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
3. 제국주의 시대의 아시아 선교
4. 중국 선교상황 (남경교안과 아편전쟁을 중심으로)
5. 나아가며
2. 제국주의 시대의 선교 그리고 교회와 국가의 관계
3. 제국주의 시대의 아시아 선교
4. 중국 선교상황 (남경교안과 아편전쟁을 중심으로)
5. 나아가며
본문내용
보조적 종교 이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1)남경교안(1616-1617)
중국에서 기독교가 전교된 이래 남경교안(南京敎案)이 일어나기 전에도 작은 규모의 교안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남경교안은 중앙정부가 개입한 첫 번째 박해사건으로 예수회가 중국 선교를 시작한 지 30여 년 만에 발생하여 기독교가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세력으로 인식될 때 어떠한 적대적 반응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남경교안(南京敎案)에 대해서는 주로 예수회 보관자료를 이용한 연구가 많으나 중국 측 자료가 충실히 남아있고, 특히 『破師集』이 집중적으로 연구되면 더 풍부한 학문적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張維華,1956.“南京敎案始末” 『中國近代史論叢』.第1輯 第二冊. 臺北 : 正中書國,201-226; 도희서 등, 67-123; 보성관. 1993. “中國文化的第一次激烈衝突-明季南京敎案文化背景분석.” 『史學集刊 4』, 57-63; Kelly, Edward Thomas. 1971. \"The Anti-christian Persecution of 1616-1617 in Nanking.\" Ph. D, diss., Columbia Univ.; Young, John D. 1983.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the First Encounter. Hong Kong: Hong Kong Univ. Press,59-76)등 참조. 안경덕, 위의 글,53에서 재인용.
남경교안에 대해 살펴보자. 1616년 5월부터 12월까지 남경예부시랑 심각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중국의 법통을 혼란시키고 무리를 만들어 불궤를 꾀하며 요순 이래의 역법을 혼란시키며 천주교 교인은 제사를 소홀히 하여 이어오는 좋은 풍습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상소를 세 차례나 올렸고, 예부상서 방종철, 내관 위진충. 유조, 유학자 안문휘, 서여가 등의 도움을 받아 1617년 2월 3일에 세 명의 예수회 신부를 포함한 27명의 천주교 관련 구속자에 대하여 중앙정부차원의 징계와 함께 선교활동의 금지조치를 얻어 냈다. 심각은 선교사들의 불법입국, 국가존위가 걸린 선교활동, 중국의 전통이론과 상치되는 서양의 천문, 역법 등을 문제 삼았다. 심각은 왕조와 중국 전통의 수호자로서 성실한 관리의 입장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남경은 본래 건국수도였고 북경천도한 후에도 상징적인 도시로 반역기도의 혐의를 조정으로부터 받고 있어 법령의 수호에 더욱 앞장설 수밖에 없는 입장 이었고, 국가의 정통을 수호한다는 자부심이 깔린 보수적인 성격의 도시였다. 심각이 주도한 남경교안은 이러한 남경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이곳에서 사교인 가톨릭이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여 가톨릭이 정통을 위해하는 잠재성이 있다는 것을 고변하여 중앙정부 차원의 조치를 요구한 사건이었다. 이 교안의 영향으로 천주교가 사교로 인식 되었고 천주교가 선교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중앙정부 차원의 금교조치를 당했고,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서 5년 이상 추방당하여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반기독교 세력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역사적으로는 명나라가 참전했던 동북아전쟁, 후금의 발흥, 왜구의 빈번한 출몰, 환관의 발호, 관료의 부패, 종교적 색채를 가진 세력이 주도한 지방민의 봉기 등 국기를 흔드는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중복하여 일어났으므로 외세에 대한 경계와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불안정하고 방어적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606-1607년에 반교사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취한 입장은 다른 사교에 대하여도 동일하게 견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교사인이라 통칭되는 수구세력들은 기독
1)남경교안(1616-1617)
중국에서 기독교가 전교된 이래 남경교안(南京敎案)이 일어나기 전에도 작은 규모의 교안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남경교안은 중앙정부가 개입한 첫 번째 박해사건으로 예수회가 중국 선교를 시작한 지 30여 년 만에 발생하여 기독교가 기존 질서에 대한 위협세력으로 인식될 때 어떠한 적대적 반응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남경교안(南京敎案)에 대해서는 주로 예수회 보관자료를 이용한 연구가 많으나 중국 측 자료가 충실히 남아있고, 특히 『破師集』이 집중적으로 연구되면 더 풍부한 학문적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張維華,1956.“南京敎案始末” 『中國近代史論叢』.第1輯 第二冊. 臺北 : 正中書國,201-226; 도희서 등, 67-123; 보성관. 1993. “中國文化的第一次激烈衝突-明季南京敎案文化背景분석.” 『史學集刊 4』, 57-63; Kelly, Edward Thomas. 1971. \"The Anti-christian Persecution of 1616-1617 in Nanking.\" Ph. D, diss., Columbia Univ.; Young, John D. 1983. Confucianism and Christianity-the First Encounter. Hong Kong: Hong Kong Univ. Press,59-76)등 참조. 안경덕, 위의 글,53에서 재인용.
남경교안에 대해 살펴보자. 1616년 5월부터 12월까지 남경예부시랑 심각은 예수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이 중국의 법통을 혼란시키고 무리를 만들어 불궤를 꾀하며 요순 이래의 역법을 혼란시키며 천주교 교인은 제사를 소홀히 하여 이어오는 좋은 풍습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상소를 세 차례나 올렸고, 예부상서 방종철, 내관 위진충. 유조, 유학자 안문휘, 서여가 등의 도움을 받아 1617년 2월 3일에 세 명의 예수회 신부를 포함한 27명의 천주교 관련 구속자에 대하여 중앙정부차원의 징계와 함께 선교활동의 금지조치를 얻어 냈다. 심각은 선교사들의 불법입국, 국가존위가 걸린 선교활동, 중국의 전통이론과 상치되는 서양의 천문, 역법 등을 문제 삼았다. 심각은 왕조와 중국 전통의 수호자로서 성실한 관리의 입장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남경은 본래 건국수도였고 북경천도한 후에도 상징적인 도시로 반역기도의 혐의를 조정으로부터 받고 있어 법령의 수호에 더욱 앞장설 수밖에 없는 입장 이었고, 국가의 정통을 수호한다는 자부심이 깔린 보수적인 성격의 도시였다. 심각이 주도한 남경교안은 이러한 남경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이곳에서 사교인 가톨릭이 공공연히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하여 가톨릭이 정통을 위해하는 잠재성이 있다는 것을 고변하여 중앙정부 차원의 조치를 요구한 사건이었다. 이 교안의 영향으로 천주교가 사교로 인식 되었고 천주교가 선교를 시작한 후 처음으로 중앙정부 차원의 금교조치를 당했고,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서 5년 이상 추방당하여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반기독교 세력이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역사적으로는 명나라가 참전했던 동북아전쟁, 후금의 발흥, 왜구의 빈번한 출몰, 환관의 발호, 관료의 부패, 종교적 색채를 가진 세력이 주도한 지방민의 봉기 등 국기를 흔드는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중복하여 일어났으므로 외세에 대한 경계와 공격의 빌미를 줄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져 예수회 선교사들에 대해서도 불안정하고 방어적 입장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606-1607년에 반교사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취한 입장은 다른 사교에 대하여도 동일하게 견지하였다고 볼 수 있다. 반교사인이라 통칭되는 수구세력들은 기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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