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여행시에 꼭 필요한 자료 모음입니다 다른 책들에서 다루지 않는 사안들 또한 다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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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유럽여행시에 꼭 필요한 자료 모음입니다 다른 책들에서 다루지 않는 사안들 또한 다루었습니다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Madrid
4~15
Barcelona
16~26
Paris
27~65
Brussel
66~74
Amsterdam
75~82
Hanover
83~91
Berlin
92~106
Praha
107~114
Vienna
115~124
Salzburg
125~131
Munich
132~133
Zurich
134~136
Interlaken
137~140
Milan
141~151
Firenze
152~169
Rome
170~187


<1> 건축, 미술 양식
<2> 르네상스 미술, 문화, 건축
<3> 르네상스
<4> 프로테스탄트
<5> 기사도 소설
<6> 서유럽 미술사
<7> 스페인의 실생활
<8> 오리엔탈리즘과 서유럽의 세계지배
<9> 산업혁명
<10>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11> 유럽연합과 브렉시트
<12> 에술사 기본
<13> 나치즘
<14> 나폴레옹
<15> 일상 회화표현

본문내용

토 공략, 그리고 800년의 로마 원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모두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벌인 경우였고, 샤를마뉴는 그 때마다 로마를 방문해 교황에게 예우를 다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800년에는 교황 레오 3세의 손으로 성 베드로 성당에서 ‘서로마 황제’의 황제관이 샤를마뉴의 머리에 씌워졌다.
이는 프랑크와 로마 교회 양쪽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으로써 성사된 일이었다. 샤를마뉴는 사방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침략과 반란을 억누르기에 무력만으로는 한계를 느꼈으며, 따라서 교회의 권위와 옛 로마제국의 권위를 빌리고 싶어 했다. 한편 로마 교회는 726년에 비잔틴제국의 레오 3세가 ‘성상파괴령’을 내리고 로마교황에게도 교회 안팎의 모든 성화상을 없애라고 지시하자 이를 거부함으로써 비잔틴제국과 등진 처지였다. 샤를마뉴처럼 한 국가의 정점에 있는 사람도 글을 모를 정도였던 당시의 서유럽 사정상, 예수나 성인들의 그림이 없이는 교회가 유지되기 힘들었으므로 이를 우상숭배라며 무조건 파괴하라는 비잔틴 황제의 말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곧바로 정치적 고립을 가져왔다. 비잔틴 황제는 로마에 인접한 롬바르드를 부추겨 교황을 공격하게 했으며, 로마 교회 내에서도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비잔틴 계열의 성직자들에게도 음모를 꾸미게 했다. 그리하여 역대 교황은 생존을 위해 프랑크 왕국의 힘을 빌리려 해왔으며, 샤를마뉴를 서로마 황제로 인정한 것은 그 결정판이었다.
라파엘로가 그린 샤를마뉴 대관식 상상도
옛 로마의 전통과는 전혀 무관한 “프랑크 야만족”이 서로마 황제로 나선 것에 비잔틴 황제 니케포루스는 격분했는데, 샤를마뉴는 되도록 비잔틴과 충돌하지 않고 외교적으로 무마하는 방침을 취했다. 그래서 비잔틴으로 보내는 문서에는 항상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지 않으며 언어 표현에 각별히 주의했다. 그 노력은 결실을 보아, 니케포루스를 계승한 미카엘 1세는 812년에 샤를마뉴를 황제로 인정했다.
샤를마뉴는 ‘기독교의 적’ 이슬람권에 대해서도 무력보다는 외교 위주로 접근했다. 막강한 이슬람 제국과 굳이 충돌할 필요가 없다고 본 때문도 있지만, 비잔틴과 이슬람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하여 이익을 보기 위함도 있었다. 바그다드에서 아바스 제국을 다스리던 하룬 알 라시드는 샤를마뉴의 이런 우호적 태도에 호응하여 친선 사절과 예물을 교환했다.
샤를마뉴 자신은 끝내 문맹으로 남았지만(글을 배우려고 노력은 했다고 한다), 그는 문치에도 각별히 힘을 기울였다. 수도 아헨에 학교를 세우고 곳곳의 수도원에 학교를 부설하는 일을 장려했으며, 고전 문헌을 널리 수집하고 정리했다. 그리고 제국의 바깥에서도 널리 학자를 초빙했는데, 그 중에서 영국 출신의 앨퀸은 샤를마뉴에게 ‘스승’으로 대접받는다. 이런 샤를마뉴의 노력으로 서로마 멸망 후 오랫동안 황량해졌던 서유럽의 문화는 모처럼 부흥하여, “카롤링거 르네상스”로 불리는 시대를 맞는다.
제국의 몰락, 유럽의 탄생
하지만 샤를마뉴의 정책이 마냥 온건하고 신사적이지는 않았다. 거친 이민족들을 제압하려는 뜻에서인지, 굴복시킨 적들을 종종 잔혹하게 학살했다. 그가 참여한 마지막 전쟁인 808년의 데인 인들과의 전쟁에서는 붙잡은 포로들의 키를 재어 검의 길이보다 크면 모조리 살육하기도 했다. 또한 새로 복속시킨 게르만인이나 슬라브인들에게 기독교를 강요했는데, 이를 거부하거나 교회나 성직자를 공격한 자들은 가차없이 처형했다. 심지어 예배를 빠지거나 금식 주간을 소홀히 한 사람조차 처형했으니, 오늘날의 사학자들이 샤를마뉴를 “최초의 기독교 근본주의 지도자”로 부를 만도 했다.
샤를마뉴가 세운 아헨 대성당
그는 왕권의 강화와 제국의 통합을 늘 고심했다. ‘제국’이라고 하지만 당시의 서유럽은 중앙권력이 지방에 미치는 한도가 매우 미약한 사회였다. 샤를마뉴가 직접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땅은 수도 아헨 일대에 불과했다. 그가 끊임없이 동서남북을 다니며 전쟁을 벌인 까닭에는 새로 얻은 영토를 신하들에게 봉토로 나눠주고 충성을 얻어내려는 뜻, 그리고 오래 전에 복속시킨 영주들의 충성을 재확인하려는 뜻도 있었다. 그는 봉토를 나눠줄 때도 인접한 땅을 한 사람에게 주지 않았으며, 새로 봉토를 주면서 예전에 준 봉토는 돌려받는 등 지방 영주들이 자체적인 힘을 키우지 않게 만전을 기했다고 한다. 그러고도 모자라 지방귀족을 감시하는 순찰사를 각지에 파견했다. 그는 매년 5월과 10월에 귀족과 자유민을 소집해 집회를 열었으며, 귀족들과의 회의를 거쳐 칙령으로 새 법률을 제정하고, 자유민들의 충성 서약을 받은 뒤 전쟁터로 출정했다. 칙령은 다소 일관성이 없었으며, 비판적인 견해로는 “10월에 만든 법을 이듬해 5월에 폐지하기를 반복했다.”
샤를마뉴는 47년이나 통치했으며, 그처럼 강한 권력과 긴 통치기간에는 보통 후계자 문제와 반역 음모가 따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샤를마뉴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중요한 반란은 두 번뿐이었는데, 그 중 한 차례인 792년에는 그의 맏아들이지만 버림받았던 아들인 피핀(곱사등이 피핀)이 샤를마뉴와 힐디가르트 황후, 그리고 이복형제들을 암살하고 제위에 오르려다 발각되었다. 샤를마뉴는 다섯번 결혼했고 따로 다섯 명의 후궁을 두었다. 그리고 모두 20명의 자녀를 보았다. 샤를마뉴는 세 번째 황후(곱사등이 피핀을 낳은 히밀트루드와는 혼인관계가 모호했고, 공식적인 첫째 황후 데시데라타와는 1년 만에 이혼했기에 그녀가 실질적인 첫째 황후라 봐도 좋았다)인 힐디가르트가 낳은 셋째 아들(첫째와 둘째는 사망했다) 루이를 후계자로 삼아 813년에 공동 황제 지위를 주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814년에 늑막염으로 사망했다.
샤를마뉴의 제국 운영 방식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계승한 경건왕 루이(루트비히 1세)는 아버지처럼 사방을 돌며 정복과 진압 전쟁을 벌이지 않았고, 그러자 지방의 영주들은 곧바로 독립성을 키웠다. 중계무역 역시 비잔틴과 이슬람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프랑크를 따돌린 직접 무역으로 바뀌어갔다. 또한 루이의 생전에도 계승권을 놓고 반란을 일으킨 그의 자식들은 루이의 사망(840년) 후 치열한 골육상잔을 벌였으며, 이는 843년의 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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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럽,   여행,   역사,   문화,   예술,   여행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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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8.11.27
  • 저작시기20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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