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답사를 떠나며
2. 이행 작가 소개
3. 시비
4. 문경새재와 교귀원
5. 문인답사 후기
2. 이행 작가 소개
3. 시비
4. 문경새재와 교귀원
5. 문인답사 후기
본문내용
씨의 복위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되고, 이어 함안으로 옮겨졌다. 1506년 초 거제도에 위리안치되었다.(약 7개월) 이 해 9월에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와 다시 홍문관 교리로 등용되고, 이어 부응교로 승진되어 사가독서(賜暇獨書)하였다. 1513년(중종 8) 다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가 이듬 해 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사섬사정(司贍寺正)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신진 사류인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 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趙光祖)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봉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사섬사정(司贍寺正)을 거쳐 1515년 사간원사간이 되고, 이어 대사간으로 승진하였다.
이 때 신진 사류인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상소하자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이어 첨지중추부사. 홍문관부제학.성균관대사성.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17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그러나 왕의 신임을 얻고 있는 조광조(趙光祖)등 신진 사류로부터 배척을 받아 첨지중추부사로 좌천되자 사직하고 충청도 면천에 내려갔다. 이듬해 봉조참의.호조참의로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일파가 실각하자 홍문관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에 임명됨과 동시에 대사헌과 예문관대제학을 겸하였다. 그리고 동지의금부사와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도 겸임하였다. 1530년 《동국여지승람》의 신증(新增)을 책임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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