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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향가의 이론적 정리 2. 서동요, 풍요, 헌화가, 도솔가
3. 처용가, 우적가, 보현십원가, 도이장가
4. 모죽지랑가, 원왕생가, 원가, 제망매가
5. 혜성가, 도천수대비가, 안민가, 찬기파랑가
3. 처용가, 우적가, 보현십원가, 도이장가
4. 모죽지랑가, 원왕생가, 원가, 제망매가
5. 혜성가, 도천수대비가, 안민가, 찬기파랑가
본문내용
화
양지 스님은 그분의 조상이나 고향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분의 행적이 선덕왕 때 잠깐 보일 뿐이다. 스님이 석장 끝에 베주머니를 걸어 놓으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가 보시하는 집에 가서 흔들어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 알고 공양미를 넣어 자루가 차면 석장이 날아 돌아왔으므로 그 절의 이름을 석장사라 했다. 신기함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재주가 능통하여 신묘하기 비할 데 없었으며, 문장 또한 능숙하였다. 영묘사의 장육삼존, 천왕상과 전탑을 덮은 기와, 천왕사탑의 팔부신당,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의 금강신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고, 영묘사, 법림사의 액자도 썼다. 또한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조그마한 탑을 하나 만들고 불상 3천여 개를 만들어 그 탑에 봉안하여 절 안에 두고 예배했다. 영묘사 장육존상을 만들 때에는 스스로 마음을 모아 망상에서 벗어나는 경지로 대하며 불상을 빚었다. 이 때문에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풍요는 이러하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서러운 이 많아라.
서러운 중생(衆生)의 무리여.
공덕 닦으러 온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무엇을 다지거나 하는 일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이는 그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장육존상을 조성할 때의 경비로 곡식 2만 3천 7백 석이 들었다(혹은 도금할 때 든 비용이라 한다). 논평하건대, 스님은 재주가 많고 덕이 충만한 대방가(大方家)로서 한낱 지엽적 재주에 묻혀버린 사람이라 하겠다. <삼국유사> 권4 의해. 양지사석]
[배경설화의 이해와 감상]
풍요의 배경설화 구성은 크게 6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① 양지의 출신
② 석장을 부려서 재비를 거둠
③ 잡예와 필찰을 잘함
④ 영묘사 장륙상 조성
⑤ 강(講)
⑥ 찬(讚)
위의 배경설화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①에서는 양지가 선덕왕 때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성덕왕 시절은 신라의 불법이 대성하던 시기로, 신비한 능력을 가진 불교 예술가 양지는 신라 민중의 존승을 받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②에서는 양지가 신비한 능력을 쓰는 장면을 보여주는 데 승려들 중에서는 지팡이를 사용하여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례가 몇 가지 있다. 가령 밀본(密本)이 육환장(六環杖)을 날려 늙은 여우와 법척(法)을 찔러 뜰 아래 던져버림으로써 왕의 병을 고쳤다는 설화가 있다. ③ 여기서는 양지가 잡예와 필찰을 잘 했다는 내용을 알 수 있는데 잡예로는 영묘사, 장륙삼존 등을 말한다. ④ 풍요의 직접적 배경설화가 되는 부분은 ④이다. 여기서 양지가 영감을 받아 조성하는 장륙상에 소요되는 흙은 종교적 의미에서 성화된 흙이어야 한다. 즉, 흙이 성스러운 것으로 재생되기 위해서는 제의적 과정을 거쳐야 되는데, 이때 선남선녀들이 불공덕가를 부르며 흙을 나르고 있는 것은 ‘노동’이라고 보기보다는 ‘제의’라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풍요란 민간에 유행하는 속요를 이르는 것인데, 따라서 풍요는 무조건 불교적 성격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즉 다시 말해 본가의 풍요는 특정한 노래의 명칭이 아닌 것이다. 풍요를 노동요라고 보기 보다는 양지가 애초 정수의 상태에서 얻은 깨달음을 노래한 풍요를 노동의 현장에서 가져다 쓴 것으로 노동요로 전이가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⑤ 講에서는 양지가 대방고덕임에도 불구하고, 말고에 가려서 고승으로서보다는 장승으로 알려진 데 대한 찬자 자신의 아쉬운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⑥ 讚에는 세속의 사람들이 미처 못보고 있는 수도자로서의 양지의 면목을 부여시키고 있다.
즉, 풍요에서는 양지의 영묘사 장륙상 조성과 관련하여 불려진 불교적 주체를 담은 민요로 불사에 동참한 경주성 안의 선남선녀들이 흙을 나르며 경건한 마음으로 부른 노래이다. 이 배경설화를 통해 양지와 그 주변에 관하여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해석
7
≪시구풀이≫
來如來如來如 (래여래여래여): ‘來如’는 ‘來’가 ‘오다’의 ‘오’에 대한 뜻 옮김이 되고 ‘如’가 종결어미 ‘다’에 대한 뜻 옮김으로서 ‘오다’로 표기된다. 즉 ‘來如’는 ‘오다’로 밖에 읽을 수 없는 어형이다. 그리고 ‘來如’가 다섯 번이나 똑같은 표기로 사용된 점은 이 형태가 의 식적으로 표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시적 화자는 정수의 상태에 들어 인생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는바, 그것이 작품 속에서 ‘오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반복법 은 기존에는 전형적 민요의 형식으로 파악하였으나, 깨달음의 표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來如哀反多羅 (래여애반다라) : ‘來如’는 위의 내용과 같다. ‘哀反多羅’는 ‘서러외더라’ ‘셜해라’ ‘셔럽다라’ 등으로 비슷하게 읽고 있는 예도 있고, ‘애들하나’로 특이한 읽기도 있으 나 표기형태로 보아 ‘서렵다라, 섧더라’의 옛 형태인 ‘서러바다라, 서러버더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아직 가벼운입술소리 ‘ㅸ’이 쓰이지 않았으며, 따라서 <ㅸ→ ㅇ>변화 가 있을 수 없음으로 ‘서러외더라’ ‘셜해라’로 읽어서는 안 된다를 류렬 학자의 주장도 있고, 김선기는 ‘슬븐 까라’로, 서재극은‘ 셜븐 하라’, 김완진은 ‘셜변 해라’등으로 다양한 견해가 있다. 황패강은 ‘셜븐’으로 재구하고, 서재극의 설을 받아들여 ‘설움’으로 해석하는 데, 이때 ‘설움’은 ‘고생’의 뜻이 아니라 ‘슬픔(悲)’에 가깝다. ‘多-羅’의 해독은 감탄형 ‘- 해라’로 읽을 수 있다.
哀反多矣徒良 (애반다의도량): ‘哀反’는 위의 방법과 같다. ‘多’는 ‘한’, 관형사형으로 훈독 하고 현대어로 풀이하면 ‘많은’이 된다. @@@은 ‘矣徒\'는 근세 吏文書에 보이는 자료로, 이의 독음을 좇아 \'의내’, 즉 ‘우리네’, ‘우리 무리’로 풀이하였고, 서재극은 ‘矣徒\'를 분리 하여 ‘多矣’로 보고, 이를 ‘해’로, ‘많으이’로 읽었다. 김완진은 ‘多矣’를 ‘한의’로 읽었다. 황패강은 확실한 근거를 가진 ‘矣徒’로 읽고, ‘良’은 호격조사 ‘-여’로 보고 있다. 황패강 향가문학의 이론과 해석 (일지사 2001) p. 336
功德修叱如良來如 (공덕수질여량내여) : ‘修叱如良’은 ‘닷라’, 즉 ‘닦으러’로 보았고, ‘修 叱’는 ‘
양지 스님은 그분의 조상이나 고향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분의 행적이 선덕왕 때 잠깐 보일 뿐이다. 스님이 석장 끝에 베주머니를 걸어 놓으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가 보시하는 집에 가서 흔들어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 알고 공양미를 넣어 자루가 차면 석장이 날아 돌아왔으므로 그 절의 이름을 석장사라 했다. 신기함을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재주가 능통하여 신묘하기 비할 데 없었으며, 문장 또한 능숙하였다. 영묘사의 장육삼존, 천왕상과 전탑을 덮은 기와, 천왕사탑의 팔부신당,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의 금강신이 모두 그가 만든 것이고, 영묘사, 법림사의 액자도 썼다. 또한 일찍이 벽돌을 새겨서 조그마한 탑을 하나 만들고 불상 3천여 개를 만들어 그 탑에 봉안하여 절 안에 두고 예배했다. 영묘사 장육존상을 만들 때에는 스스로 마음을 모아 망상에서 벗어나는 경지로 대하며 불상을 빚었다. 이 때문에 남녀들이 다투어 진흙을 운반해 주었다. 풍요는 이러하다.
온다 온다 온다.
온다 서러운 이 많아라.
서러운 중생(衆生)의 무리여.
공덕 닦으러 온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무엇을 다지거나 하는 일에는 모두 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이는 그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장육존상을 조성할 때의 경비로 곡식 2만 3천 7백 석이 들었다(혹은 도금할 때 든 비용이라 한다). 논평하건대, 스님은 재주가 많고 덕이 충만한 대방가(大方家)로서 한낱 지엽적 재주에 묻혀버린 사람이라 하겠다. <삼국유사> 권4 의해. 양지사석]
[배경설화의 이해와 감상]
풍요의 배경설화 구성은 크게 6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① 양지의 출신
② 석장을 부려서 재비를 거둠
③ 잡예와 필찰을 잘함
④ 영묘사 장륙상 조성
⑤ 강(講)
⑥ 찬(讚)
위의 배경설화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①에서는 양지가 선덕왕 때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성덕왕 시절은 신라의 불법이 대성하던 시기로, 신비한 능력을 가진 불교 예술가 양지는 신라 민중의 존승을 받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②에서는 양지가 신비한 능력을 쓰는 장면을 보여주는 데 승려들 중에서는 지팡이를 사용하여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례가 몇 가지 있다. 가령 밀본(密本)이 육환장(六環杖)을 날려 늙은 여우와 법척(法)을 찔러 뜰 아래 던져버림으로써 왕의 병을 고쳤다는 설화가 있다. ③ 여기서는 양지가 잡예와 필찰을 잘 했다는 내용을 알 수 있는데 잡예로는 영묘사, 장륙삼존 등을 말한다. ④ 풍요의 직접적 배경설화가 되는 부분은 ④이다. 여기서 양지가 영감을 받아 조성하는 장륙상에 소요되는 흙은 종교적 의미에서 성화된 흙이어야 한다. 즉, 흙이 성스러운 것으로 재생되기 위해서는 제의적 과정을 거쳐야 되는데, 이때 선남선녀들이 불공덕가를 부르며 흙을 나르고 있는 것은 ‘노동’이라고 보기보다는 ‘제의’라고 보는 것이 옳다. 물론 풍요란 민간에 유행하는 속요를 이르는 것인데, 따라서 풍요는 무조건 불교적 성격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즉 다시 말해 본가의 풍요는 특정한 노래의 명칭이 아닌 것이다. 풍요를 노동요라고 보기 보다는 양지가 애초 정수의 상태에서 얻은 깨달음을 노래한 풍요를 노동의 현장에서 가져다 쓴 것으로 노동요로 전이가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⑤ 講에서는 양지가 대방고덕임에도 불구하고, 말고에 가려서 고승으로서보다는 장승으로 알려진 데 대한 찬자 자신의 아쉬운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⑥ 讚에는 세속의 사람들이 미처 못보고 있는 수도자로서의 양지의 면목을 부여시키고 있다.
즉, 풍요에서는 양지의 영묘사 장륙상 조성과 관련하여 불려진 불교적 주체를 담은 민요로 불사에 동참한 경주성 안의 선남선녀들이 흙을 나르며 경건한 마음으로 부른 노래이다. 이 배경설화를 통해 양지와 그 주변에 관하여 깊은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작품 해석
7
≪시구풀이≫
來如來如來如 (래여래여래여): ‘來如’는 ‘來’가 ‘오다’의 ‘오’에 대한 뜻 옮김이 되고 ‘如’가 종결어미 ‘다’에 대한 뜻 옮김으로서 ‘오다’로 표기된다. 즉 ‘來如’는 ‘오다’로 밖에 읽을 수 없는 어형이다. 그리고 ‘來如’가 다섯 번이나 똑같은 표기로 사용된 점은 이 형태가 의 식적으로 표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시적 화자는 정수의 상태에 들어 인생의 진리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는바, 그것이 작품 속에서 ‘오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난 것이다. 반복법 은 기존에는 전형적 민요의 형식으로 파악하였으나, 깨달음의 표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來如哀反多羅 (래여애반다라) : ‘來如’는 위의 내용과 같다. ‘哀反多羅’는 ‘서러외더라’ ‘셜해라’ ‘셔럽다라’ 등으로 비슷하게 읽고 있는 예도 있고, ‘애들하나’로 특이한 읽기도 있으 나 표기형태로 보아 ‘서렵다라, 섧더라’의 옛 형태인 ‘서러바다라, 서러버더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때 아직 가벼운입술소리 ‘ㅸ’이 쓰이지 않았으며, 따라서 <ㅸ→ ㅇ>변화 가 있을 수 없음으로 ‘서러외더라’ ‘셜해라’로 읽어서는 안 된다를 류렬 학자의 주장도 있고, 김선기는 ‘슬븐 까라’로, 서재극은‘ 셜븐 하라’, 김완진은 ‘셜변 해라’등으로 다양한 견해가 있다. 황패강은 ‘셜븐’으로 재구하고, 서재극의 설을 받아들여 ‘설움’으로 해석하는 데, 이때 ‘설움’은 ‘고생’의 뜻이 아니라 ‘슬픔(悲)’에 가깝다. ‘多-羅’의 해독은 감탄형 ‘- 해라’로 읽을 수 있다.
哀反多矣徒良 (애반다의도량): ‘哀反’는 위의 방법과 같다. ‘多’는 ‘한’, 관형사형으로 훈독 하고 현대어로 풀이하면 ‘많은’이 된다. @@@은 ‘矣徒\'는 근세 吏文書에 보이는 자료로, 이의 독음을 좇아 \'의내’, 즉 ‘우리네’, ‘우리 무리’로 풀이하였고, 서재극은 ‘矣徒\'를 분리 하여 ‘多矣’로 보고, 이를 ‘해’로, ‘많으이’로 읽었다. 김완진은 ‘多矣’를 ‘한의’로 읽었다. 황패강은 확실한 근거를 가진 ‘矣徒’로 읽고, ‘良’은 호격조사 ‘-여’로 보고 있다. 황패강 향가문학의 이론과 해석 (일지사 2001) p. 336
功德修叱如良來如 (공덕수질여량내여) : ‘修叱如良’은 ‘닷라’, 즉 ‘닦으러’로 보았고, ‘修 叱’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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