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격적인 소명이 있었고, 중재자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고, 사건들을 해석하였다. 선지자들이 설명하고 예기하는 사건들은 그들의 설명에 의하여 하나님의 구속의 매개체가 되었다. 신명기 18장 9~22절에서 모범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는 것은 이스라엘에 있어서의 예언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독특성에 있다.
3) 예언자들이 지켜온 기본적인 헌신의 근거는 시내 산 언약에 있다. 그리고 예언의 전승의 기원은 광야 생활의 시대에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일치됨으로써 의식을 잃어버리는 신비가들은 아니었다. 선지자들로 하여금 말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고 후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들은 희랍의 예언가들과는 전혀 달랐다.
4) 참된 예언의 전승은 왕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왕국시대에 들어서서 종교는 생명력을 많이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에 많은 선지자들은 사실상 궁정의 직원이 되었고 따라서 반란의 요소도 사라져 버렸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인물이기보다는 종교의 전문가가 되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5) 고전적 선지자들의 결정적인 체험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비록 환상이 선지자들의 공통점이긴 했으나, 그들의 주된 도구는 기록된 말씀과 구두로 전해진 말씀의 양자 모두였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고발했던 것은 제도들 즉, 성전이나 율법 혹은 제사제도가 아니라 백성들이 이 제도들을 가지고 행했던 일이었다. 백성들은 이러한 가시적 전승들이 하나님의 은총의 담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종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표현하는 그 무엇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는 도덕적 의의 생활을 그 결실로 맺어야만 했다.
6) 선지자들의 최초의 메시지는 백성들 가운데서 죄를 고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백성들의 죄를 보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사6:5)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운 심판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구속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데 있다. 심판은 항상 인격적인 관계의 상황에서의 실제적 인격의 표현인 것이다. 심판의 메시지는 확실히 미래를 향한 살아있는 소망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선지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주권이고 구속적인 사역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주된 대상이 그 당시의 시대였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 시대는 과거와 미래와 상관없이 그것 자체만 보여 질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_이스라엘의 희망
1) 미래에 대한 선지자들의 묘사의 첫째 특징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그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점에 있다. 이와 같이 미래를 적절하게 잘 이해하려면 누구든지 하나님만을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의도하신 것은 새로운 창조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의 심판 역시 창조적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언자의 묘사 속에서 하나님은 한 중보자를 통해서 새로운 질서를 실현시키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한 중보자는 남은 자 또는 여호와의 종 그리고 메시아라는 인물이었다. 중보자는 인간적이고 또 신적인 자질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적대적인 세력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통치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 즉, 메시아이신 나사렛 예수의 모든 특징을 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중보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목적은 언약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다.
2) 구약의 단어 “심판하다”는 히브리어 샤파트(sapat)이다. 이것은 “판결을 내리다”라는 뜻 이상의 보다 광범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침략자를 벌주고 희생자를 보상해주는 그런 방식으로 옳게 바로잡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심판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의 일부이다. 심판은 한편으로는 형벌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을 통해서 타락된 창조 질서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또한 심판은 하나님의 성품상 하나님 홀로만의 특권이다. 그리고 심판은 판단과 행동을 동시에 포함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사역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자신의 아들을 심판하심으로써 인간과 모든 창조 질서는 구속을 얻게 된 것이다.(요12:31~32)
3) 구약에서 죽음은 죄와 관련되어 있으며, 현재 세계의 상태에 대해 무엇인가 부자연스러운 것, 오직 하나님만이 이길 수 있는 그 무엇을 반영하고 있다. 죽음은 죄가 세계 안으로 가져온 파멸의 상징인 동시에 파멸 그 자체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세상의 정상적인 부분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들과 이질적인 것이었다. 죽은 자들의 장소인 스올(음부)은 어떤 위치와도 동일시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히브리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존재 방식으로 생각되었다. 스올은 겨우 목숨이 붙어 있는 장소인 것이다. 이곳은 인간 사회와 그 제도 밖에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지배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4) 구약에서 영생 사상은 평가하기 어렵다. 영생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상세히 논하면 큰 유익이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견해 그 자체가 그를 신뢰하는 자들의 살아남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생명의 독특한 원천이라는 확신 속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영생에 대한 윤리적 기초의 원천은 특별히 지혜 문학에 분명히 나타나는 사상으로서 구약의 응보 사상이다. 의로운 삶이나 악한 삶에는 각기 그 나름대로의 특정한 열매가 있는 법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장차 미래에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 믿음을 확신시켜 주었다. 마치 구약은 장래를 대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약은 구약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진리로 믿고 있는 모든 것의 보충과 실현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실현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계시하신 새로운 창조이다. 즉,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
3) 예언자들이 지켜온 기본적인 헌신의 근거는 시내 산 언약에 있다. 그리고 예언의 전승의 기원은 광야 생활의 시대에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혔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일치됨으로써 의식을 잃어버리는 신비가들은 아니었다. 선지자들로 하여금 말하고 행동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든 것은 하나님의 영과 그리고 후대에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이들은 희랍의 예언가들과는 전혀 달랐다.
4) 참된 예언의 전승은 왕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왕국시대에 들어서서 종교는 생명력을 많이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에 많은 선지자들은 사실상 궁정의 직원이 되었고 따라서 반란의 요소도 사라져 버렸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힌 인물이기보다는 종교의 전문가가 되어갔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선지자와 제사장의 역할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
5) 고전적 선지자들의 결정적인 체험은 하나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었다. 비록 환상이 선지자들의 공통점이긴 했으나, 그들의 주된 도구는 기록된 말씀과 구두로 전해진 말씀의 양자 모두였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고발했던 것은 제도들 즉, 성전이나 율법 혹은 제사제도가 아니라 백성들이 이 제도들을 가지고 행했던 일이었다. 백성들은 이러한 가시적 전승들이 하나님의 은총의 담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종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를 표현하는 그 무엇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는 도덕적 의의 생활을 그 결실로 맺어야만 했다.
6) 선지자들의 최초의 메시지는 백성들 가운데서 죄를 고발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기에 백성들의 죄를 보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었다.(사6:5)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운 심판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은 구속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데 있다. 심판은 항상 인격적인 관계의 상황에서의 실제적 인격의 표현인 것이다. 심판의 메시지는 확실히 미래를 향한 살아있는 소망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선지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님의 주권이고 구속적인 사역의 일부였던 것이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주된 대상이 그 당시의 시대였다고 할지라도 결코 그 시대는 과거와 미래와 상관없이 그것 자체만 보여 질 수 없다는 점을 기억해야만 한다.
_이스라엘의 희망
1) 미래에 대한 선지자들의 묘사의 첫째 특징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기 때문에 그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는 점에 있다. 이와 같이 미래를 적절하게 잘 이해하려면 누구든지 하나님만을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위해 의도하신 것은 새로운 창조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그의 심판 역시 창조적이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예언자의 묘사 속에서 하나님은 한 중보자를 통해서 새로운 질서를 실현시키시는 분으로 묘사되었다. 한 중보자는 남은 자 또는 여호와의 종 그리고 메시아라는 인물이었다. 중보자는 인간적이고 또 신적인 자질들을 소유하고 있으며 적대적인 세력에도 불구하고 보편적인 통치를 성취하게 될 것이다. 즉, 메시아이신 나사렛 예수의 모든 특징을 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중보자를 통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목적은 언약 백성을 구원하는 것이다.
2) 구약의 단어 “심판하다”는 히브리어 샤파트(sapat)이다. 이것은 “판결을 내리다”라는 뜻 이상의 보다 광범위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침략자를 벌주고 희생자를 보상해주는 그런 방식으로 옳게 바로잡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심판은 하나님의 구속 행위의 일부이다. 심판은 한편으로는 형벌을 통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구원을 통해서 타락된 창조 질서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행위이다. 또한 심판은 하나님의 성품상 하나님 홀로만의 특권이다. 그리고 심판은 판단과 행동을 동시에 포함하는 하나님의 역동적인 사역이다. 이것은 신약에서 자신의 아들을 심판하심으로써 인간과 모든 창조 질서는 구속을 얻게 된 것이다.(요12:31~32)
3) 구약에서 죽음은 죄와 관련되어 있으며, 현재 세계의 상태에 대해 무엇인가 부자연스러운 것, 오직 하나님만이 이길 수 있는 그 무엇을 반영하고 있다. 죽음은 죄가 세계 안으로 가져온 파멸의 상징인 동시에 파멸 그 자체의 일부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세상의 정상적인 부분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들과 이질적인 것이었다. 죽은 자들의 장소인 스올(음부)은 어떤 위치와도 동일시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히브리인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반대되는 존재 방식으로 생각되었다. 스올은 겨우 목숨이 붙어 있는 장소인 것이다. 이곳은 인간 사회와 그 제도 밖에 있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지배 밖에 있는 것은 아니다.
4) 구약에서 영생 사상은 평가하기 어렵다. 영생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상세히 논하면 큰 유익이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에 대한 구약의 견해 그 자체가 그를 신뢰하는 자들의 살아남음을 선포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생명의 독특한 원천이라는 확신 속에 그 뿌리를 박고 있다. 영생에 대한 윤리적 기초의 원천은 특별히 지혜 문학에 분명히 나타나는 사상으로서 구약의 응보 사상이다. 의로운 삶이나 악한 삶에는 각기 그 나름대로의 특정한 열매가 있는 법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장차 미래에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 믿음을 확신시켜 주었다. 마치 구약은 장래를 대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약은 구약 스스로 확신을 가지고 진리로 믿고 있는 모든 것의 보충과 실현이 일어나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실현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계시하신 새로운 창조이다. 즉, 그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영원토록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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