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서론
Ⅱ.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
1)시대적 상황
2)프란시스코 사비에르의 생애-선교여행 전
Ⅲ.사비에르의 인도선교
1)인도에서의 활동
2)마치며
Ⅳ.사비에르의 일본선교
1)준비단계
2)일본에서의 활동
3)마치며
Ⅴ.결론
Ⅵ.참고문헌
Ⅱ.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
1)시대적 상황
2)프란시스코 사비에르의 생애-선교여행 전
Ⅲ.사비에르의 인도선교
1)인도에서의 활동
2)마치며
Ⅳ.사비에르의 일본선교
1)준비단계
2)일본에서의 활동
3)마치며
Ⅴ.결론
Ⅵ.참고문헌
본문내용
사』, p.105; 김종건,『예수회의 동방 선교와 적응주의 선교 전략의 성립』(대구사학회, 2011), pp.11-12에서 재인용.
1550년 12월 말, 사비에르는 일본의 천황을 대면하여 선교 허락을 받으려고 했지만, 본인의 남루한 외모 때문에 대면하지 못했다.앙드레 라비에 지음, 엘렌 르브랭·김지수 옮김,『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생애』, pp.99-103; 서양자,『16세기 동양 선교와 마테오 리치 신부』, p.17; 『중국 천주교회사』, p.105; 김종건,『예수회의 동방 선교와 적응주의 선교 전략의 성립』(대구사학회, 2011), p12에서 재인용.
1551년 3월에 사비에르는 야마구치로 돌아와서 그 지역 다이묘였던 오우찌 요시다가에게 헌상품을 전달해 환대를 받았다. 화답으로 다이묘가 하사한 보도와 황금을 사비에르가 사양하면서 다이묘의 마음을 얻어 영지내에서의 포교를 공인받게 되었다. 분고에서도 먼저 다이묘 오또모 요시시게를 만나 환영을 받음으로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었다.앙드레 라비에 지음, 엘렌 르브랭·김지수 옮김,『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생애』, p.105; 서양자,『16세기 동양 선교와 마테오 리치 신부』, pp.20-21; 『중국 천주교회사』, p.108; 김종건,『예수회의 동방 선교와 적응주의 선교 전략의 성립』(대구사학회, 2011), p12에서 재인용.
3)마치며
16세기 유럽인들이 만난 일본인은 지적이고 토론을 좋아하는 문명이 발달한 나라라는 긍정적인 이미지였다. ‘하얀 일본인’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인식되었고 현지 토착화라는 적응주의선교 정책의 기조를 형성한 것이다. 즉 일본인은 자신들과 같은 문명을 지니고 있다는 판단이 선교의 근거로 작용한 것이다. 이는 아메리카선교와 대비가 되는데 비슷한 시기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대표하는 단어는 “벌거벗음”이었고 이는 상대가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사비에르의 일본 선교의 성공적 요인을 정리하면, 첫째, 일본 및 일본 사람들의 관심을 기울이는 그 자세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분별없이 선교 활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 방문 전부터 가능한 일본의 정보를 얻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사비에르 본인의 가치관의 변화를 둘 수 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사비에르가 일본에 머물던 중에 개종자는 가고시마에서 야지로의 가족을 포함한 약 150명, 히라도에서 약 100명, 야마구치의 다이도우지로의 선교 활동으로의 약 500명. 하지만 사비에르의 공적은 개종한 사람의 수라고 하는 것보다도, 일본 선교의 문을 열었다는 점과, 후대에 적응 주의적 선교 방안을 개척했다는 것에 있다.김상근,『동서문화의 교류와 예수회 선교역사』, pp79-80; 윤재필,『16세기 예수회의 일본 선교 연구』(장로회신학대학교, 2013), p.38.
우리/그들이라는 차이를 넘어서 상호성을 모색하는 사비에르의 선교전략은 그것인 상황에 의해 요구되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는 400년 후 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이미 구현한 것으로 평가를
1550년 12월 말, 사비에르는 일본의 천황을 대면하여 선교 허락을 받으려고 했지만, 본인의 남루한 외모 때문에 대면하지 못했다.앙드레 라비에 지음, 엘렌 르브랭·김지수 옮김,『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생애』, pp.99-103; 서양자,『16세기 동양 선교와 마테오 리치 신부』, p.17; 『중국 천주교회사』, p.105; 김종건,『예수회의 동방 선교와 적응주의 선교 전략의 성립』(대구사학회, 2011), p12에서 재인용.
1551년 3월에 사비에르는 야마구치로 돌아와서 그 지역 다이묘였던 오우찌 요시다가에게 헌상품을 전달해 환대를 받았다. 화답으로 다이묘가 하사한 보도와 황금을 사비에르가 사양하면서 다이묘의 마음을 얻어 영지내에서의 포교를 공인받게 되었다. 분고에서도 먼저 다이묘 오또모 요시시게를 만나 환영을 받음으로 자유롭게 선교할 수 있었다.앙드레 라비에 지음, 엘렌 르브랭·김지수 옮김,『성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생애』, p.105; 서양자,『16세기 동양 선교와 마테오 리치 신부』, pp.20-21; 『중국 천주교회사』, p.108; 김종건,『예수회의 동방 선교와 적응주의 선교 전략의 성립』(대구사학회, 2011), p12에서 재인용.
3)마치며
16세기 유럽인들이 만난 일본인은 지적이고 토론을 좋아하는 문명이 발달한 나라라는 긍정적인 이미지였다. ‘하얀 일본인’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가 예수회 선교사들에게 인식되었고 현지 토착화라는 적응주의선교 정책의 기조를 형성한 것이다. 즉 일본인은 자신들과 같은 문명을 지니고 있다는 판단이 선교의 근거로 작용한 것이다. 이는 아메리카선교와 대비가 되는데 비슷한 시기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대표하는 단어는 “벌거벗음”이었고 이는 상대가 문화적으로 열등하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사비에르의 일본 선교의 성공적 요인을 정리하면, 첫째, 일본 및 일본 사람들의 관심을 기울이는 그 자세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둘째, 분별없이 선교 활동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본 방문 전부터 가능한 일본의 정보를 얻었다는 점. 마지막으로, 사비에르 본인의 가치관의 변화를 둘 수 있다.
기록에 남아 있는 사비에르가 일본에 머물던 중에 개종자는 가고시마에서 야지로의 가족을 포함한 약 150명, 히라도에서 약 100명, 야마구치의 다이도우지로의 선교 활동으로의 약 500명. 하지만 사비에르의 공적은 개종한 사람의 수라고 하는 것보다도, 일본 선교의 문을 열었다는 점과, 후대에 적응 주의적 선교 방안을 개척했다는 것에 있다.김상근,『동서문화의 교류와 예수회 선교역사』, pp79-80; 윤재필,『16세기 예수회의 일본 선교 연구』(장로회신학대학교, 2013), p.38.
우리/그들이라는 차이를 넘어서 상호성을 모색하는 사비에르의 선교전략은 그것인 상황에 의해 요구되었던 것이라 하더라도, 큰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는 400년 후 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이미 구현한 것으로 평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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