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ant-Laplace nebular hypothesis))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칸트는 지식의 기초와 관련한 철학적 성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최초의 철학 저서는 New Elucidation of the First Principles of Metaphysical Cognition이었는데, 이 저작에서 우리는 그가 볼프의 형이상학 이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면서 동시에 그가 볼프 철학에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자로서 칸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762년 형이상학의 기초에 대한 에세이 공모에서 수상하면서 부터였다. 그 공모에서 일등으로 수상한 사람은 Moses Mendelssohn이었고 칸트는 On the Distinctness of the Principles of Natural Theology and Morals라는 제목의 에세이로 이등상을 수상하였다. 칸트의 윤리 이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Jean-Jacques Rousseau이다. 칸트는 처음에 감정에 기초한 윤리 이론에 매력을 느꼈으나, 루소의 Emile과 Of the Social Contract를 읽고 나서 보편적 윤리 이론으로 자신의 입장을 선회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한 것은 이십년이 지나서였으며, 그보다 먼저 과학의 기초에 대한 탐구 및 경험 과학과 형이상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756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 임용이 있었으나 칸트는 지원하지 않았고, 58년에 있었던 임용에서도 그는 자신이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하여 지원하지 않았다. 그가 용기를 얻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62년의 에세이 공모에서 수상하고 부터였으며, 64년 같은 대학에서 시학 전공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자연과학과 철학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66년에 대학에서 사서직을 제안하였고 드디어 칸트는 대학에서 주는 첫 번째 봉급을 받았다. 1769년에는 Jena대학과 Erlangen대학 (독일의 유수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이 있었으나 동 프러시아를 떠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또다시 거부한다. 그러나 사실상 칸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다음해에 있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 논리학 교수직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무마되고 1778년에는 할레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또다시 퀘니히스베르그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대목에서 Wood는 칸트를 베토벤에 비유하고 있다.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되고나서 걸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듯이 칸트의 삼대 비판서들도 그가 퀘니히스베르그에 고립되었을 때 탄생했다고 한다.)
마침내 칸트는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서 교수로 승진 (사서직에서 교수로)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Pregel강 위에 있는 조그만 섬에서 살았다. 그 섬에는 대학 건물과 교회가 있었는데 칸트는 도서관이 딸려있는 건물의 조그만 방에서 혼자 살았으며, 그가 자신의 집을 구한 것은 13년 후라고 한다.
1781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출판했다. 이로써 그는 인간 지성사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기대한 만큼의 반향이 없자 적잖이 실망하였다고 한다. 특히 칸트가 존경했다고 하는 Christian Grave가 쓴 리뷰에서는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을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을 답습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격분한 칸트는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기 위해 1783년 Prolegomena to Any Future Metaphysics를 출판하였으나 그의 비판 철학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이렇듯 칸트는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이 시기부터 인생 역전은 시작되었고 1790년에 그가 받은 봉급은 그 당시 프러시아 교육계에서는 최고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가 59세 이었던 1783년에 그의 친구이자 퀘니히스베르그 시장이었던 J. G. Hippel의 주선으로 도시의 중심가에 있는 근사한 주택을 구입하였다. 이 집의 일층에는 그가 강의를 할 수 있는 홀이 있고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이 있는데 요리사도 고용했다. 이층에는 칸트의 침실과 공부방, 거실, 식당이 있다. 삼층에는 칸트의 하인 Lampe가 기거했다. 식사라고 할 만한 식사는 저녁 한 끼였다. 2층에 있는 식당에서 칸트는 주로 손님들과 저녁을 즐겼다. 비록 칸트는 퀘니히스베르그를 떠난 적이 없지만 퀘니히스베르그가 항구였던 탓에 명망 있는 여러 외국인들이 그의 저녁 손님이 되었다.
그는 새벽 다섯 시에 규칙적으로 일어나 아침 식사로 차 한 잔과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바로 오전 강의를 준비하고 일주일에 5일 아침 7시에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면 공부방으로 들어가 저녁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자신의 글을 썼다. 저녁 다섯 시가 되면 그는 산책을 시작한다. 산책을 나서는 시간이 얼마나 규칙적이었던지 퀘니히스베르그 주부들이 칸트 교수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간을 맞추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칸트의 철학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786년 예나 대학의 철학자 Karl Leonard Reinhold가 영향력 있는 철학지인 Deutsche Merkur에 칸트에 우호적인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였다. 급기야 칸트의 비판 철학이 독일 철학계의 화두가 되었으며, 모든 철학적 문제는 칸트를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느냐 혹은 어떻게 뛰어넘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었다. 1787년에 그는 \"순수이성비판\"의 제2판을 출간했다. 이 때 그는 실천 (혹은 도덕) 이성의 부분을 첨가하려 하였으나 책이 너무 두꺼워 질까봐 단념하고 별도의 제 2 비판서를 계획한다. 1786년, 칸트의 말년에 위기가 시작되었다. 프레데릭 대제가 서거하고 그의 사촌인 Friedrich Wilhelm 삼세가 즉위하였다. 계몽운동에 우호적이었고 종교적 문제에 자유로웠던 프레데릭 대제에 반해, 이러한 개혁 정책에 반감을 가졌던 빌헬름 삼세는 즉위한 이듬해에 교육담당 대신이었던 Baron von Zedlitz를 사임시키고 J. C. Woellner를 그 자리에 앉혔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제들리츠에 헌정한 바 있고,
자연과학에 대한 관심과 함께 칸트는 지식의 기초와 관련한 철학적 성찰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최초의 철학 저서는 New Elucidation of the First Principles of Metaphysical Cognition이었는데, 이 저작에서 우리는 그가 볼프의 형이상학 이론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면서 동시에 그가 볼프 철학에 비판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철학자로서 칸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762년 형이상학의 기초에 대한 에세이 공모에서 수상하면서 부터였다. 그 공모에서 일등으로 수상한 사람은 Moses Mendelssohn이었고 칸트는 On the Distinctness of the Principles of Natural Theology and Morals라는 제목의 에세이로 이등상을 수상하였다. 칸트의 윤리 이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은 Jean-Jacques Rousseau이다. 칸트는 처음에 감정에 기초한 윤리 이론에 매력을 느꼈으나, 루소의 Emile과 Of the Social Contract를 읽고 나서 보편적 윤리 이론으로 자신의 입장을 선회하였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발표한 것은 이십년이 지나서였으며, 그보다 먼저 과학의 기초에 대한 탐구 및 경험 과학과 형이상학의 관계에 대한 연구가 선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756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 논리학과 형이상학 교수 임용이 있었으나 칸트는 지원하지 않았고, 58년에 있었던 임용에서도 그는 자신이 자격 미달이라고 판단하여 지원하지 않았다. 그가 용기를 얻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62년의 에세이 공모에서 수상하고 부터였으며, 64년 같은 대학에서 시학 전공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자연과학과 철학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에 받아들이지 않는다. 66년에 대학에서 사서직을 제안하였고 드디어 칸트는 대학에서 주는 첫 번째 봉급을 받았다. 1769년에는 Jena대학과 Erlangen대학 (독일의 유수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이 있었으나 동 프러시아를 떠난다는 것이 내키지 않아 또다시 거부한다. 그러나 사실상 칸트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다음해에 있을 퀘니히스베르그 대학 논리학 교수직 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무마되고 1778년에는 할레 대학에서 교수직 제안을 받았으나, 그는 또다시 퀘니히스베르그를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 대목에서 Wood는 칸트를 베토벤에 비유하고 있다. 베토벤이 귀머거리가 되고나서 걸작들을 쏟아내기 시작하였듯이 칸트의 삼대 비판서들도 그가 퀘니히스베르그에 고립되었을 때 탄생했다고 한다.)
마침내 칸트는 퀘니히스베르그 대학에서 교수로 승진 (사서직에서 교수로)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Pregel강 위에 있는 조그만 섬에서 살았다. 그 섬에는 대학 건물과 교회가 있었는데 칸트는 도서관이 딸려있는 건물의 조그만 방에서 혼자 살았으며, 그가 자신의 집을 구한 것은 13년 후라고 한다.
1781년,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출판했다. 이로써 그는 인간 지성사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였다고 생각했으나, 그가 기대한 만큼의 반향이 없자 적잖이 실망하였다고 한다. 특히 칸트가 존경했다고 하는 Christian Grave가 쓴 리뷰에서는 칸트의 선험적 관념론을 버클리의 주관적 관념론을 답습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에 격분한 칸트는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기 위해 1783년 Prolegomena to Any Future Metaphysics를 출판하였으나 그의 비판 철학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몇 년이 더 지나서였다.
이렇듯 칸트는 결혼도 하지 않고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이 시기부터 인생 역전은 시작되었고 1790년에 그가 받은 봉급은 그 당시 프러시아 교육계에서는 최고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가 59세 이었던 1783년에 그의 친구이자 퀘니히스베르그 시장이었던 J. G. Hippel의 주선으로 도시의 중심가에 있는 근사한 주택을 구입하였다. 이 집의 일층에는 그가 강의를 할 수 있는 홀이 있고 요리를 할 수 있는 주방이 있는데 요리사도 고용했다. 이층에는 칸트의 침실과 공부방, 거실, 식당이 있다. 삼층에는 칸트의 하인 Lampe가 기거했다. 식사라고 할 만한 식사는 저녁 한 끼였다. 2층에 있는 식당에서 칸트는 주로 손님들과 저녁을 즐겼다. 비록 칸트는 퀘니히스베르그를 떠난 적이 없지만 퀘니히스베르그가 항구였던 탓에 명망 있는 여러 외국인들이 그의 저녁 손님이 되었다.
그는 새벽 다섯 시에 규칙적으로 일어나 아침 식사로 차 한 잔과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바로 오전 강의를 준비하고 일주일에 5일 아침 7시에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가 끝나면 공부방으로 들어가 저녁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자신의 글을 썼다. 저녁 다섯 시가 되면 그는 산책을 시작한다. 산책을 나서는 시간이 얼마나 규칙적이었던지 퀘니히스베르그 주부들이 칸트 교수가 자기 집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간을 맞추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칸트의 철학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1786년 예나 대학의 철학자 Karl Leonard Reinhold가 영향력 있는 철학지인 Deutsche Merkur에 칸트에 우호적인 논문을 쓰기 시작하면서였다. 급기야 칸트의 비판 철학이 독일 철학계의 화두가 되었으며, 모든 철학적 문제는 칸트를 어떻게 해석하고 수용하느냐 혹은 어떻게 뛰어넘느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었다. 1787년에 그는 \"순수이성비판\"의 제2판을 출간했다. 이 때 그는 실천 (혹은 도덕) 이성의 부분을 첨가하려 하였으나 책이 너무 두꺼워 질까봐 단념하고 별도의 제 2 비판서를 계획한다. 1786년, 칸트의 말년에 위기가 시작되었다. 프레데릭 대제가 서거하고 그의 사촌인 Friedrich Wilhelm 삼세가 즉위하였다. 계몽운동에 우호적이었고 종교적 문제에 자유로웠던 프레데릭 대제에 반해, 이러한 개혁 정책에 반감을 가졌던 빌헬름 삼세는 즉위한 이듬해에 교육담당 대신이었던 Baron von Zedlitz를 사임시키고 J. C. Woellner를 그 자리에 앉혔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제들리츠에 헌정한 바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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