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서론
2. 본론
3. 결론
4. 참고자료 및 출처
2. 본론
3. 결론
4. 참고자료 및 출처
본문내용
이다, 그러므로 ‘교육적인’ 경험을 위해서 인간은 과거와 현재의 삶을 관련지어 상호관련성과 연속성을 유지해야 한다.
인간을 경험적 유기체, 성장적 유기체, 사회적 존재로 파악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볼 때, 프래그머티즘은 넓은 의미로 교육적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만이 실재이며, 인간은 사회적, 생물학적 존재이고 단순히 지식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 문제해결과정에서 이러한 경험과 지식을 재조직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프래그머티즘은 경험의 모델을 실험의 과정이라 생각하는 점에서 근대과학의 방법을 실험실로부터 인간의 생활 전 영역에 확대하였고, 진화적 사고방식을 택하여 인간사회의 낙천적 발전관을 낳았다.
미학적 연속성은 일상적 경험과 예술적 경험을 연속적으로 통합해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듀이의 프래그머티즘 미학의 연속성은 오늘날 우리 교육현장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시사를 주고 있다. 첫째, 교육과정은 학습자의 경험이 미학적 연속성과 결합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둘째, 수업은 그 자체가 미적 경험이 일어날 수 있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 셋째, 일반교과와 예술 교과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근대 미학의 중심은 예술가와 예술작품이었다. 그러나 현대에서의 미학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우리는 순수예술을 규정하던 미학적 관점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예술적, 미적 경험을 규정할 수 없다. 인간이 주목해야만 하는 예술적 대안은 바로 인간의 ‘삶’이며,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보편적인 삶과 삶 속의 아름다움에 집중해야 한다. 나의 삶 속에서의 윤리 체계를 세워 이를 가꿔나가고, 미적 경험의 차원을 인지하는 행위야말로 ‘예술적인 나’를 만드는 궁극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예술에 대한 정의 규명이나 절대적인 예술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각자의 현실 속에서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체화하는 과정에서 ‘나의 삶’, 나아가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윤리의 심미화는 윤리 체계를 파괴하거나 축소하는 것이 아니며, 구획화로 인해 윤리적인 것과 미적인 것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퇴색해버린 윤리학과 미학의 연관성을 다시금 인식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비단 일시적인 사조가 아니라 오히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해온 철학의 관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자기를 아는 것이 철학의 주된 목적이라면, 신체적 차원의 지식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철학의 중대한 목적 중의 하나는 바른 행동이다. 바르게 행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의지력은 몸의 효력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는 신체적 경험을 탐구하고 연마함으로써 의지를 행위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효율적 의지력의 실제적 작용을 제대로 획득할 수 있다. 철학이 행복의 추구와 더 나은 삶을 과제로 삼는다면 즐거움의 요체이자 매체로서의 몸에 대한 미학은 더욱 가치 있다. 사유가 신체의 건강에 의존하며 또한 근육의 긴장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자연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각자가 ‘실천적 행위자’로서의 삶을 사는 실행적인 예술가이다. 미학은 더 이상 이론적 탐구를 자행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실천을 끌어내는 철학인 것이다. 이를 위해 인간은 감각적 습관을 개선하는 동시에 실천을 중시하는 정신을 함양하는 훈련을 통해 ‘나’와 ‘타자’와의 관계, ‘나’와 ‘환경’과의 관계성을 터득하여 미적 경험과 가치의 개념을 습득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도덕적인 완성을 지향하는 삶을 살게 된다.
현대사회는 불특정 다수로 형성된 대중사회, 즉 익명성의 사회이며, 현대사회는 인간의 개체성과 주체성을 말살하고 획일화된 일반법칙을 강요한다.
바로 이러한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나를 상실한 상태이며, 무조건적으로 무한경쟁을 강요하고 배금주의의 장점만을 보여주는 작금의 세태 속에서 이를 위한 성찰의 기회조차 요원한 탓에 본질적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나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갈망하고, 인간 본질적인 주체성과 개체성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프래그머티즘이 추구하는 기본적 주조음이라 할 수 있다. 프래그머티즘의 관점은 과학기술이 발달한 정보화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과학의 발전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발생한 도덕적 해이와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고 전인적 인간을 추구하면서, 정보와 과학, 기술만을 중시하며 인간을 소외시키던 사회를 벗어나 인간중심의 정보사회를 구축하여야 하는 실존적 과제가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서도 변함없는 과제로 인간의 눈앞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다시금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조금씩 주류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열린 교육’과 각종 ‘대안 교육’도 그 이론적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결국 프래그머티즘의 주장과 만나게 됨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에 걸쳐 인간의 본질을 찾고 자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행위의 중요성이 대두되었지만, 특히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이루어진 기나긴 억압과 혼란의 역사에서 자유와 선택, 책임, 자율성, 주체성, 정체성 등을 강조하는 프래그머티즘의 등장은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볼 때 현실적으로 필요한 사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프래그머티즘을 학문만을 위한 학문인 철학 사조로 평가절하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현대인을 이끌어 갈 진정한 예술적 행위를 위한 해답을 도출하여야 할 것이다.
3. 결론
프래그머티즘에의하면, 예술적인활동을통해주어진상황에대한참여와개입, 상호작용이없으면배움이일어나지않는다. 어쩌면 삶과결합한예술은이러한배움그자체인지도모른다. 현대사회를살아가는우리가주목해야할예술적대안은바로우리 자신의삶이며, 우리는 예술과 삶의 일치를 위해 일상을살아가는보편적인간과그의삶에내재한아름다움을집중적으로탐구하는삶의미학을전개해나가야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은자체로예술적으로가꾸어져야하는\'퍼포먼스\'인것이다.
4. 참고자료 및 출처
아키드림 건축사사무소, 건축가 칼럼 중 ‘건축철학, 가우디’ 참조
슈스터만, ‘삶의 미학’(이학사, 2012) 참조
인간을 경험적 유기체, 성장적 유기체, 사회적 존재로 파악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이러한 주장을 바탕으로 볼 때, 프래그머티즘은 넓은 의미로 교육적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변화만이 실재이며, 인간은 사회적, 생물학적 존재이고 단순히 지식을 받는데 그치지 않고 문제해결과정에서 이러한 경험과 지식을 재조직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프래그머티즘은 경험의 모델을 실험의 과정이라 생각하는 점에서 근대과학의 방법을 실험실로부터 인간의 생활 전 영역에 확대하였고, 진화적 사고방식을 택하여 인간사회의 낙천적 발전관을 낳았다.
미학적 연속성은 일상적 경험과 예술적 경험을 연속적으로 통합해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듀이의 프래그머티즘 미학의 연속성은 오늘날 우리 교육현장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시사를 주고 있다. 첫째, 교육과정은 학습자의 경험이 미학적 연속성과 결합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둘째, 수업은 그 자체가 미적 경험이 일어날 수 있는 활동이 되어야 한다. 셋째, 일반교과와 예술 교과의 통합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근대 미학의 중심은 예술가와 예술작품이었다. 그러나 현대에서의 미학은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우리는 순수예술을 규정하던 미학적 관점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예술적, 미적 경험을 규정할 수 없다. 인간이 주목해야만 하는 예술적 대안은 바로 인간의 ‘삶’이며, 일상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보편적인 삶과 삶 속의 아름다움에 집중해야 한다. 나의 삶 속에서의 윤리 체계를 세워 이를 가꿔나가고, 미적 경험의 차원을 인지하는 행위야말로 ‘예술적인 나’를 만드는 궁극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예술에 대한 정의 규명이나 절대적인 예술의 가치를 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 각자의 현실 속에서 가치와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체화하는 과정에서 ‘나의 삶’, 나아가 내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윤리의 심미화는 윤리 체계를 파괴하거나 축소하는 것이 아니며, 구획화로 인해 윤리적인 것과 미적인 것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퇴색해버린 윤리학과 미학의 연관성을 다시금 인식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비단 일시적인 사조가 아니라 오히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해온 철학의 관념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자기를 아는 것이 철학의 주된 목적이라면, 신체적 차원의 지식은 결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철학의 중대한 목적 중의 하나는 바른 행동이다. 바르게 행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의지가 필요하다. 의지력은 몸의 효력에 의해 좌우된다. 우리는 신체적 경험을 탐구하고 연마함으로써 의지를 행위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효율적 의지력의 실제적 작용을 제대로 획득할 수 있다. 철학이 행복의 추구와 더 나은 삶을 과제로 삼는다면 즐거움의 요체이자 매체로서의 몸에 대한 미학은 더욱 가치 있다. 사유가 신체의 건강에 의존하며 또한 근육의 긴장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자연 속에 살아가는 인간들은 각자가 ‘실천적 행위자’로서의 삶을 사는 실행적인 예술가이다. 미학은 더 이상 이론적 탐구를 자행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실천을 끌어내는 철학인 것이다. 이를 위해 인간은 감각적 습관을 개선하는 동시에 실천을 중시하는 정신을 함양하는 훈련을 통해 ‘나’와 ‘타자’와의 관계, ‘나’와 ‘환경’과의 관계성을 터득하여 미적 경험과 가치의 개념을 습득할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 도덕적인 완성을 지향하는 삶을 살게 된다.
현대사회는 불특정 다수로 형성된 대중사회, 즉 익명성의 사회이며, 현대사회는 인간의 개체성과 주체성을 말살하고 획일화된 일반법칙을 강요한다.
바로 이러한 현대사회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나를 상실한 상태이며, 무조건적으로 무한경쟁을 강요하고 배금주의의 장점만을 보여주는 작금의 세태 속에서 이를 위한 성찰의 기회조차 요원한 탓에 본질적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진정한 나로서의 새로운 탄생을 갈망하고, 인간 본질적인 주체성과 개체성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 바로 프래그머티즘이 추구하는 기본적 주조음이라 할 수 있다. 프래그머티즘의 관점은 과학기술이 발달한 정보화 사회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과학의 발전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발생한 도덕적 해이와 잃어버린 인간성을 되찾고 전인적 인간을 추구하면서, 정보와 과학, 기술만을 중시하며 인간을 소외시키던 사회를 벗어나 인간중심의 정보사회를 구축하여야 하는 실존적 과제가 20세기를 거쳐 21세기에서도 변함없는 과제로 인간의 눈앞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다시금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조금씩 주류로 자리매김하고자 하는 ‘열린 교육’과 각종 ‘대안 교육’도 그 이론적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결국 프래그머티즘의 주장과 만나게 됨을 알 수 있다. 전 세계에 걸쳐 인간의 본질을 찾고 자아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행위의 중요성이 대두되었지만, 특히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이루어진 기나긴 억압과 혼란의 역사에서 자유와 선택, 책임, 자율성, 주체성, 정체성 등을 강조하는 프래그머티즘의 등장은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 볼 때 현실적으로 필요한 사상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프래그머티즘을 학문만을 위한 학문인 철학 사조로 평가절하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속에서 현대인을 이끌어 갈 진정한 예술적 행위를 위한 해답을 도출하여야 할 것이다.
3. 결론
프래그머티즘에의하면, 예술적인활동을통해주어진상황에대한참여와개입, 상호작용이없으면배움이일어나지않는다. 어쩌면 삶과결합한예술은이러한배움그자체인지도모른다. 현대사회를살아가는우리가주목해야할예술적대안은바로우리 자신의삶이며, 우리는 예술과 삶의 일치를 위해 일상을살아가는보편적인간과그의삶에내재한아름다움을집중적으로탐구하는삶의미학을전개해나가야한다. 다시 말해, 인간의 삶은자체로예술적으로가꾸어져야하는\'퍼포먼스\'인것이다.
4. 참고자료 및 출처
아키드림 건축사사무소, 건축가 칼럼 중 ‘건축철학, 가우디’ 참조
슈스터만, ‘삶의 미학’(이학사, 2012) 참조
소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