레스타인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말했으며 세월이 지남에 따라 신앙적인 표현을 위하여 언어들의 어떤 전반적 배열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학자들의 보고들에 의하면 전체 로마 제국의 인구의 7% 이상이었을 것이라 한다.
사도시대의 선교가 그 후 시대들의 선교와 다를 수밖에 없고 비교 자체를 거의 불가능하게 한 그 요인은 이와 같이 준비 되어진 엘리트들의 존재에 있었다.
만약 누가가 사도행전을 쓰지 않았던지 또는 많은 초기 그리스도교 문학들의 경우처럼 이 위대한 작품을 상실해 버렸다면 우리는 편지서들 속에 간혹가다가 나타나는 힌트들을 제외하고는 초대 교회의 발전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를 뻔하였다.
신약성경 말고 바울이 하는 방식의 정당성과 연속성을 확인해 주는 첫 번째의 중요 증언은 이그나티우스의 편지서들이다.
두 번째의 작은 증언은 112년 경에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젊은 플리니우스의 유명한 편지인데 이 편지가 전하는 모습은 상당히 다른 것이다.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팔레스타인의 교회가 완전히 멸절된 것은 아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1800여년에 걸쳐 유대인들의 국가적 존재를 박탈하였다.
시리아의 안디옥은 그리스도 교회의 두 번째 본거지였다. 예수를 믿는 제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란 이름을 처음 들은 곳도 이곳이었다.
로마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 다음가는 그리스도 세계의 제 3의 중심지였다.
초기 로마 교회는 빈민층 출신들로 이뤄졌음이 분명하다. 일세기 이상이나 이 교회가 희랍어 사용 교회로 지냈다는 사실이 교인들의 사회적 선분을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영국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된 경위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아는 것이 없다. 하지만 매우 일찍이 이집트, 특별히 번잡하고 번영하던 항구 알렉산드리아에 복음이 전파됐다는 것은 확실하다.
사도바울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칼리굴라 황제 때에 유대인을 대표하여 로마에 사절로 파견되었던 일도 있었던 철학자 필론의 저술의 덕택으로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상당히 풍부해졌다.
이집트의 서쪽에 구레네에 대해서는 신약성경의 중요한 네 구절에서 언급되고 있다, 구레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있다. 성 마가가 대상으로 삼아 복음서를 기록한 그리스도인 집단은 그의 아들들인 알렉산더와 루포를 익히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따라서 구레네 시몬이 신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베드로가 오순절에 첫 설교를 할 때에 구레네 사람들도 그 자리에 있었으며 스데반과 변론한 사람도 있었다.
이집트의 교회처럼 북아프리카 교회도 인종 문제와 언어의 문제로 고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서 우리는 3세기 말까지 로마제국의 판도 내에 부분적으로라도 복음이 침투하지 않은 지역은 없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플라톤 이래의 수많은 철학자들은 인간의 걱정스러운 문제들에 대하여 애매한 답변 이상의 것을 주지 못했다.
스토아 철학은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장엄하게 표현한 세계 시민으로서의 인간관 속에 나타난 좀 더 광범위한 충성심을 대치시키려 하였으나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에는 너무나 막연하고 이론적이었다.
그리스도인 공동생활의 주목할 만한 현상의 하나는 자선 활동의 정교한 발전이었다. 하르낙은 이를테면 고아와 과부의 후생, 죄수들과 여행자들을 위한 봉사 등 적어도 열 개에 달하는 봉사 종목들에 대해 길게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 핍박이 일반 여론에 미친 영향을 고려해야 한다. 여기에서도 신화적인 과장에 빠져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초대 그리스도교가 고대 세계 마지막 기간의 모든 생기 넘치는 사상과 창조력을 교회로 집결 시킬 수 있었던 그 점이야 말로 그 어떤 것들보다도 괄목할 만한 일이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황제의 호의적인 태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교회의 형편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한미한데서 찬연히 빛나는 모습으로 오욕스러웠던 데서 더 바랄 수 없을 만큼 인망이 쏠리는 자리로, 교회는 높이 떠올랐다.
밀라노 칙령 다음해는 적어도 기독교인이 네배로 증가한 것 같다.
교회는 니케아에서 칼케돈에 이르는 교회 회의들의 꾸준한 노력의 결과로 교리적인 정의를 완성 했을 뿐 아니라 두 개의 다른 분야에서 위대하고 창조적인 활력을 나타내었다.
두 번째로 4세기는 위대한 고전적 기도문들이 발전한 시대였다. 대부분의 교회사는 이 시대의 탁월한 지도자들과 대 논쟁들을 취급하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에 이처럼 비할 수 없이 가치 있는 유산을 물려 준 이름 모르는 천재들을 내놓은 교회는 또한 성령의 불을 가지고 있던 교회였다.
첫 번째로 에뎃사 쪽과 북부 메소포타미아의 조그마한 나라 오스르호에네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치유의 이적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은 아브가르 왕은 그 자신이 병이 들어 예수님께 초청의 편지를 보낸다. 이것은 세가지 중요 사실들을 지적하고 있다. 즉 복음이 일찍이 팔레스틴으로부터 동쪽의 매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전파되었으며 에뎃사는 그 지역의 큰 그리스도교 중심지의 하나였고 이 지역의 통용어는 시리아어였다는 점들이다.
우리는 이미 3세기의 이집트 교회의 교세를 기술하였다, 우리는 16세기나 지난 지금까지도 교회의 전통이 끊어지지 않고 있는 에디오피아 지역에 신앙이 들어간 믿을 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이제 에뎃사로 돌아가서 북서쪽 방향으로 관심을 돌려보자. 복음 갑바도기아에서 아르메니아로 전파되었으며 타우마투르구스로 알려진 이적을 행하는 사람, 그레고리우스가 이 지역의 가장 저명한 전도자였다.
서쪽으로 더 가면 다뉴브 강 북쪽의 야만 국가들에 다다르게 된다. 이 종족들은 3세기 중엽부터 로마제국의 안정을 계속적으로 위협해 왔었다. 고드족은 다수의 갑바도기아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는데 이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충실히 지켰으며 이들을 통하여 고드족이 처음으로 복음과 접하게 되었다.
켈트 교회는 독특한 교회였다. 교회 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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