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다. 이승만 집권기간에 남한의 경제사정이 곤란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기간에 경제가 발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일찍이 청년시절에 ‘이젠 천하 근본이 농사가 아니라 상업이다’라고 갈과한 바 있는 이승만은 상,공업과 무역의 진흥을 통해 국민경제의 수준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정책구상에 따라 그는 집권 초에 우선적으로 농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면서 상,공업과 무역을 발달시키려고 했다. 그 결과 그의 집권기간에 남한에서는 소폭이지만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즉, 1953~196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4.9%에 달하였다. 이 수치는 같은 기간 북한의 연평균 성장률 20%에 비해 훨씬 뒤지는 것이지만 다른 후진국들의 평균 성장률 4.4%에 비해서는 높은 것이었다. 1960년에 달성관 1인당 국민소득 83달러 역시 다른 후진국들의 경우에 비해 낮은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6.25전쟁 후 미국으로부터 31억달러의 경제원를 받아내어 전후복구사업을 추진함으로써 1955년까지 전화로 파괴된 경제시설 및 기타 설비를 거의 완전히 복구할 수 있었다. 이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1958년 부흥부 산하에 신설된 ‘산업개발위원회’는 경제발전계획 수립에 착수. 1960년 4월 15일에 ‘3개년 경제발전계획시안’을 국무회의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승만의 ‘3개년 경제발전계획’은 며칠 후에 발생한 4.19군사혁명으로 인하여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지만 그 후 민주당 정권과 박정의 정부의 경제개발에 활용되었다. 이러한 예로써 우리는 이승만이 경제발전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의 교육면의 업적을 살펴보면 그는 청년시절부터 ‘교육입국’을 주장하였고 대통령이 되기 전에 육영사업에 종사함으로써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3.1운동 후 그가 마련한 건국 청사진에는 국민교육이 우선적으로 강조되어 있었고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에도 의무교육제 실시구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미군정기에 개시된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승만이 추진한 교육개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의무교육제도의 도입이었다. 해방당시 한국인의 약80%는 문맹이었고, 일제로부터 어떤 형태이건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인은 전체 인구의 14%에 불과했다. 그 중 전문학교 이상 대학졸업의 학력 소지자는 전체의 0.2%미만이었다.
이러한 열악한 문화적 여건 하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건국 후 초등교육의 의무화가 시급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1월에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을 수립한 다음 1950년 6월에 공포된 교육법에서 모든 국민이 6년간 의무교육을 받도록 규정하고 중앙정부와 지방공공단체로 하여금 의무교욱 실시에 필요한 학교를 설치·경영하도록 조처하였다.
의무교육제도는 6.25전쟁 중 시행에 차질이 생겼으나 1954년에 마련된 ‘6개년 계획’을 통해 여행된 결과 1959년까지 전국 학력아동의 96%가 취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이 땅에서 실현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를 구축한 셈이다. 한국 역사상 대다수 백성이 문맹이었던 사실을 감안할 대 이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승만 집권기에 각급 학교가 대폭 증설되고 해외 유학 붐이 일어났다. 우선 1950년대에 팽창된 각급 학교 및 학생수를 해방 당시와 비교하여 보면 초등학교의 경우 2.6배 증가, 중학교의 경우 10배 이상증가, 고등학교의 경우 3.1배 증가, 대학의 경우 12배 이상증가라는 성과를 거둔다.
이와같이 이승만은 수많은 업적을 세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독재자였고, 민주주의를 훼손 했으며, 수많은 정적을 살해했다. 또한 한국 동란 중에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헌법을 개헌하는 등의 많은 과오를 범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오 때문에 그의 업적들이 묻혀진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어쩌면 그 당시 이승만의 독재는 필요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갈등과 6.25전쟁 이후 혼란스러운 대한민국 땅에서 강력한 중앙권력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지금과 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지 의문이 간다. 6.25전쟁 이전의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통해 단독정부수립의 의사를 밝혔을 때도 이를 놓고 민족분단의 원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미 그 당시에 북한은 토지개혁과 국유화를 마쳤고 사실상의 정부의 형태를 갖춘 북조선임시위원회라는 사실상의 단독정부를 수립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한반도내의 공산화를 방지하고자 한반도의 반쪽이라도 지켜내야겠다는 그의 자구책이었다.
만약 이승만이 독재를 하지 않았고 그의 독재 기간 동안 다른 이가 대통령을 했다면 단기간 내에 그만큼의 6.25전쟁 피해로 인한 복원과 교육, 외교 ,군사적 측면 등에 있어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는가가 의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승만이 독재자였다는 사실은 잊지는 않되 그가 독재자였다는 이유로 그의 업적을 묻어두거나 깎아 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기존까지의 부정적인 견해만이 아니라 비판적인 사고를 하여 부정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를 놓치면 안된다.
이승만은 분명 엘리트였으며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그 누구보다 헌신했으며 대한민국이 6.25전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그의 특기인 외교술을 살려 미국과 UN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끌어왔고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 당시의 원조를 기반으로 발전을 한 것임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불과 수 십년 전까지의 원조를 받았다곤 보기 힘들 정도로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빈곤국가에 대하여 원조를 하고 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에도 대한민국의 장기적인 성장을 바라본 혜안을 지녔다. 이와 같은 결과는 그의 선경지명이 크게 기여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는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며, 그가 ‘나쁜 사람이다 또는 좋은사람이다’ 라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의 잘못은 꼬집되 업적은 세밀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정책구상에 따라 그는 집권 초에 우선적으로 농지개혁을 실시함으로써 토지자본을 산업자본으로 전환시키면서 상,공업과 무역을 발달시키려고 했다. 그 결과 그의 집권기간에 남한에서는 소폭이지만 지속적인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즉, 1953~1960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4.9%에 달하였다. 이 수치는 같은 기간 북한의 연평균 성장률 20%에 비해 훨씬 뒤지는 것이지만 다른 후진국들의 평균 성장률 4.4%에 비해서는 높은 것이었다. 1960년에 달성관 1인당 국민소득 83달러 역시 다른 후진국들의 경우에 비해 낮은 것이 아니었다. 이승만은 6.25전쟁 후 미국으로부터 31억달러의 경제원를 받아내어 전후복구사업을 추진함으로써 1955년까지 전화로 파괴된 경제시설 및 기타 설비를 거의 완전히 복구할 수 있었다. 이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1958년 부흥부 산하에 신설된 ‘산업개발위원회’는 경제발전계획 수립에 착수. 1960년 4월 15일에 ‘3개년 경제발전계획시안’을 국무회의에 제출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승만의 ‘3개년 경제발전계획’은 며칠 후에 발생한 4.19군사혁명으로 인하여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지만 그 후 민주당 정권과 박정의 정부의 경제개발에 활용되었다. 이러한 예로써 우리는 이승만이 경제발전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승만의 교육면의 업적을 살펴보면 그는 청년시절부터 ‘교육입국’을 주장하였고 대통령이 되기 전에 육영사업에 종사함으로써 이를 몸소 실천하였다. 3.1운동 후 그가 마련한 건국 청사진에는 국민교육이 우선적으로 강조되어 있었고 <과도정부 당면정책 33항>에도 의무교육제 실시구상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승만은 미군정기에 개시된 교육개혁에 박차를 가하여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승만이 추진한 교육개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의무교육제도의 도입이었다. 해방당시 한국인의 약80%는 문맹이었고, 일제로부터 어떤 형태이건 정규교육을 받은 한국인은 전체 인구의 14%에 불과했다. 그 중 전문학교 이상 대학졸업의 학력 소지자는 전체의 0.2%미만이었다.
이러한 열악한 문화적 여건 하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건국 후 초등교육의 의무화가 시급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1월에 의무교육 6개년 계획을 수립한 다음 1950년 6월에 공포된 교육법에서 모든 국민이 6년간 의무교육을 받도록 규정하고 중앙정부와 지방공공단체로 하여금 의무교욱 실시에 필요한 학교를 설치·경영하도록 조처하였다.
의무교육제도는 6.25전쟁 중 시행에 차질이 생겼으나 1954년에 마련된 ‘6개년 계획’을 통해 여행된 결과 1959년까지 전국 학력아동의 96%가 취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민주주의를 이 땅에서 실현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를 구축한 셈이다. 한국 역사상 대다수 백성이 문맹이었던 사실을 감안할 대 이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이승만 집권기에 각급 학교가 대폭 증설되고 해외 유학 붐이 일어났다. 우선 1950년대에 팽창된 각급 학교 및 학생수를 해방 당시와 비교하여 보면 초등학교의 경우 2.6배 증가, 중학교의 경우 10배 이상증가, 고등학교의 경우 3.1배 증가, 대학의 경우 12배 이상증가라는 성과를 거둔다.
이와같이 이승만은 수많은 업적을 세운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독재자였고, 민주주의를 훼손 했으며, 수많은 정적을 살해했다. 또한 한국 동란 중에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헌법을 개헌하는 등의 많은 과오를 범했다. 하지만 이러한 과오 때문에 그의 업적들이 묻혀진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어쩌면 그 당시 이승만의 독재는 필요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갈등과 6.25전쟁 이후 혼란스러운 대한민국 땅에서 강력한 중앙권력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지금과 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었을지 의문이 간다. 6.25전쟁 이전의 이승만이 정읍발언을 통해 단독정부수립의 의사를 밝혔을 때도 이를 놓고 민족분단의 원흉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이미 그 당시에 북한은 토지개혁과 국유화를 마쳤고 사실상의 정부의 형태를 갖춘 북조선임시위원회라는 사실상의 단독정부를 수립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승만의 정읍발언은 한반도내의 공산화를 방지하고자 한반도의 반쪽이라도 지켜내야겠다는 그의 자구책이었다.
만약 이승만이 독재를 하지 않았고 그의 독재 기간 동안 다른 이가 대통령을 했다면 단기간 내에 그만큼의 6.25전쟁 피해로 인한 복원과 교육, 외교 ,군사적 측면 등에 있어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었는가가 의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이승만이 독재자였다는 사실은 잊지는 않되 그가 독재자였다는 이유로 그의 업적을 묻어두거나 깎아 내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기존까지의 부정적인 견해만이 아니라 비판적인 사고를 하여 부정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긍정적인 요소를 놓치면 안된다.
이승만은 분명 엘리트였으며 그는 대한민국을 위해 그 누구보다 헌신했으며 대한민국이 6.25전쟁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그의 특기인 외교술을 살려 미국과 UN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끌어왔고 지금의 대한민국은 그 당시의 원조를 기반으로 발전을 한 것임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불과 수 십년 전까지의 원조를 받았다곤 보기 힘들 정도로 선진국 반열에 들어섰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심지어 빈곤국가에 대하여 원조를 하고 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혼란스러웠던 시기에도 대한민국의 장기적인 성장을 바라본 혜안을 지녔다. 이와 같은 결과는 그의 선경지명이 크게 기여하였다.
이승만에 대한 재평가는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져야 할 과제이며, 그가 ‘나쁜 사람이다 또는 좋은사람이다’ 라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의 잘못은 꼬집되 업적은 세밀히 살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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