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들어가며
Ⅱ. 훈민정음의 창제원리
1. 훈민정음 창제 이전
2. 훈민정음의 창제
1) 훈민정음 창제원리
2)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와 목적
3)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1) 훈민정음 반대 상소
(2) 세종의 훈민정음 반대상소 반박
4) 훈민정음의 반포
5) 훈민정음의 우수성
(1) 훈민정음의 기발한 발상과 디자인
(2) 훈민정음의 조직성
(3) 경이로운 모음체계
(4)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표음문자
(5) 훈민정음의 모아쓰기
3. 한글의 명칭 변천
1) 훈민정음(訓民正音)
2) 언문(諺文)
3) 반절(反切)
4) 국문(國文)
5) 한글
Ⅲ. 나가며
<참고문헌>
Ⅱ. 훈민정음의 창제원리
1. 훈민정음 창제 이전
2. 훈민정음의 창제
1) 훈민정음 창제원리
2)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와 목적
3)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1) 훈민정음 반대 상소
(2) 세종의 훈민정음 반대상소 반박
4) 훈민정음의 반포
5) 훈민정음의 우수성
(1) 훈민정음의 기발한 발상과 디자인
(2) 훈민정음의 조직성
(3) 경이로운 모음체계
(4)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표음문자
(5) 훈민정음의 모아쓰기
3. 한글의 명칭 변천
1) 훈민정음(訓民正音)
2) 언문(諺文)
3) 반절(反切)
4) 국문(國文)
5) 한글
Ⅲ. 나가며
<참고문헌>
본문내용
즉, 초성과 종성에 모두 쓰이는 경우는 앞의 글자는 초성 발음을 뒤의 글자는 종성 발음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이름을 정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초성과 종성에 모두 쓰이는 여덟 자는 ‘ㄱ-其役(기역)’, ‘ㄴ-尼隱(니은)’, ‘ㄷ-池末(디귿)’, ‘ㄹ-梨乙(리을)’ ‘ㅁ-眉音(미음)’, ‘ㅂ-非邑(비읍)’, ‘ㅅ-時衣(시옷)’, ‘ㆁ-異凝(이응)’ 초성에만 쓰이는 여덟 자는, ‘ㅋ-箕(키)’, ‘ㅌ-治(티)’ ,‘ㅍ-皮(피)’, ‘ㅈ-之(지)’, ‘ㅊ-齒(치)’, ‘ㅿ-而(이)’, ‘ㅇ-伊(이)’, ‘ㅎ-屎(히)’와 같이 적고 있다. (일부 글자는 당시의 발음과 지금의 발음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중성(모음)의 경우는, ‘ㅏ-阿(아)’, ‘ㅑ-也(야)’, ‘ㅓ-於(어)’, ‘ㅗ-吾(오)’ …… 처럼 적고 있다.
그러면 ‘니은, 리을, 미음, 비읍... 등등’에서처럼 첫음절은 ‘ㅣ’모음을 갖고 둘째 음절은 ‘으’ 모음을 갖는 것과는 달리, 왜 ‘ㄱ’과 ‘ㄷ’, ‘ㅅ’이 각각 ‘기역’, ‘디귿’, ‘시옷’ 등에서처럼 다른 방식으로 부르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훈몽자회>가 자음의 이름을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표기하다보니까 음이 비슷한 한자나 혹은 한자의 뜻을 이용하느라고 그렇게 된 것이다. 가령 ‘ㄱ’의 경우는 한자음에 ‘윽’이 없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비슷한 소리를 갖는 ‘역(役)’을 제시한 것이며 ‘ㄷ’과 ‘ㅅ’의 경우는 이 자음이 한자음에서 받침으로 사용된 예가 없기 때문에 한자 ‘끝 말(末)’자와 ‘옷 의(衣)’자를 제시하되 각각 그 뜻에 해당하는 고유어 ‘귿’과 ‘옷’으로 읽게 했던 것이다. 그러면 <훈민정음>에서는 어떻게 불렀을까? <훈민정음>에는 ‘ㄱ …’ 과 같은 식으로만 써있다. 이런 경우 <훈몽자회>의 초성 이름을 적는 방법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기’라고 읽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할 수 있다.
2)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와 목적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세종대왕은 그것을 훈민정음에서 몸소 언급했는데 그 내용을 보자면,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훈민정음 서문 풀이>
이러하다. 이 글을 통해 세종대왕의 생각을 읽어보자. 일단,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배달말이라 불리는 말을 쓰고 있었다. 한문은 이 배달말을 표현해내기에 맞지 않은 점이 많았다. 게다가 우리의 말을 다른 나라의 글자를 빌려 쓰는 점을 세종대왕은 안타깝게 여겼으며, 한문은 일반인이 배우기에 너무나 어려웠다. 때문에 글자를 깨치지 못한 일반인들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뜻을 알릴 수 없었다. 말을 전할 수 없으니 그에 따른 억울함이 오죽했으랴. 이러한 여러 상황을 통찰하고 세종대왕은 모든 백성들이 글을 쉽게 익혀 일상생활에 편히 쓰도록 하여 민중 문화의 보급과 생활의 향상을 꾀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와 다른 창제의 동기나 목적을 세종은 실제 생활에서 언급하기도 했는데,
“모름지기 세민(細民)으로 하여금 금법(禁法)을 알게 하여 두려워서 피하게 함이 옳겠다.” (14/11/07 임술)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26/02/20 경자)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28/09/29 갑오)
라고 하며 글을 알아서 백성들이 법을 잘 알지 못해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려했고, 훈민정음 창제가 사회기풍과 풍속의 변화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백성들의 의사소통과 그 편리함에 대해 훈민정음이 큰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3)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우리가 알기로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뜻이 맞아 오랜 세월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헌데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 103 26/02/20 경자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긴 상소를 통해 반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달리 집현전 학자들을 비롯한 여러 지식인들이 세종대왕과 뜻이 달랐던 것이다.
(1) 훈민정음 반대 상소
그 내용을 몇 가지 간추리자면 이러하다.
1. 우리 조선은 조종(임금의 시조)서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으로 대국(중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랐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함의 때를 당하여, 언문을 만듦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은 것이고, 새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모양이 비록 옛 전자를 본받았다 할지라도, 소리를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사실에 근거하는 바 없습니다. 만약,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중국을 섬기고, 중국 문물이나 사상을 우러러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으리까?
1. 예로부터 구주(중국의 모든 국토)의 안에 풍토가 비록 다르오나 사투리에 따라 따로 글자를 만드는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의 무리가 각각 제 글자가 있으나, 이는 모두 오랑캐의 일이라,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전해오는 말에 하(중국)로써 오랑캐를 변하게 한다 하였지, 오랑캐가 변하게 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나이다. 역대의 중국이 모두 우리나라를 기자의 유풍(전해오는 풍속)이 있어, 문물과 예악이 중화와 비긴다 하였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듦은 중화를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는 것이 옵니다. 이는 이른바 소합의 향(소아시아에서 나는 소합향 나무의 껍질에서 얻은 향료)을 버리고 말똥구리의 둥
예를 들면 초성과 종성에 모두 쓰이는 여덟 자는 ‘ㄱ-其役(기역)’, ‘ㄴ-尼隱(니은)’, ‘ㄷ-池末(디귿)’, ‘ㄹ-梨乙(리을)’ ‘ㅁ-眉音(미음)’, ‘ㅂ-非邑(비읍)’, ‘ㅅ-時衣(시옷)’, ‘ㆁ-異凝(이응)’ 초성에만 쓰이는 여덟 자는, ‘ㅋ-箕(키)’, ‘ㅌ-治(티)’ ,‘ㅍ-皮(피)’, ‘ㅈ-之(지)’, ‘ㅊ-齒(치)’, ‘ㅿ-而(이)’, ‘ㅇ-伊(이)’, ‘ㅎ-屎(히)’와 같이 적고 있다. (일부 글자는 당시의 발음과 지금의 발음이 차이가 난다.)
그리고 중성(모음)의 경우는, ‘ㅏ-阿(아)’, ‘ㅑ-也(야)’, ‘ㅓ-於(어)’, ‘ㅗ-吾(오)’ …… 처럼 적고 있다.
그러면 ‘니은, 리을, 미음, 비읍... 등등’에서처럼 첫음절은 ‘ㅣ’모음을 갖고 둘째 음절은 ‘으’ 모음을 갖는 것과는 달리, 왜 ‘ㄱ’과 ‘ㄷ’, ‘ㅅ’이 각각 ‘기역’, ‘디귿’, ‘시옷’ 등에서처럼 다른 방식으로 부르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훈몽자회>가 자음의 이름을 한자의 음과 뜻을 이용하여 표기하다보니까 음이 비슷한 한자나 혹은 한자의 뜻을 이용하느라고 그렇게 된 것이다. 가령 ‘ㄱ’의 경우는 한자음에 ‘윽’이 없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비슷한 소리를 갖는 ‘역(役)’을 제시한 것이며 ‘ㄷ’과 ‘ㅅ’의 경우는 이 자음이 한자음에서 받침으로 사용된 예가 없기 때문에 한자 ‘끝 말(末)’자와 ‘옷 의(衣)’자를 제시하되 각각 그 뜻에 해당하는 고유어 ‘귿’과 ‘옷’으로 읽게 했던 것이다. 그러면 <훈민정음>에서는 어떻게 불렀을까? <훈민정음>에는 ‘ㄱ …’ 과 같은 식으로만 써있다. 이런 경우 <훈몽자회>의 초성 이름을 적는 방법을 생각한다면 아마도 ‘기’라고 읽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할 수 있다.
2) 훈민정음 창제의 동기와 목적
훈민정음의 창제 동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세종대왕은 그것을 훈민정음에서 몸소 언급했는데 그 내용을 보자면,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字不相流通 故愚民 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予 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한다.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쉬이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훈민정음 서문 풀이>
이러하다. 이 글을 통해 세종대왕의 생각을 읽어보자. 일단,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배달말이라 불리는 말을 쓰고 있었다. 한문은 이 배달말을 표현해내기에 맞지 않은 점이 많았다. 게다가 우리의 말을 다른 나라의 글자를 빌려 쓰는 점을 세종대왕은 안타깝게 여겼으며, 한문은 일반인이 배우기에 너무나 어려웠다. 때문에 글자를 깨치지 못한 일반인들은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뜻을 알릴 수 없었다. 말을 전할 수 없으니 그에 따른 억울함이 오죽했으랴. 이러한 여러 상황을 통찰하고 세종대왕은 모든 백성들이 글을 쉽게 익혀 일상생활에 편히 쓰도록 하여 민중 문화의 보급과 생활의 향상을 꾀함에 그 목적이 있었다.
이와 다른 창제의 동기나 목적을 세종은 실제 생활에서 언급하기도 했는데,
“모름지기 세민(細民)으로 하여금 금법(禁法)을 알게 하여 두려워서 피하게 함이 옳겠다.” (14/11/07 임술)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 (26/02/20 경자)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할 뿐이다.” (28/09/29 갑오)
라고 하며 글을 알아서 백성들이 법을 잘 알지 못해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려했고, 훈민정음 창제가 사회기풍과 풍속의 변화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백성들의 의사소통과 그 편리함에 대해 훈민정음이 큰 도움이 되리라 믿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3)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
우리가 알기로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과 뜻이 맞아 오랜 세월 노력 끝에 만들어진 것이라 했다. 헌데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 103 26/02/20 경자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이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긴 상소를 통해 반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달리 집현전 학자들을 비롯한 여러 지식인들이 세종대왕과 뜻이 달랐던 것이다.
(1) 훈민정음 반대 상소
그 내용을 몇 가지 간추리자면 이러하다.
1. 우리 조선은 조종(임금의 시조)서부터 내려오면서 지성으로 대국(중국)을 섬기어, 한결같이 중화의 제도를 따랐는데. 이제 글을 같이하고 법도를 같이함의 때를 당하여, 언문을 만듦은 보고 듣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은 것이고, 새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모양이 비록 옛 전자를 본받았다 할지라도, 소리를 쓰고 글자를 합하는 것이 모두 옛것에 반대되니, 사실에 근거하는 바 없습니다. 만약, 중국에 흘러 들어가서 혹시라도 비난을 말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중국을 섬기고, 중국 문물이나 사상을 우러러 사모하는 데에 부끄러움이 없으리까?
1. 예로부터 구주(중국의 모든 국토)의 안에 풍토가 비록 다르오나 사투리에 따라 따로 글자를 만드는 것이 없사옵고, 오직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의 무리가 각각 제 글자가 있으나, 이는 모두 오랑캐의 일이라, 족히 말할 것이 없사옵니다. 전해오는 말에 하(중국)로써 오랑캐를 변하게 한다 하였지, 오랑캐가 변하게 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나이다. 역대의 중국이 모두 우리나라를 기자의 유풍(전해오는 풍속)이 있어, 문물과 예악이 중화와 비긴다 하였는데,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듦은 중화를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는 것이 옵니다. 이는 이른바 소합의 향(소아시아에서 나는 소합향 나무의 껍질에서 얻은 향료)을 버리고 말똥구리의 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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