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 설립자 Martha Scott Breun (傅馬太) -
목차
I. 시대적 배경
1
II. 부르엔 여사와 신명의 태동
2
III. 독립운동과 근대교육
12
IV. 신사참배와 신명
16
V. 항거의 장
18
VI. 부르엔 여사의 교육유산
21
VII. 신명 교육의 발전상
22
VIII. 부르엔 여사의 교육사적 의의
27
목차
I. 시대적 배경
1
II. 부르엔 여사와 신명의 태동
2
III. 독립운동과 근대교육
12
IV. 신사참배와 신명
16
V. 항거의 장
18
VI. 부르엔 여사의 교육유산
21
VII. 신명 교육의 발전상
22
VIII. 부르엔 여사의 교육사적 의의
27
본문내용
박덕일 장로의 축사, 동산 병원장 별위취 씨의 격려사가 있은 후 안의와 목사 부인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재학생들의 교가 제창으로 끝났다.
제1회 졸업장
4. 학생 자치 활동
1) 전도회
말하자면‘회’라는 명칭을 가졌으니까 그룹 운동체 일 것이지만 그러나 이렇다 할 뚜렷한 체계와 조직을 가진 것은 못되었다. 그저 학생 전원이 회원이 되고 회비라하여 월5전 내지 10전씩을 내어 경비로 쓰게 하였을 뿐 임원으로는 회장과 회계 두 사람밖에 없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체계와 조직은 미숙하였으나 활동은 활발하였다. 교내 활동은 학생들이 전적으로 하였고, 교외 활동은 전적으로 하였고, 교외 활동은 전도 부인을 한 명 두고 전도회 이름으로 전도사업을 하게 하였다. 전도회 활동은 교내외적으로 부단히 계속하여 학생 자치활동의 모체가 되어 산하에 각부를 두고 학생들의 학교활동을 계속해서 기간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전도회는 1908년 5월에 김희복 선생의 지도 아래 임성례가 초대 회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2) 감사절과 성탄절
1908년 추수감사절은 전도회 주관으로 제일예배당에서 감사 예배를 드렸다. 설교는 박덕일 조사가 하였다. 이 감사 예배에 감사 헌금이 10원 정도나 나왔으며, 무, 배추, 대추, 감, 밤 등 많은 농산물로 감사드렸다. 이 예배를 시작으로 해마다 감사절을 제일 예배당에서 드리게 되었다. 1911년 감사절에는 김천일 목사가 제일예배당에 초대 목사로 부임하게 되어 더욱 성대한 감사 예배를 드렸는데, 이때 참가한 학생 수는 80여 명이나 되었으며 학생마다 감사 봉투에 성금을 넣어서 감사를 드렸다. 특히 이 해의 감사 예배는 첫 졸업을 앞둔 ‘신명’이었던 만큼 풍성한 감사를 드렸던 것이다. 1907년 크리스마스는 부르엔 여사의 따뜻한 배려로 학생 전원이 교장 댁에 초청되어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를 지냈다. 그 이듬해인 1908년 크리스마스 때에는 학생들이 제법 크리스마스 트리도 만들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교장 댁에서 성대하게 지냈다. 또 새벽송 성가대는 새벽 세 시부터 교장 댁을 위시하여 선교사촌을 가가호호 찾아다니면서 성탄 노래를 불렀다.
동산 성경학교에서 합동 축하를 가졌으면 하는 의향이 있었기 때문에 1935년에는 곧잘 동산 성경학교에 가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두 학교 학생들이 공동으로 만든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에 은지로 버선을 여러 개 만들어 걸고서는 1전, 5전, 또는 10전짜리를 넣기로 하고 몇 그룹으로 나눈 후 게임에서 승리하면 그 돈으로 승리팀에서 한 턱을 낸다는 형식을 취하여 이브를 즐겁게 보내고 새벽송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때 시국은 전쟁 관계로 암담하였지만 직접 학무과의 간섭을 받지 않던 성경학교에서는 교내적으로는 풍성한 축하회를 가졌던 것이다. 신명이 성경학교와 합동 축하를 하게 된 것도 간섭 없는 에덴동산을 찾으려는 간절한 심리에서였다.
5. 회상의 편린
1) 교가
1911년 5월 둘째 수요일에 교가가 완성되었다. 학생들, 특히 졸업을 앞둔 상급반 학생들은 졸업 전에 교가가 있어야 한다고 재삼 요청이 심해지자 교장 부르엔 여사는 평양에서 온 차보석 선생과 3학년생 임성례를 교가 제정위원으로 지명하였다. 두 사람은 1주일간 꼬박 기도를 드리면서 7절로 된 교사를 지었다.
기도실은 목욕탕이었다. 목욕재계하면서 정성을 드렸다 한다. 가사가 지어지자 작곡이 문제가 되었다. 작곡까지 차보석 선생이 짓느냐 하는 논의가 있었지만 작곡은 자매관계 학교인 계성학교의 백신칠 선생에게 부탁하기로 하였다. 이 부탁을 받은 선생은 “작곡이란 첫 아이를 낳는 신부의 고통과도 같은 것이다.”라고 그동안의 깊은 고민을 피력하였다. 이 교가는 1920년 전국적으로 통용된 중등 음악교과서 ‘창가집’46쪽에 학교 사진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교가는 1914년 개학될 때까지 불렸다.
교가(1911.5)
작사 차보석 작곡 백신철
1. 하나님 사랑 크고 넓으사 우리의 소원 이루시는 중/대구 동산 신명학교실은 굉장하게 지었네
후렴. 만세 만세 신명중학교 세상 빛과 주께 영화니/천지가 진하고 하해 닮도록 신명학교 만세라
2. 천국에 기초된 신명학교 믿음과 구원의 반석 터 위에/주님의 보혈로 굳게 세웠네 신명학교 만세라
3. 택함을 입은 우리 학도들 주님의 사랑 모본하여서/화평과 인내로써 사괴어 신명학교 만세라
4. 우리의 학교 놓은 명의로 빛나고 명명하게 전파할 일/실심과 열심히 공부함으로 공부함이니 신명 학교 만세라
5. 주 은혜 날개 밑 보호 아래서 천문과 지리 모든 학문을/주님을 위해서 배우세 신명학교 만세라
6. 광활한 천지 죄악 세상에 사망의 길로 가는 동포들/우리 손으로 구원합세다 신명학교 만세라
7. 만만세 억만세 신명학교 권능의 주님 재림하실 때/천국 일꾼을 조성하시오 신명학교 만세라
1914년에 개작된 교가는 계성학교 교사인 백신칠 선생이 신명학교에 강사로 출강하는 동안 작사한 것인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신명학교로 부임하게 되었다.
교가(1914)
작사· 작곡 백신칠
1. 하나님 사랑 크고 넓으사 믿음과 구원 반석 터 위에/주님의 보혈로 굳게 세웠네 신명학교 만세
후렴. 만세 만세 신명여학교 세상 빛과 주께 영화니/천지가 진하고 하해 닳도록 신명학교 만세라
2. 진리로 세운 우리 학교 지덕체영육 베푸는도다/우리의 의무와 최선 다하여 학교를 사랑하세
3. 한 방울 물과 적은 티끌은 태산과 하해를 이룸과 같이/우리의 봉사적 행위는 주님께 영광되네
이 교가는 1936년 9월에 일인들의 강제에 의하여 일어 교가를 제정하여 부를 때까지 계속 애창되었다.
2) 국치(國恥)의 합방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발표되자 학생들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부르엔 여사도 걱정의 표정이었다. 이쾌영 교감은 사실 여부를 알려고 일부러 시청 앞에까지 가서 벽보를 보고 온 것이었다. 차보석 선생은 교실에 들어와서 교단을 치면서 통곡을 하였다. 통곡하는 선생의 뒤에는 이복심 외7,8명의 학생들이 엎드려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한편 시청 벽보를 보러 갔던 이쾌영 교감은 홧김에 술을 먹고 주정을 부리는 시민한테 욕을 보고 들어온 것이다. 길거리마다 울분에 상기된
제1회 졸업장
4. 학생 자치 활동
1) 전도회
말하자면‘회’라는 명칭을 가졌으니까 그룹 운동체 일 것이지만 그러나 이렇다 할 뚜렷한 체계와 조직을 가진 것은 못되었다. 그저 학생 전원이 회원이 되고 회비라하여 월5전 내지 10전씩을 내어 경비로 쓰게 하였을 뿐 임원으로는 회장과 회계 두 사람밖에 없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체계와 조직은 미숙하였으나 활동은 활발하였다. 교내 활동은 학생들이 전적으로 하였고, 교외 활동은 전적으로 하였고, 교외 활동은 전도 부인을 한 명 두고 전도회 이름으로 전도사업을 하게 하였다. 전도회 활동은 교내외적으로 부단히 계속하여 학생 자치활동의 모체가 되어 산하에 각부를 두고 학생들의 학교활동을 계속해서 기간적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전도회는 1908년 5월에 김희복 선생의 지도 아래 임성례가 초대 회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2) 감사절과 성탄절
1908년 추수감사절은 전도회 주관으로 제일예배당에서 감사 예배를 드렸다. 설교는 박덕일 조사가 하였다. 이 감사 예배에 감사 헌금이 10원 정도나 나왔으며, 무, 배추, 대추, 감, 밤 등 많은 농산물로 감사드렸다. 이 예배를 시작으로 해마다 감사절을 제일 예배당에서 드리게 되었다. 1911년 감사절에는 김천일 목사가 제일예배당에 초대 목사로 부임하게 되어 더욱 성대한 감사 예배를 드렸는데, 이때 참가한 학생 수는 80여 명이나 되었으며 학생마다 감사 봉투에 성금을 넣어서 감사를 드렸다. 특히 이 해의 감사 예배는 첫 졸업을 앞둔 ‘신명’이었던 만큼 풍성한 감사를 드렸던 것이다. 1907년 크리스마스는 부르엔 여사의 따뜻한 배려로 학생 전원이 교장 댁에 초청되어 즐거운 크리스마스 이브를 지냈다. 그 이듬해인 1908년 크리스마스 때에는 학생들이 제법 크리스마스 트리도 만들고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교장 댁에서 성대하게 지냈다. 또 새벽송 성가대는 새벽 세 시부터 교장 댁을 위시하여 선교사촌을 가가호호 찾아다니면서 성탄 노래를 불렀다.
동산 성경학교에서 합동 축하를 가졌으면 하는 의향이 있었기 때문에 1935년에는 곧잘 동산 성경학교에 가게 되었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두 학교 학생들이 공동으로 만든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에 은지로 버선을 여러 개 만들어 걸고서는 1전, 5전, 또는 10전짜리를 넣기로 하고 몇 그룹으로 나눈 후 게임에서 승리하면 그 돈으로 승리팀에서 한 턱을 낸다는 형식을 취하여 이브를 즐겁게 보내고 새벽송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때 시국은 전쟁 관계로 암담하였지만 직접 학무과의 간섭을 받지 않던 성경학교에서는 교내적으로는 풍성한 축하회를 가졌던 것이다. 신명이 성경학교와 합동 축하를 하게 된 것도 간섭 없는 에덴동산을 찾으려는 간절한 심리에서였다.
5. 회상의 편린
1) 교가
1911년 5월 둘째 수요일에 교가가 완성되었다. 학생들, 특히 졸업을 앞둔 상급반 학생들은 졸업 전에 교가가 있어야 한다고 재삼 요청이 심해지자 교장 부르엔 여사는 평양에서 온 차보석 선생과 3학년생 임성례를 교가 제정위원으로 지명하였다. 두 사람은 1주일간 꼬박 기도를 드리면서 7절로 된 교사를 지었다.
기도실은 목욕탕이었다. 목욕재계하면서 정성을 드렸다 한다. 가사가 지어지자 작곡이 문제가 되었다. 작곡까지 차보석 선생이 짓느냐 하는 논의가 있었지만 작곡은 자매관계 학교인 계성학교의 백신칠 선생에게 부탁하기로 하였다. 이 부탁을 받은 선생은 “작곡이란 첫 아이를 낳는 신부의 고통과도 같은 것이다.”라고 그동안의 깊은 고민을 피력하였다. 이 교가는 1920년 전국적으로 통용된 중등 음악교과서 ‘창가집’46쪽에 학교 사진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교가는 1914년 개학될 때까지 불렸다.
교가(1911.5)
작사 차보석 작곡 백신철
1. 하나님 사랑 크고 넓으사 우리의 소원 이루시는 중/대구 동산 신명학교실은 굉장하게 지었네
후렴. 만세 만세 신명중학교 세상 빛과 주께 영화니/천지가 진하고 하해 닮도록 신명학교 만세라
2. 천국에 기초된 신명학교 믿음과 구원의 반석 터 위에/주님의 보혈로 굳게 세웠네 신명학교 만세라
3. 택함을 입은 우리 학도들 주님의 사랑 모본하여서/화평과 인내로써 사괴어 신명학교 만세라
4. 우리의 학교 놓은 명의로 빛나고 명명하게 전파할 일/실심과 열심히 공부함으로 공부함이니 신명 학교 만세라
5. 주 은혜 날개 밑 보호 아래서 천문과 지리 모든 학문을/주님을 위해서 배우세 신명학교 만세라
6. 광활한 천지 죄악 세상에 사망의 길로 가는 동포들/우리 손으로 구원합세다 신명학교 만세라
7. 만만세 억만세 신명학교 권능의 주님 재림하실 때/천국 일꾼을 조성하시오 신명학교 만세라
1914년에 개작된 교가는 계성학교 교사인 백신칠 선생이 신명학교에 강사로 출강하는 동안 작사한 것인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신명학교로 부임하게 되었다.
교가(1914)
작사· 작곡 백신칠
1. 하나님 사랑 크고 넓으사 믿음과 구원 반석 터 위에/주님의 보혈로 굳게 세웠네 신명학교 만세
후렴. 만세 만세 신명여학교 세상 빛과 주께 영화니/천지가 진하고 하해 닳도록 신명학교 만세라
2. 진리로 세운 우리 학교 지덕체영육 베푸는도다/우리의 의무와 최선 다하여 학교를 사랑하세
3. 한 방울 물과 적은 티끌은 태산과 하해를 이룸과 같이/우리의 봉사적 행위는 주님께 영광되네
이 교가는 1936년 9월에 일인들의 강제에 의하여 일어 교가를 제정하여 부를 때까지 계속 애창되었다.
2) 국치(國恥)의 합방
1910년 8월 29일 한일병합이 발표되자 학생들은 강한 충격을 받았다. 부르엔 여사도 걱정의 표정이었다. 이쾌영 교감은 사실 여부를 알려고 일부러 시청 앞에까지 가서 벽보를 보고 온 것이었다. 차보석 선생은 교실에 들어와서 교단을 치면서 통곡을 하였다. 통곡하는 선생의 뒤에는 이복심 외7,8명의 학생들이 엎드려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한편 시청 벽보를 보러 갔던 이쾌영 교감은 홧김에 술을 먹고 주정을 부리는 시민한테 욕을 보고 들어온 것이다. 길거리마다 울분에 상기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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