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가사의 전체적 개론
2. 속미인곡 작품 분석
1) 속미인곡 외적 분석
2) 속미인곡 내적 분석
3) 사미인곡과의 비교
3. 문화콘텐츠 실용화 방안
1) 속미인곡의 에듀테인먼트
2) 속미인곡의 드라마 화
Ⅲ. 결론
-참고문헌
Ⅱ. 본론
1. 가사의 전체적 개론
2. 속미인곡 작품 분석
1) 속미인곡 외적 분석
2) 속미인곡 내적 분석
3) 사미인곡과의 비교
3. 문화콘텐츠 실용화 방안
1) 속미인곡의 에듀테인먼트
2) 속미인곡의 드라마 화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정치적 대립이 있었기 때문에 정계에서 밀려나 정치적 패배를 맛본 이들이 유배를 가게 되면서 연군 유배가사를 많이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조위의 만분가,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들 수 있다.
전환기는 임진왜란부터 숙종 조 전까지로 볼 수 있는데 7년여의 전쟁을 통해 국토가 황폐화 되고 대외적으로 동아시아 체제가 흔들렸던 시기로 조선은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이념적이고 이론적인 부분을 강조하던 사대부들도 현실적인 문제로 눈을 돌리게 되면서 사대부 가사의 작가의식이 변모하여 스스로 양반들의 허위를 폭로하였으며 피폐한 사회상과 생활고를 토로하고 사회현실을 비판하는 가사들이 창작되었다. 박인로의 누항사나 정훈의 우활가에서 볼 수 있듯이 작품은 안빈낙도를 표방하는 것과 동시에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 인한 생활고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강호가사, 유배가사, 기행가사 또한 계속 창작되었다. 형태면에서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2음보를 기저율격으로 하는 6음보 1행 형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변화기는 숙종 이후 17세기부터 개화기 전까지 즉 동학운동 전까지로 볼 수 있다. 가사의 담당층이나 향유층이 크게 확대되고 가사의 성격도 크게 변모했던 시기이다. 전쟁의 피해가 어느 정도 복구되었으나 서구열강들의 등장으로 인해 혼란한 시기였던 이 시기는 연군가사나 기타 사대부 가사들도 창작되었지만 실증적 성격의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서민가사가 등장했다. 18세기 이후에는 내방가사가 등장하였는데 특히 영남지방에서 두드러졌으며 작품수가 6000편에 이르렀다. 사대부 가사의 영향을 받아 규방에서도 가사의 창작과 유통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렇듯 가사의 작자층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천주교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포교를 목적으로 한 천주교 가사가 등장하였다. 가사가 대개 음영되면서 4.4조가 우세하고 길이도 길어지며 내용도 수필적 성향이 강해진다.
쇠퇴기는 개화기 이후 일제시대 까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봉건적 사회질서가 타파되고 개화사상이 확산되었다. 개화기를 지나면서 퇴조한 가사는 거의 사라지고 영남지방에서 내방가사가 지어지면서 일부 장편가사만이 부녀자층을 중심으로 향유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표현의 억압으로 가사 창작의 수가 떨어져 비교적 덜 제약을 받았던 규방가사가 창작 향유를 유지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가사를 살펴보면 서구열강에 의해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이 유행하게 되었고 동학의 포교를 위한 동학가사가 창작되었다. 또 항일구국운동의 전개와 무비판적인 신문화 수용을 비판하는 개화가사들이 신문 등을 통해 창작되었다. 이 시기에 가사는 길이가 축소되고 분연체가 등장하였으며 반복구와 후렴이 생겨나기도 했다. 위의 책, 368~409쪽.
2. 속미인곡 작품 분석
작자 : 송강 정철
발표연도 : 1585년(선조18)
주제 : 연군의 정, 임을 향한 그리움
구성 :
- 서사 : 백옥경을 떠난 이유를 물음(갑) / 임과의 이별을 운명으로 받아들임(을)
- 본사1 : 위로의 말(갑) / 임의 일상생활에 대한 염려(을)
- 본사2 : 임의 소식을 알고자 산하를 방황함(을)
- 본사3 :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결사 : 죽음을 초월한 임에 대한 그리움(을) / 위로의 말(갑)
표현상 특징 : 연군의 뜻을 임을 이별한 여인의 심정에 의탁
두 여자가 말을 주고받는 대화형식의 전개
고사나 한시의 인용이 거의 없이 우리말의 묘미를 살려 표현
속미인곡(續美人曲)
<<본문>>
<서사> 임과 이별하게 된 사연
<갑녀의 물음> - 백옥경을 떠난 이유
뎨 가난 뎌 각시 본 듯도 한뎌이고. 天텬上샹 白백玉옥京경을 엇디하야 離니別별하고, 해 다 뎌 져믄 날의 눌을 보라 가시난고.
- 저기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하구나. 임금이 계시는 서울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가 다 져서 저물었는데 누구를 만나보러 가시는가?
<을녀의 대답> - 조물주의 탓(자책과 체념)
어와 네여이고 내 사셜 드러보오.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한가마난 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세 나도 님을 미더 군뜨디 전혀 업서 이래야 교태야 어즈러이 구돗던디 반기시난 낫비치 녜와 엇디 다라신고. 누어 생각하고 니러 안자 혜여하니 내 몸의 지은 죄 뫼가티 싸혀시니 하날히라 원망하며 사람이라 허믈하랴 셜워 플텨 혜니 造조物믈의 타시로다.
- 아, 너로구나. 내 사정 이야기를 들어 보오. 내 생김새와 내 거동이 임께서 사랑함직한가마는 어쩐지 나를 보시고 너로구나 하고 특별히 여기시기에, 나도 임을 믿어 딴 생각이 전혀 없어 응석과 아양을 부리며 귀찮게 굴었던지 반가워하시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려 보니 내 몸이 지은 죄 산같이 쌓였으니,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겠는가? 설워서 여러 가지 일을 풀어 내어 낱낱이 헤아려보니, 조물주의 탓(운명)이로다.
<본사> 이별 후의 사랑과 그리움
<갑녀> - 위로의 말
글란 생각 마오.
- 그것을랑 (그렇게는) 생각하지 마오.
<을녀> - 임에게 버림 받은 사연
매친 일이 이셔이다. 님을 뫼셔 이셔 님의 일을 내 알거니 믈 가탄 얼굴이 편하실 적 몃 날일고. 春츈寒한 苦고熱열은 엇디하야 디내시며 秋츄日일冬동天텬은 뉘라셔 뫼셧난고. 粥죽朝조飯반 朝죠夕셕 뫼 녜와 가티 셰시난가. 기나긴 밤의 잠은 엇디 자시난고.
- 마음 속에 맺힌 일이 있습니다. 예전에 임을 모시어서 임의 일을 내가 잘 알거니, 물과 같이 연약한 체질이 편하실 적이 몇 날일꼬? 이른 봄날의 추위와 여름철의 무더위는 어떻게 지내시며 가을날 겨울날은 누가 모셨는고? 자릿 조반과 아침 저녁 진지는 예전과 같이 잡수시는가? 기나긴 밤에 잠은 어떻게 주무시는고?
님 다히 消쇼息식을 아므려나 아쟈 하니 오날도 거의로다. 내일이나 사람 올가. 내 마음 둘 데 업다. 어드러로 가잔 말고. 잡거니 밀거니 놉픈 뫼해 올라가니 구롬은카니와 안개난 므사 일고. 山산川쳔이 어둡거니 日일月월을 엇디 보며 咫지尺척을 모라거든 千쳔里리랄 바라보랴. 찰하리 믈가의 가 뱃길히나 보쟈 하니 바람이야 믈결이야 어둥졍 된뎌이고. 샤공은 어데 가고
전환기는 임진왜란부터 숙종 조 전까지로 볼 수 있는데 7년여의 전쟁을 통해 국토가 황폐화 되고 대외적으로 동아시아 체제가 흔들렸던 시기로 조선은 신분제가 무너지면서 급격하게 변화되었다. 이념적이고 이론적인 부분을 강조하던 사대부들도 현실적인 문제로 눈을 돌리게 되면서 사대부 가사의 작가의식이 변모하여 스스로 양반들의 허위를 폭로하였으며 피폐한 사회상과 생활고를 토로하고 사회현실을 비판하는 가사들이 창작되었다. 박인로의 누항사나 정훈의 우활가에서 볼 수 있듯이 작품은 안빈낙도를 표방하는 것과 동시에 전쟁의 참혹함과 그로 인한 생활고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강호가사, 유배가사, 기행가사 또한 계속 창작되었다. 형태면에서도 변화를 가져오는데 2음보를 기저율격으로 하는 6음보 1행 형식이 등장하기도 했다.
변화기는 숙종 이후 17세기부터 개화기 전까지 즉 동학운동 전까지로 볼 수 있다. 가사의 담당층이나 향유층이 크게 확대되고 가사의 성격도 크게 변모했던 시기이다. 전쟁의 피해가 어느 정도 복구되었으나 서구열강들의 등장으로 인해 혼란한 시기였던 이 시기는 연군가사나 기타 사대부 가사들도 창작되었지만 실증적 성격의 실학사상의 영향을 받은 서민가사가 등장했다. 18세기 이후에는 내방가사가 등장하였는데 특히 영남지방에서 두드러졌으며 작품수가 6000편에 이르렀다. 사대부 가사의 영향을 받아 규방에서도 가사의 창작과 유통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이렇듯 가사의 작자층이 확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천주교가 국내에 유입되면서 포교를 목적으로 한 천주교 가사가 등장하였다. 가사가 대개 음영되면서 4.4조가 우세하고 길이도 길어지며 내용도 수필적 성향이 강해진다.
쇠퇴기는 개화기 이후 일제시대 까지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기는 봉건적 사회질서가 타파되고 개화사상이 확산되었다. 개화기를 지나면서 퇴조한 가사는 거의 사라지고 영남지방에서 내방가사가 지어지면서 일부 장편가사만이 부녀자층을 중심으로 향유되었다. 또한 일본 제국주의의 표현의 억압으로 가사 창작의 수가 떨어져 비교적 덜 제약을 받았던 규방가사가 창작 향유를 유지할 수 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가사를 살펴보면 서구열강에 의해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이 유행하게 되었고 동학의 포교를 위한 동학가사가 창작되었다. 또 항일구국운동의 전개와 무비판적인 신문화 수용을 비판하는 개화가사들이 신문 등을 통해 창작되었다. 이 시기에 가사는 길이가 축소되고 분연체가 등장하였으며 반복구와 후렴이 생겨나기도 했다. 위의 책, 368~409쪽.
2. 속미인곡 작품 분석
작자 : 송강 정철
발표연도 : 1585년(선조18)
주제 : 연군의 정, 임을 향한 그리움
구성 :
- 서사 : 백옥경을 떠난 이유를 물음(갑) / 임과의 이별을 운명으로 받아들임(을)
- 본사1 : 위로의 말(갑) / 임의 일상생활에 대한 염려(을)
- 본사2 : 임의 소식을 알고자 산하를 방황함(을)
- 본사3 : 독수공방의 외로움(을)
-결사 : 죽음을 초월한 임에 대한 그리움(을) / 위로의 말(갑)
표현상 특징 : 연군의 뜻을 임을 이별한 여인의 심정에 의탁
두 여자가 말을 주고받는 대화형식의 전개
고사나 한시의 인용이 거의 없이 우리말의 묘미를 살려 표현
속미인곡(續美人曲)
<<본문>>
<서사> 임과 이별하게 된 사연
<갑녀의 물음> - 백옥경을 떠난 이유
뎨 가난 뎌 각시 본 듯도 한뎌이고. 天텬上샹 白백玉옥京경을 엇디하야 離니別별하고, 해 다 뎌 져믄 날의 눌을 보라 가시난고.
- 저기 가는 저 각시, 본 듯도 하구나. 임금이 계시는 서울을 어찌하여 이별하고 해가 다 져서 저물었는데 누구를 만나보러 가시는가?
<을녀의 대답> - 조물주의 탓(자책과 체념)
어와 네여이고 내 사셜 드러보오.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한가마난 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세 나도 님을 미더 군뜨디 전혀 업서 이래야 교태야 어즈러이 구돗던디 반기시난 낫비치 녜와 엇디 다라신고. 누어 생각하고 니러 안자 혜여하니 내 몸의 지은 죄 뫼가티 싸혀시니 하날히라 원망하며 사람이라 허믈하랴 셜워 플텨 혜니 造조物믈의 타시로다.
- 아, 너로구나. 내 사정 이야기를 들어 보오. 내 생김새와 내 거동이 임께서 사랑함직한가마는 어쩐지 나를 보시고 너로구나 하고 특별히 여기시기에, 나도 임을 믿어 딴 생각이 전혀 없어 응석과 아양을 부리며 귀찮게 굴었던지 반가워하시는 낯빛이 옛날과 어찌 다르신고? 누워 생각하고 일어나 앉아 헤아려 보니 내 몸이 지은 죄 산같이 쌓였으니, 하늘을 원망하고 사람을 탓하겠는가? 설워서 여러 가지 일을 풀어 내어 낱낱이 헤아려보니, 조물주의 탓(운명)이로다.
<본사> 이별 후의 사랑과 그리움
<갑녀> - 위로의 말
글란 생각 마오.
- 그것을랑 (그렇게는) 생각하지 마오.
<을녀> - 임에게 버림 받은 사연
매친 일이 이셔이다. 님을 뫼셔 이셔 님의 일을 내 알거니 믈 가탄 얼굴이 편하실 적 몃 날일고. 春츈寒한 苦고熱열은 엇디하야 디내시며 秋츄日일冬동天텬은 뉘라셔 뫼셧난고. 粥죽朝조飯반 朝죠夕셕 뫼 녜와 가티 셰시난가. 기나긴 밤의 잠은 엇디 자시난고.
- 마음 속에 맺힌 일이 있습니다. 예전에 임을 모시어서 임의 일을 내가 잘 알거니, 물과 같이 연약한 체질이 편하실 적이 몇 날일꼬? 이른 봄날의 추위와 여름철의 무더위는 어떻게 지내시며 가을날 겨울날은 누가 모셨는고? 자릿 조반과 아침 저녁 진지는 예전과 같이 잡수시는가? 기나긴 밤에 잠은 어떻게 주무시는고?
님 다히 消쇼息식을 아므려나 아쟈 하니 오날도 거의로다. 내일이나 사람 올가. 내 마음 둘 데 업다. 어드러로 가잔 말고. 잡거니 밀거니 놉픈 뫼해 올라가니 구롬은카니와 안개난 므사 일고. 山산川쳔이 어둡거니 日일月월을 엇디 보며 咫지尺척을 모라거든 千쳔里리랄 바라보랴. 찰하리 믈가의 가 뱃길히나 보쟈 하니 바람이야 믈결이야 어둥졍 된뎌이고. 샤공은 어데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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